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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시즌이다. 이번 주가 지나면 부평에 있는 거의 모든 초중고교가 졸업식을 치르게 된다.
때가 때이니만큼 졸업식 풍경이나 훔쳐볼까 하고 각 학교의 졸업식 일정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문득 눈에 띄는 학교가 있다. 인천성동학교.
작년이던가, 졸업시즌 특집기사를 준비하면서 성동학교의 고3 졸업생들은 어떻게 졸업을 준비하는지 취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다른 일반계고등학교의 졸업식과 전혀 다른 시기에 졸업식을 치러서 정작 졸업식은 취재를 하지 못하고 교사 인터뷰만 했었는데, 올해는 비슷한 시기에 졸업식을 했다.
16일 오전 10시. 인천 부평구에 있는 청각 장애 특수학교 성동학교 강당. 여느 초등학교 강당의 5분의 1이나 될까 싶게 작은 공간에 어린 유치원생부터 거뭇거뭇 면도한 흔적이 보이는 고등학생까지 함께 모여 있었다. 아직 식이 시작도 되지 않았는데 강당 안은 조용하다. 너무 시끄러워서 옆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도 제대로 알아듣기 어려웠던 여느 고등학교 졸업식과는 천지차이다. 이유가 있었다. 인천성동학교는 청각장애학생들을 위한 특수학교였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마지막 만남의 아쉬움을 수다 대신 수화로 나누고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감동적인 국민의례
식이 시작됐다. 그런데 식을 진행하는 선생님이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다. 한 선생님은 마이크를 잡고 목소리로 진행을 하고 다른 한 선생님은 그 옆에서 큰 동작의 수화로 사회자 선생님의 말을 학생들에게 전달했다.
학교나 관공서의 모든 식순이 그렇듯 첫 순서는 국민의례. 국기에 대한 경례 이후 애국가 제창을 하는데, 나는 이렇게 경건한 국민의례를 이전에 본 적이 없다. 앞에서 한 학생이 지휘를 하고 그에 맞춰 모두가 하나의 손짓으로 노래를 한다.
애국가를 들으며 감동했던 마지막 기억이 86년 아시안게임이나 88년 서울올림픽 정도인 것 같은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애국가를 '보면서' 감동을 받았다.
졸업식 식순은 여느 학교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졸업식에 걸린 시간은 여느 학교의 두 배 이상이었다. 졸업생은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각각 10명 남짓인데 말이다.
식순 중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것은 졸업장과 각종 상장 전달하는 순서. 수상자를 호명할 때마다 사회자 선생님이 그 사람의 눈을 맞춰가며 이름을 수화로 보여줘야 했다. 졸업생들 역시 앞에 있는 선생님들의 눈을 보지 않고는 졸업식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그들 사이에 눈빛이 오가는 시간은 마이크에서 나오는 일방적인 소리에 따라 진행되는 여느 졸업식보다 절대적으로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 시간 가량 진행된 수상 시간이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3년, 혹은 6년의 과정을 이수하고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발을 내딛는 성동학교 졸업생들에게 한 시간 정도의 격려와 칭찬은 오히려 부족하게 느껴졌다.
교장선생님의 축하인사와 내빈의 축사 역시도 그랬다.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면서' 살아달라는 교장선생님의 당부가 의례적인 훈화로 들리지 않았다. 한 내빈은 축사를 하면서 울먹거리기까지 했다. 청각장애는 아니지만 장애가 있는 자식을 키웠다는 그는 그 자리에서 수화를 배워 졸업생들에게 '졸업을 축하한다'고 몸짓으로 말했다.
선후배가 '눈맞춤'으로 부르는 '졸업식의 노래'
성동학교 졸업식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꼽으라면 재학생의 송사와 졸업생의 답사였다.
송사와 답사 모두 두 학생이 나와서 했다. 한 학생은 준비한 글을 들려줬고 한 학생은 수화로 그 글을 보여줬다.
학생이 들려주는 송사와 답사는 나 같은 비장애인에게는 "어… 어, 어…"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옆에서 한 학생이 수화로 송사와 답사를 통역해주고 있었지만 나는 그것 역시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성동학교 재학생과 졸업생이 주고받는 글을 '보며' 다시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마이크에 대고 열심히 글을 읽는 학생의 입모양을 보며 그것을 수화로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손짓을 보며, 비록 정확한 글귀를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들의 대화를 느낄 수는 있었기 때문이다.
거의 마지막 순서로 모든 졸업식장에서 불리는 졸업식의 노래 제창이 있었다. 우리 부모님 세대들은 졸업식의 노래를 부르면서 그렇게도 우셨다지만 요즘 이 노래를 부르면서 우는 선후배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아주 무덤덤하게 이 노래를 부르며 학교를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만약 내가 2005년 2월 16일 성동학교 졸업식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당사자였다면 겉으로 눈물을 흘리지는 않더라도 마음은 울었을 것이다. 선배와 후배가 서로 마주보고 눈을 맞춰가며 부르는 '졸업식의 노래'는 가사의 상투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뛰어넘는 감동을 전해주었다.
십수 년간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고통을 겪어온 이들이지만 어쩌면 지금까지의 시간은 앞으로 겪을 시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일는지도 모른다. 같은 처지의 친구와 선후배들과 그들을 이해하고 도우려는 선생님들 품에서 나와 비장애인 중심으로 굴러가는 세상을 맞딱뜨려야 하는 졸업생들. 또 그 뒤를 따라가야 할 후배들.
먼저 세상을 향해 한발 내딛는 선배들과 그들을 보내는 후배들이 나누는 '졸업식의 노래'에는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에 대한 축하와 '새나라 새일꾼이 되겠다'는 다짐 이상의 마음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이제 성동학교를 졸업한 이들은 일부는 대학으로, 또 일부는 직업현장으로, 세상을 향해 첫 걸음을 내딛었다. 비록 수화를 배우지 못해 그들의 마음을 인터뷰하지 못한 못난 기자이지만, 그들에게 아낌없는 축하와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제 개인 홈피에 실었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