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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봉서 바라본 도솔봉
연화봉서 바라본 도솔봉 ⓒ 안병기
샤갈의 마을에 눈이 내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내가 사는 마을에선 겨우내 거의 눈이 내리지 않았었다. 어딜 가야 눈다운 눈을 볼 수 있을까. 일심(一心)으로 설경이라는 '화두'를 참구하다 보니 이마엔 어느새 열꽃이 돋아나는 듯하다. 이 정서적 결핍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겨울 산행 외에 달리 방도가 없을 것이다.

머릿속에서 재빠르게 몇 개의 산을 검색했다. 떠오르는 산들을 대상으로 간단하나마 시뮬레이션을 해본다. 끝까지 남은 산은 태백산과 소백산이었다.

설경만 놓고 본다면 태백산이 조금 더 낫지 않을까 싶었다. 무엇보다 태백산에는 문수봉 가는 길에 2킬로미터 가량 뻗어 있는 고채목 숲길이 있다. 고채목은 자작나무 과에 속하는 낙엽활엽교목이다.

하얀 수피를 지닌 이 나무가 몸을 비틀듯 하늘을 향해 기어오르는 모양은 여간 운치 있는 게 아니다. 그 나무들이 태백산의 티 한 점 없는 하늘과 어울려 만들어내는 풍경은 그 자체로 지극한 조형미를 보여준다.

조망이 좋은 소백산을 택하다

그러나 조망의 즐거움을 놓고 따진다면 단연 소백산 쪽이다. 죽령 남쪽에 자리한 도솔봉으로부터 시작해 연화봉과 비로봉을 거쳐서 국망봉에 이르는 20킬로미터가 넘는 능선은 산이 보여줄 수 있는 비경들을 다 펼쳐 보여준다. 멀리까지 보이는 산맥들은 장쾌하기 그지없다. 일망무제란 말은 여기에 와서 비로소 관념을 벗어던지고 실체를 얻게 되는 것이다.

결국 조망이 더 나은 소백산을 택했다. 늙은 주목을 보기 위해서라면 단양 쪽에 있는 천동계곡을 타고 올라야겠지만 능선 종주를 위해서라면 아무래도 희방사 코스를 택하는 게 좋을 것이다. 지난 20일 오전 11시 반이 지나 희방사 역에 닿았다.

수철동 마을을 스쳐간다. 계곡 옆에는 너른 공터가 있고 거기 수백 개의 항아리들이 앉아서 연좌농성을 벌이고 있다. 사천만 겨레가 조선 된장을 즐겨 먹는 그날까지 농성을 계속할 거라고 항아리 하나가 살며시 귀띔해준다.

겨울 날씨 치고는 참 맑다. 멀리 있는 소백산 중계소가 오늘따라 유난히 가까워 보인다. 날씨가 이렇게 맑으면 멋있는 구경하기 어려울 것이다. 숨가쁘게 거슬러 올라오던 아스팔트가 끝나는 지점에 이르자 수상한 건물 하나가 지나가는 사람마다 훑어 보고 있다. 뭐야? 나한테 맡겨놓은 돈이라도 있다는 거야? 매표소를 통과해서 400여 미터 올라가자 폭포 하나가 길을 막고 선다.

희방사 바로 아래에 위치한 희방폭포. 이 폭포 아래에서 면벽수도하던  고승의 자취가 남아 있는 듯하다.
희방사 바로 아래에 위치한 희방폭포. 이 폭포 아래에서 면벽수도하던 고승의 자취가 남아 있는 듯하다. ⓒ 안병기
높이가 20여 미터에 이르는 희방폭포는 해발 850m 지점에 위치해 있다. 이정록 시인의 <얼음 목탁>의 한 귀절을 떠올린다.


"네 마음도 겨울이냐?
꽝꽝 얼어붙었느냐?"


폭포를 끼고 오른쪽 층계를 조심조심 올라간다. 고개를 빠끔히 내미는 건 희방사라는 절이다. 희방사는 선덕여왕 12년(643) 두운조사가 창건한 절이라 한다.

유서 깊은 내력을 지닌 가람이지만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인지 전각들은 고졸한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소백산도 식후경' 이다. 공양간인지 요사챈지 용도를 짐작할 수 없는 건물 앞에서 준비해온 점심을 꺼냈다. 바로 곁에서는 영주에서 왔다는 등산객 몇 분이 라면을 끓이고 있다.

아침 일찍 삼가리 쪽에서 산에 올랐으나 어찌나 바람이 센지 비로봉엔 접근도 못해보고 하산하는 중이란다. 그분들에 따르면 어젯밤 국망봉 근처에서 젊은 여자 하나가 동사했다고 한다. 이야기 끝에 내게 영하 20℃가 훨씬 넘으니 비로봉 근처에는 아예 얼씬조차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는 충고까지 곁들인다.

오후 1시 희방사를 떠났다. 천문대 방향으로 쉬엄쉬엄 올라간다. 여태까지 내가 다녀본 소백산 등산로 가운데 이 길이 가장 경사가 가파른 듯싶다. 그런데다 계곡 쪽에서 불어는 바람은 사람을 날려버리기라도 할 듯 사납기 그지없다. 오던 길을 되돌아가고 싶은 충동마저 느끼게 한다.

길섶을 따라 피나무와 물푸레나무가 교대로 서 있다. 6월에 하얗게 피는 피나무 꽃은 향기가 좋아서 꿀벌들이 즐겨찾는다. 밤꿀이 가진 쌉싸름한 맛도 나쁘진 않지만 나는 피나무 꿀이 가진 진한 향과 맛을 더 좋아한다.

月白 雪白 天地白 하니….

해발 1050m의 깔딱재에 올라섰다. 여기까지 오는데 40분이 걸렸다. 깔딱재라, 아무래도 바람이 천방지축으로 깔딱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싶다. 내 뒤를 따라오던 등산객 중 몇 명이 이 고개에서 더 이상의 산행을 포기한 채 내려가 버린다.

여기서 연화봉(1383m)까지 가려면 아직도 2킬로미터는 더 올라가야 한다. 제딴에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지 바람이 조금 심술을 누그러뜨린다. 앞서가던 이도 보이지 않고 뒤따라 오던 이의 발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고적함을 억누르지 못한 가슴이 가만히 노래 한 자락을 토해낸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돌아오면/낙목한천 찬바람에/백설만 펄펄 휘날리어/은세계가 되고 보면은/月白 雪白 천지백허니 모도가 백발의 벗이로구나… -단가 <사철가> 일부


깔딱이재와 연화봉  중간에서 바라본 비로봉
깔딱이재와 연화봉 중간에서 바라본 비로봉 ⓒ 안병기
드디어 연화봉에 도착했다. 희방사를 출발한 지 한 시간 반이 걸렸다. 지척에 천문대가 바라보이고 멀리 비로봉이 하얀 머리칼을 쓸어넘기고 앉아 있는 풍경도 눈에 들어온다. 좌우에 보이는 산줄기들이 마치 물고기의 지느러미처럼 파닥인다. 장엄하다. 여기에서 한마디를 더 보태거나 뺀다면 구차스러울 뿐이다.

산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외경이다. 존재의 하찮음을 쉼없이 깨우쳐준다. 그리고 외경을 배운 사람은 그의 삶에다 겸손이라는 아름다운 갈피를 끼워넣게 된다. 희끗희끗 눈발이 날린다. 눈발들이 뺨에 와 차갑게 부딪친다. 정신을 각성시키며 묘한 쾌감을 준다. 사실 겨울산행의 묘미는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연화봉에서 바라본 비로봉. 조망을 위해서 설치한  발판 아래로 들어가서 찍은 것이다.
연화봉에서 바라본 비로봉. 조망을 위해서 설치한 발판 아래로 들어가서 찍은 것이다. ⓒ 안병기
참새도 초가지붕 처마를 뚫지 않는가

눈조차 뜨기 힘들 만큼 바람이 거세다. 여기서 비로봉까지는 아직도 4킬로미터가 훨씬 넘는 거리다. 이 거센 바람속을 헤치고 비로봉까지 어떻게 가야할 것인지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걱정붙들어 매시라. 뿔이 없는 참새도 초가지붕 처마를 뚫지 않는가(誰謂雀無角 其如穿屋何 수위작무각 기여천옥하, 한산시의 한 구절).

우선 제1 연화봉까지를 목표로 잡는다. 5리가 조금 못 되는 이 길은 오르막과 내리막 길이 반복되는 아기자기한 길이다. 두 발에 아이젠을 채운다. 올라오는 동안은 발의 피로도를 고려해서 채우지 않았지만 이제부턴 내리막길이 많을 것이기 때문에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서다.

고채목. 하얀 피부가  樹木(수목) 중의 귀족으로 불릴만하다.
고채목. 하얀 피부가 樹木(수목) 중의 귀족으로 불릴만하다. ⓒ 안병기
행여라도 미끄러질세라 조심조심 연화봉 아래 길로 내려선다. 좁고 아늑한 오솔길을 따라 걷는 동안 고채목이 드문드문 눈에 띈다. 추위에 강하고 메마른 땅에서도 자랄 수 있는 독한 놈이다.

산죽. 낙망하지 마라. 누구에게나  인욕의 시기는 있는 법이다.
산죽. 낙망하지 마라. 누구에게나 인욕의 시기는 있는 법이다. ⓒ 안병기
내리막인가 싶더니 어느새 오르막이다. 길 양 옆 눈밭에는 산죽들이 삐죽히 고개를 내밀고 있다. 엄동설한을 꿋꿋이 견뎌내고 있는 저 산죽들은 인욕보살의 경지를 살고 있는 중이다. 견디고 있는 것은 저 산죽만이 아니다. 저 나무도 산도 나도 모두가 삶을 견디고 있는 것이다.

제1 연화봉 가는 산길에선 나무들
제1 연화봉 가는 산길에선 나무들 ⓒ 안병기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들어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 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황지우 시 '겨울산' 전문


제1 연화봉 가는 길. 인적이 드문 탓에 유독 쓸쓸해 보인다.
제1 연화봉 가는 길. 인적이 드문 탓에 유독 쓸쓸해 보인다. ⓒ 안병기
기회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걸음을 서두른다. 산모롱이 길을 돌아가자 연화봉이 나타난다. 그곳으로 오르는 계단이 길게 드리워져 있다. 연화봉 전체가 마치 설치미술의 조형물처럼 보인다.

천천히 계단을 올라간다. 무거운 다리와 아이젠의 날카로운 이빨에 견디지 못한 목조계단이 삐거덕, 불협화음을 낸다. 오후 4시. 드디어 제1 연화봉(1394m) 꼭대기에 올라섰다.

마치 하얀 산호처럼 아름다운 상고대
마치 하얀 산호처럼 아름다운 상고대 ⓒ 안병기
상고대가 보여주는 황홀경에 잠시 넋을 잃다

별안간 나뭇가지마다 상고대가 맺히기 시작하다. 상고대는 눈꽃이 아니라 서리꽃이다. 습기가 많은 곳에서 기온이 급강하 하면 서리가 가지에 엉겨붙어 마치 산호처럼 아름다운 모양을 보여준다.

가까운 숲의 작은 키 작은 잡목들이 순식간에 서리꽃을 머금는다. 여기 저기 나뭇가지 마다 그 무엇에도 견주기 어려운 황홀함이 주렁주렁 열린다. 겨울산에 보석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상고대일 것이다. 상고대는 나뭇가지에 엉겨붙어 시시각각 새로운 모양을 새롭게 성형한다.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던 나는 문득 생각난듯 카메라의 셔터를 누른다. 아, 카메라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미리 준비한 여분의 건전지까지 몽땅 갈아끼워 봤지만 말짱 도루묵이다. 아마도 급속한 기온 하강이 원인일 것이다. 휴대전화를 꺼내 확인해보니 그마저 방전되어 있다.

큰일이다. 비로봉까지 가려면 아직도 2.5킬로미터나 남아 있고 삼가리 매표소까지 하산하려면 거기서도 거의 6킬로미터를 더 가야 한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하산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된다.

눈 내리는 비로봉. 제1 연화봉에서 잡은 장면이다.
눈 내리는 비로봉. 제1 연화봉에서 잡은 장면이다. ⓒ 안병기
하늘은 점점 컴컴해지고 눈보라가 몰아친다. 마구 뛰다시피해서 비로봉 쪽을 향해 걸어간다. 천동계곡으로 내려가는 길과 비로봉으로 올라가는 갈림길(1394m)에 도착했다. 카우보이 모자를 쓴 국립공원 직원들이 근처를 돌아다니면서 등산객들에게 하산을 종용하고 있다. 바로 내 앞에 가던 학생들이 천동계곡 쪽으로 방향을 튼다.

비로봉 정상은 칠흑이었다

비로봉 정상을 향하여 민박이재(1405m)를 올라간다. 다리가 천근 만근 무거워졌다. 마지막 안간힘을 다한 끝에 비로소 비로봉(1439.5m)에 올라선다. 국망봉은 어디쯤 있는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사방이 어두컴컴하다.

바람이 몰아친다. 비로봉 근처는 초원지대라서 한여름에도 바람이 차갑게 느껴지는 곳이다. 잠시라도 서 있기 어려울 정도다. 마음은 다만 몇 분간만이라도 정상에 머물고 싶었지만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상황이다.

삼가리 쪽으로 급히 하산을 서두른다. 희한하다. 비로봉을 내려서자 바람 한 점 없이 아늑한 산길이 이어진다. 어디 그뿐인가. 제1 연화봉 쪽 하늘이 개이면서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햇볕이 쏟아져 들어오기까지 한다.

기상청 기상예보를 발령할 때는 소백산 남부와 북부의 날씨를 나누어 예보한다더니 산등성이 하나로 차이로 날씨가 하늘과 땅 차이 만큼 다르다는 게 그저 신기할 뿐이다.

1킬로미터 가량 내려오자 달밭재 아래 고즈넉한 달밭 마을이 나타난다. 그제서야 조금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오늘 산행은 너무 추운 나머지 차분히 겨울산의 아름다움을 음미하기엔 힘들었다. 정상 부근의 천연기념물 244호인 주목군락지마저 그냥 스쳐 지나오지 않았던가. 비록 제대로 음미하지는 못했을망정 포기하지 않고 정상까지 올랐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뿌듯하게 한다.

비운다는 말과 채운다는 말이 동일한 의미일 때가 있다.

마음을 비운다는 말을 생각한다. 난 이 말이 가진 추상성을, 그 관념성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마음은 쉽게 비워낼 수 있을 만큼 단순한 것이 아니다. 천 갈래 만 갈래로 나뉘어진 마음 가운데 어느 마음을 비운다는 것인가.

내가 생각할 때는 마음을 비운다는 말은 어불성설에 지나지 않는다. 그 말에 좀 더 분명한 육체를 부여하려면 마음이란 대신 욕심이란 말로 바꾸어야 마땅하리라.

꼭 마음을 비워야만이 발길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마음을 채웠을 경우에도 발길이 가벼워진다. 나는 산사(山寺)에서 열리는 음악회에서 아름다운 음악으로 마음을 채운 적이 있고, 국립국악원에서 열리는 명창들의 소리판에서도 마음을 채운 적이 있다.

채웠으면 당연히 무거워져야 한다. 그러나 돌아가는 발걸음은 오히려 새털처럼 가벼웠다. 그렇게 채운다는 것과 비운다는 것이 한 가지 의미일 경우가 있다. 생각해보라. 언어가 사물의 실체를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삼가리 주차장에 도착하니 이미 저녁 6시가 넘었다. 하늘엔 그 어느때보다 맑은 달이 걸려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산행 후기

이날 소백산에서는 두 차례나 헬기가 떴다고 한다. 토요일 인터넷 동호회에서 만나 산에 오른 네 사람이 국망봉 쪽에서 길을 잃어 아침에 발견됐는데 그중 35살 된 여자 한분은 동사하고 말았다고 한다. 아침에는 그 사람들을 실어가기 위해 헬기가 떴고, 저녁 무렵에는 저체온증 환자를 실어가기 위해 떴다고 한다. 생텍쥐 베리는 <어린왕자>에서 "사막은 벼락치기 애인에겐 몸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은 산도 역시 마찬가지이리라.

-너무 추워서 여분으로 준비한 8개의 배터리가 제1 연화봉에서 부터 작동하지 않는 바람에 비로봉 사진을 찍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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