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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는 눈을 보면서, 눈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내리는 눈을 보면서, 눈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 김형태
서울에 내리는 눈

------------------- 리 울 김 형 태

도시에 눈이 내린다 죄인처럼 어둠처럼 숨죽이며 소리 없이‥‥‥

낯선 회색빛 공간 내리기 무섭게 눈물져 버리고 만다

어렵사리 발을 디뎌도 언제나 이곳에서 눈은 불청객 환영받지 못한다

반갑다고 뛰어나오는 바둑이도 없고

하늘 향해 입벌리는 개구쟁이도 고드름 장난은커녕

눈사람을 만들거나 얼음지치기하는 아이들도 없다

그저 귀찮고 부담스런 존재일 뿐

한강물이 얼음이불을 덮는 긴긴밤에도

화롯가에 모여 밤 구워달라는 녀석도

옛날이야기 해달라고 조르는 계집아이도 없다

대관절 고운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어이없는 박대에 설움이 복받쳐 얼른 땅속으로 눈물 감추려 하지만

그곳에 닿기도 전에 염화칼슘 모래 세례 육중한 차량 바퀴에 짓밟혀

걸레꼴로 산산조각 아니 공중분해 도시의 눈은 갈 곳이 없다

보이는 족족 밟아 버리고 쓸어버리지

어쩌다 운 좋게 허름한 뒷골목 바람벽이라도 만나

잠시 허리를 펼 수 있을 뿐

워낙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 터라 여간해선 오지 않는다

그래도 눈감으면 아름 아름거리는 손주녀석

고추라도 한 번 만져볼까 상경하는 날이면

서울은 전쟁터 길도 모르고 걸음도 더디고 눈도 어두운

우리가 찾아왔으면 지들이 늙은이 얼굴을 봐서라도

조금 조심조심 한 템포 낮추면 될 터인데

그걸 못해 싸움질에 난리법석을 떨고

인정이 넘치는 평화로운 세상 위해 백설기로 왔건만

어찌된 영문인지 우리만 보이면

아들 며느리 딸 사위 서로 목소리 높여 삿대질

누구 하나 웃음으로 맞아주는 이 없다

꼬깃꼬깃 복주머니 열어 쌈짓돈 몇 푼과 눈깔사탕이라도 주고픈데

뭐 산성 냄새가 난다나

늙은이 곁에는 오려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이렇게 왔다가 늘 하룻밤도 못 묵고 끝내 쫓겨나고 만다

- 시집 <물빛 안경처럼 나는 너의 창이고 싶다>에서


춥고 가난한 곳을 골라 사랑으로 찾아드는 백설은 하늘의 천사...
춥고 가난한 곳을 골라 사랑으로 찾아드는 백설은 하늘의 천사... ⓒ 김형태
오늘 새벽 이상하게 눈이 떠져(아마도 눈 오는 소리에 잠이 깬 모양이다) 창밖을 바라보니, 서설처럼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늘에서 하염없이 쏟아지는 하얀 솜사탕...... 어디선가 영화 <러브스토리> 배경 음악이 들리는 듯 가슴이 떨려왔다.

김광균 시인은 눈 오는 모습을 보고 이렇게 노래하였지.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시인의 눈으로 볼 때, 눈은 춥고 가난한 동네에만 내린다. 무덥고 부유한 동네에는 비가 내린다.

눈이 오면 강아지처럼 무조건 좋았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밖으로 뛰어나가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바라보면 얼굴 가득 눈이 내렸다. 눈(眼)에 내린 눈(雪)은 눈물이 되고, 입 안에 들어오는 눈은 미소가 되었다.

동무들과의 눈싸움, 눈사람 만들기, 눈썰매 타기... 등 아름다운 동심이 묻어 있는 눈!

아버지, 어머니도 무조건 좋았던 시절이 있었다. 병아리처럼 따라다니며 조금이라도 어머니가 보이지 않으면 울음을 터뜨리던 유아기가 누구에게나 있었다.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부모와 자식 사이는 밀착 관계이다. 날 떼어놓고 부모님이 어디를 간다고 하면 나도 따라간다고 떼를 쓴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학생이 되면서 친구가 더 좋고, 사춘기가 되면서 이성에, 또는 나 자신에 골몰하였다. 어른이 되고 나서 돌아보니, 어느새 부모와의 거리는 한참 떨어져 있었다. 부모는 열 자식을 키우는데, 열 자식은 부모 하나를 제대로 모시지 못한다.

전설과 동심을 주렁주렁 안고 내리는 눈이 현대 도시에서는 불청객이듯 요즘 세상에서는 할머니, 할아버지라는 존재가 더 이상 반가운 손님이 아닌 듯 하다. 한때는 동방예의지국이라 자랑하던 우리 나라에서 걸핏하면 노인 학대와 관련된 기사가 신문 방송을 장식하니 말이다.

언제쯤이면 다시 눈을 동심의 눈으로, 부모님을 어린아이처럼 대할 수 있을까? 과연 그런 날이 오기나 할까?

위 시는 '노인 박대 현상'을 서울에 내리는 눈에 비유하여 작품화한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리울(아호: '유리와 거울'의 준말) 김형태 기자는 신춘문예 출신으로 시와 소설을 쓰는 문인이자, 제자들이 만들어 준 인터넷 카페 <리울 샘 모꼬지> http://cafe.daum.net/riulkht 운영자이다. 글을 써서 생기는 수익금을 '해내장학회' 후원금으로 쓰고 있는 선생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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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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