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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담양 창평고등학교 전경. 이 학교는 결코 작지 않다. 남도에 가서 어느 학교 보낼 건가 현지민에게 물어보면 곧 답이 나온다.
전남 담양 창평고등학교 전경. 이 학교는 결코 작지 않다. 남도에 가서 어느 학교 보낼 건가 현지민에게 물어보면 곧 답이 나온다. ⓒ 창평고등학교
마나님께 귀향하자고 했을 때 누구나 들어봤음직한 이야기를 나도 들었다.

“아이들 교육은요?”
“교육?”

교육이라 참,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우리 인생을 걸고 모든 걸 쏟아 붓고 싶지는 않은 게 교육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교육이 사회를 들었다 놓았다 한다. 오죽하면 교육문제 때문에 이민을 가고 기러기 아빠가 줄줄이 있을까 보냐.

알아서 하겠지 하며 방치하는 것도 요즘 시류를 보면 무책임한 일이다. 어차피 잘 할 놈들은 제들 알아서 할 것이고 제아무리 공을 들이고 돈을 들인들 관심이 없거나 공부에 소질이 없고 담쌓고 사는 아이라면 무슨 소용인가? 그렇다고 내버려둘 수도 없다.

우리 같은 처지에 과외비로 쳐바를 형편도 못 되니 운이 좋으면 4년제나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가는 것이고 실력 없으면 남들 가는 대학에 가서 졸업장 따면 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로는 아이들 교육을 걱정하는 아내와 애들을 사랑하는 자신을 다독이기에 역부족이다.

"당장 당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아이들을 포기하라는 거냐?"고 묻는다면 마땅한 변명거리나 대안이 없다. "하다 보면 되겠지. 운에 맡기자"고 할 수도 없다. "지방도 사람 사는 곳인데 설마 최악의 상황이야 발생하겠어?" 이런 안일한 자세로는 설득하지 못한다. 지방은 사람 살 곳이 못 되는 지역으로 머리에 박혀 있으니 난감하다.

1차적으로 시골에 가면 또래 아이들이 거의 없다. 교육이란 수동적으로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열린 학습권이 보장되고 아울러 동료와 함께 하고 때론 부딪혀 문제를 공동 해결하는 과정에서 이뤄진다고 보면 요즘 시골과 지방의 학교는 학생수에 있어서부터 과소(寡少)가 문제지 않은가.

극단적 예라고 할 것도 없이 내가 다닌 중학교-화순북면중학교는 학생수가 3개 학년 13학급 780여명이었던 때가 80년대 중반이었는데 불과 20년 사이에 각 학년 1학급씩 15명, 19명, 14명으로 총 48명에 불과하다.

이런 실태로는 다양한 동급생들의 면모를 보고 잘하는 것을 배우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스스로 배우기에는 부족하고 운동회나 소풍을 간들 흥겨운 잔치마당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고만고만한 아이들과 빤한 습성과 단순함은 도시에 살다간 우리에겐 크나큰 짐이나 걱정이 아닐 수 없어 고민이다.

그렇다고 마냥 암담한 상황에 절절매고 있을 수만 없다. 대안을 찾아야 하니 그건 앞글에서도 밝혔듯이 차선으로 초등학교,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는 지방 중소도시에서 살며 함께 호흡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화순에서 가까운 순천이나 광주광역시 외곽이면 주말에 아버지가 일하고 있는 <산채원>을 방문하여 일을 거들며 배울 수 있는 기회도 얻기 쉽다.

그 다음이 문제다. 중학교까지는 어찌어찌 해보겠는데 고등학교는 당장 3년 후 대학 진학을 코앞에 두고 있으니 그 전선에서 자칫 벗어나면 낙오자가 되기 쉽다. 믿고 보낼 만한 학교가 있느냐는 현실적인 문제의 한가운데에 서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지금보다 우리나라 교육전반이 획기적으로 변화해 아비인 내가 하고 있는 자연과 토종식물, 농촌문화에 대한 일상적 학습이 인정될 리는 만무하다. 덧붙여 아이들이 꼭 가업을 잇겠다고 덤빌 보장이 없다. 원하는 전공을 택하는데 자유롭게 하려면 최소한 학교교육에 대한 미련을 떨칠 수 없는 법이다.

참교육을 실현하려고 해도 엄연히 성적순에 따라 대학에 들어가는 우리의 현주소에 근거하여 전남권에서 보낼 만한 학교를 찾아야 한다. 이쯤이면 아예 새로운 인생을 살기로 한 내 계획을 접고 싶을 지경으로 막막하다.

아내는 더 안달이고 어떻게든 가는 걸 포기하게 할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은밀히 나를 말릴 방도를 찾고 있지는 않을까? 혼자 가라고 하면 할 말이 없는 것 아닌가.

걱정이었다. 사람은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라 했다. 강남 8학군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더 잘해주지는 못할망정 남들이 하는 만큼은 해줘야 한다는 게 일반적 부모 심정이다. 지금 여섯, 넷 먹은 아이들이 몇 년 정착을 준비하다보면 몰라보는 사이에 훌쩍 커버릴 것인데 시골로 들어가겠다니!

서울 생활을 정리한 마당에 강남으로 비집고 들어갈 생각은 애초에 없지만 여기에서만은 그리 간단치가 않다. 쉽게 지방 대도시를 떠올려 보면 국공립학교는 성에 차지 않는다.

명문에는 기숙사와 도서관이 잘 돼있다. 기숙사에서 사는 학생이 80%다. 도서관 장서는 2만여 권이고 국어과 선생님이 관장을 맡아 독서지도를 하는데 월 1권 독후감을 쓴다.
명문에는 기숙사와 도서관이 잘 돼있다. 기숙사에서 사는 학생이 80%다. 도서관 장서는 2만여 권이고 국어과 선생님이 관장을 맡아 독서지도를 하는데 월 1권 독후감을 쓴다. ⓒ 창평고등학교
의외였다. 광주나 전주가 아닌 시골에 그 답이 있었다. 해마다 입시가 끝나면 지방지와 중앙일간지에 오르내리던 명문고교가 여럿 있다. 지역별로 찾아보면 알 만한 사람들은 명문고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다 안다.

내 코가 석자라 난 매년 관찰을 하였다. 내가 정착할 화순 북면 백아산을 기점으로 내 모교이기도 한 담양 창평고가 20분 이내에 있고, 화순읍을 지나면 능주고는 30분 거리다. 인물의 고장 장성으로 가면 장성고가 있으니 세 학교의 면면을 살짝 보면 대도시 여느 학교 못지않다.

읍면 단위에 있으면서도 정원의 70% 이상이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도서관 열람석이 100%를 상회한다. 시설 및 학교의 지원이 만만찮다. 게다가 중학교 성적이 상위 15% 이내에 들지 않으면 진학하기 힘들며 수준별로 학교에서 모든 교육이 행해지기 때문에 과외비가 전혀 들지 않는다. 세 명 중 한 명이 장학생이다.

명문대 진학률도 서울 웬만한 고교 못지않다. 그 숫자로 말하면 덜떨어진 부모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현실에선 하나의 잣대이기도 하니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 장성고는 8년째 전원 4년제 대학을 보냈고 창평고는 '농어촌특별전형' 전국 1위를 수년 째 수성하고 있다.

걱정을 붙들어 매기로 했다. 그 학교 들어갈 성적이 되지 않을 것을 염려할 따름이지 집에 오가는 차비와 옷가지만 챙겨주면 알아서 공부시켜서 내로라하는 대학에 술술 보내주니 부모는 학교에 찾아갈 일도 없다.

80년대 중후반 내가 다닐 때만 해도 스파르타식이었지만 자율과 창의가 강조되는 학교, 공부하겠다면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는 학교가 있는데 굳이 도시와 서울을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 아이들은 부모들 태반이 바라는 아이와는 조금 다르게 키우고 싶다. 자연에서 배우고 자연과 호흡하여 생활에서 밴 것을 선택한 전공과 연결되게 하고 싶다. 그 정도라면 일류대 가지 못하라는 법 없다. 한국 최고의 특산품-식물자원을 쭉 꿰고 있다면 하버드대를 못 갈까보냐.

우리에겐 아직도 여럿 중 선택할 기회가 널려 있는데 이쯤에서 치맛바람이나 막걸리 값 벌 생각을 접어야겠다. 이런 사실을 아내에게 몇 번에 걸쳐 설명을 해줬더니 고향에 산나물백화점 <산채원> 만드는 걸 두말 않고 흔쾌히 동의했다. 이런 아내와 사는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

이 기회에 진정한 교육을 다시금 생각해보아야겠다. 교육이었는지, 학교였는지 말이다. 현재 교장 선생님은 나를 중학교로 직접 찾아오셨다. 이것 하나면 모든 설명이 끝나는 것 아닌가? '3류 똥통학교'라는 소리를 들었던 나에게 긍지를 갖는 학교로 만들어 주신 선생님들을 찾아뵐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덧붙이는 글 | 김규환 기자는 <잃어버린 고향풍경1>(하이미디어 刊)을 냈다.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cafe.daum.net/hongaclub)대표이다. 올 연말 쯤 전남 화순 백아산으로 귀향하여 <산채원 山菜園>(cafe.daum.net/sanchaewon)을 만들 꿈을 현실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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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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