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번지 점프를 하다>에서 국어 교사로 나오는 주인공은 칠판 끝에서 끝까지 좌우로 긴 금을 그리면서 담임 반 아이들과의 첫 만남을 시작합니다. 그 긴 금은 광활한 대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 어느 한 지점에 놓인 바늘 끝에 먼 우주에서 날아온 꽃씨 하나가 사뿐히 내려앉을 수 있는 불가능에 가까운 기막힌 확률로 우리가 만났다는 식으로 학생들에게 인연의 소중함을 말해줍니다.
저도 칠판 가득 수평선처럼 보이는 선 하나를 그려놓고 올해 담임을 맡은 아이들과의 첫 만남의 시간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들려준 이야기는 영화 속의 내용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명에 대한 얘기를 해주었지요.
“여기 그려놓은 선은 제가 여러분을 바라보는 시선을 의미합니다. 우리 반은 모두 서른다섯 명입니다. 모두 이름도 다르고 얼굴도 다릅니다. 성적도 다르고 가정환경도 다릅니다. 하지만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생명입니다. 생명은 모두 동일합니다. 사람의 눈에 잘난 개미 못난 개미가 없는 것처럼 먼 하늘에서 보면 사람도 모두 같은 사람일뿐입니다. 여러분의 조건을 따지지 않고 공평한 시선으로 여러분을 대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공평한 시선’을 굳이 강조하면서 아이들과의 첫 만남을 시작하는 이유는 아이들의 삶의 조건들이 칠판에 그려놓은 수평선처럼 결코 공평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에게 있어서 가정환경이란 대체로 부모의 재산 상태나 화목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대부분 이미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진 일들입니다. 물론 자녀의 문제로 부부 사이가 악화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그리 흔한 일은 아니지요.
하지만 아이들은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가난한 집안 형편이나 부모의 낮은 학력, 혹은 이혼 경력 등에 대해서 창피함을 느끼거나 그것을 감추고 싶어 합니다. 어쩌면 당연한 심리이지만, 그렇다고 담임으로서 아이들의 가정환경을 모른 체하고 지나갈 수만은 없습니다. 아니, 적극적으로 파악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학비 면제나 다른 도움 등을 통해서 공평하지 않는 조건들을 어느 만큼은 공평하게 조절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올해 담임을 맡으면서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작년에 수업을 통해서 만난 아이들이라 어느 정도 집안사정을 알고 있던 터여서 더욱 조심스러웠습니다. 생활보호대상자나 농어가 자녀들은 동사무소에서 떼어주는 서류 한 장이면 쉽게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소년소녀가장이나 서류상의 저소득층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서류상으로는 혜택을 받을 수 없지만 실제 생활이 어려운 학생들은 어려운 가정 형편을 소상히 파악하여 담임이 의견서를 제출해야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학생들의 가정환경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에게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 칠판에 수평선을 그려놓고 첫 만남을 시작한 것도 그런 고민의 결과였습니다. 자신의 노력과는 무관한 가난한 환경이나 외모 때문에 은연중에 차별대우를 받아온 아이들은 공평한 시선으로 대하겠다는 담임의 말 한마디에도 눈빛을 반짝이며 쉽게 마음을 열기도 합니다.
거기에 아무리 노력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는 아이들이나 성적과는 별 상관없이 자유롭게(?) 살아온 아이들까지도 그들의 행실이나 조건과 상관없이 신뢰의 눈빛을 보내면 이전과는 사뭇 달라진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어떤 말을 해도 '소 귀에 경 읽기'인 아이들도 있기 마련이지만 말입니다.
생명에 대한 얘기를 해주고 난 뒤에는 ‘학부모님께 드리는 편지’를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는 그 자리에서 함께 읽었습니다. 부모님께 전해주지 않고 버려버리는 일이 허다하여 내용이 결코 불리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시켜줄 속셈이었는데 편지를 읽는 도중에 박수소리가 들리기도 했습니다. 그 반대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먼저 학생들에게 친절한 교사가 되도록 노력하려고 합니다. 아이들을 이런 저런 조건들로 비교하거나 편애하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천하보다도 귀한 생명으로 대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학부모님께서도 자녀를 형제들이나 이웃 아이들과 비교하지 마시고 있는 모습 그대로 아껴주시고 사랑해 주셨으면 합니다.
담임으로서의 저의 소박한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제게 맡겨진 아이들이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당당한 인간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급을 맡은 담임으로서의 마음가짐을 ‘자율’과 ‘사랑’이라는 두 단어에 담아보았습니다. 저는 오늘 아이들에게 자기를 사랑하는 것과 이기적인 것과의 차이점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남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부모에 대한 공경도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님께서도 자녀들의 가치를 학교 성적만으로 판단하지 마시고, 조금 늦되고 부족한 모습을 보이더라도 꾸지람보다는 칭찬의 말씀을 더 많이 해주시기 바랍니다.’
편지를 같이 읽고난 다음 저는 마지막으로 아이들에게 어떤 양식이 그려진 종이 한 장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이른바 ‘가정환경조사서’입니다. 하지만 제목은 이렇게 고쳐놓은 뒤였습니다.
‘아는 만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제목만 고친 것이 아니라 내용도 더러 없애거나 고쳐놓았습니다. 먼저, 부모의 학력을 적는 자리를 없앴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초임 교사시절에는 부모의 학력이 국졸인 학생들이 참 많았습니다. 이런 경우, 아이들은 무려 12년 동안이나 연례행사처럼 부모의 학력을 부모님에게 여쭙거나 기억하여 적어내야만 합니다. 물론 학력이 국졸인 것이 결코 부끄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아이가 느끼는 감정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부모의 직업을 적는 난은 그대로 두었습니다. 오히려 ‘사업’이나 ‘자영업’이라고 적은 아이들은 집으로 전화하여 심층면담을 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인 직업을 묻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은 전혀 거부감이 없이 있는 그대로 말해주었습니다. ‘사업’이 ‘무직’으로 바뀔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숨기고 싶은 사실을 자꾸만 캐묻는 담임이 밉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저만의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만난지 일주일이 채 못되어 아이들은 담임인 저를 신뢰하는 눈치입니다. 고마운 일이지요. 아이들은 저에게 어떤 일도 사랑으로 접근하면 탈이 없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해준 셈입니다.
혹시 모르지요. 언제 또 터질지는. 그때를 위해서 내공을 쌓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내공이란 것도 다름 아닌 ‘사랑’이겠지만 말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쓰는 도중에 한성수 기자님의 <'국졸'을 '고졸'로 바꿔보신 적 있나요?>를 읽었습니다. 큰 공감을 느꼈기에 한성수 기자님께 답장을 드리는 형식으로 글을 수정하려다가 그냥 올립니다. 염려하시는 일들이 학교 현장에서 자취를 감추도록 작은 힘이나마 보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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