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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서방이 선채로 다시 외쳤다.
"이번엔 오혈포(五穴砲)입니다. 말 그대로 다섯 개의 구멍에 총환을 재고 연이어 방포할 수 있는 총포입니다."
사대 앞 20보 앞에 사람 모양의 송판 표적이 세워졌다. 산총을 내려 좋은 사수들은 가슴과 허리 등에 맨 가죽집에서 무슨 쇠뭉치 같은 것들을 꺼내 들었다. 산총 시범을 보일 때부터 사수들이 착용하고 있던 것이었으나 박 서방의 소개와 함께 사수들이 꺼내 들기까지 참관자들은 그 용도를 알지 못했었다.
동이와 그 오른쪽의 사수가 들고 있는 총은 총신의 길이가 한 뼘 하고도 한 치 가량이 남았다. 크막한 5연발 약실통으로 인해 불룩한 몸매에서 길게 총신을 빼어 낸 자태가 한눈에도 정교한 손길이 많이 갔음을 느끼게 했다.
나머지 세 명의 사수가 들고 있는 총은 동이의 것과 동일한 몸통에 총신의 길이만 달랐다. 다섯 치(15Cm)를 넘지 않는 총신으로 인해 그야말로 손잡이가 있는 쇠뭉치를 받쳐 들고 있는 형상이었다.
"저 것이 진정 총포란 말이오?"
"설마하니 저것에 사람이 상하기야 하겠소이까?"
"그러게 말입니다."
사수들이 무기라고 들고 있는 조막한 오혈포를 보며 원로석 여기 저기에서 술렁거렸다. 장교들이라고 해서 반응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홍윤서와 본영의 부장(副將)인 마두승이만은 신뢰의 미소를 지었다. 권기범이나 김민균 등도 기대의 표정을 감추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처음 이 무기를 제조하도록 발의하고 조언한 것은 양인 기술자들이었지만 꼼꼼하고 솜씨 좋은 박 서방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한 일이었으므로 일에 착오가 있을 리 없었다. 더구나 이미 보총과 대포의 제작을 통해 검증된 군기창의 역량과 시연회까지 열 정도로 실험을 마친 무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시시껄렁한 것은 아닐 터였다.
"이보게, 윤서. 자네는 저 오혈포를 잘 아는 모양이지?"
홍윤서의 믿음직스런 웃음이 의아한 듯 권기범이 물었다. 권기범이 아는 홍윤서는 동서고금의 전적에 해박하고 어려서부터 신동소리를 들은 귀재이기는 했지만 칼이나 총포 같은 무구(武具)를 가까이 할 이는 아니었다.
"무슨 소리인가 이 사람아. 보총이나 대포, 소포 등이 만들어질 때 원리를 설명해 주던 나를 잊었는가? 내 이래뵈도 박 서방의 총포 스승일세. 저 총의 내력까지 소상히 꿰고 있는 사람일세."
경신년(1860) 대동계가 토포되어 젊은이들이 대거 중국행을 결단했을 때 아직 정체가 드러나지 않아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박 서방이 젊은이들을 따라 나섰다. 그리고는 청국에서 다시 서구지역으로 유학길에 오를 때 홍윤서와 함께 도미(渡美)하여 서양 총포와 화약 관련 제조술을 직접 익혔다. 기술이 출중하고 한문서적도 해독할 줄 아는 보기 드문 장인이긴 하였으나 영어를 익히는데 어려움이 있어 기술습득 과정에서 통역과 번역에 홍윤서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홍윤서가 무(武)를 접할 일이 없었던 사람임에도 서양 병기에 관해 제법 소상히 알게 된 것도 이때였다. 때문에 홍윤서는 박 서방이 오혈포 제작 계획을 발표했을 때부터 그것이 1832년 새뮤얼 콜트 (Samuel Colt)가 발명해 특허를 받았고 1835년 플로리다 주에서 세미놀 인디언과 전투할 때 유감없이 위력을 발휘했던 리볼버(rivolver)의 변종일 것임을 알고 있었다. 공이치기를 제낌으로써 여러 개의 약실이 있는 원통이 회전하고, 위쪽 약실은 총신과 일직선을 이루어 탄환이 장전된다는 기본적인 작동원리까지도.
"자네도 저런 총포를 접한 일이 있지?"
홍윤서가 권기범에게 물었다. 콜트는 1851년에 영국 대박람회에서 다양한 리볼버를 선보여, 영국 해군에 크림전쟁용으로 일부를 팔기도 했으므로 유럽 쪽에 가 있었던 권기범도 리볼버를 접할 기회가 있었을 것이었다.
"아다마다. 기실 제작 중일 때 몇 번 군기창엘 기웃거렸네. 기술적인 문제야 박 서방이 알아서 할 몫이고 난 그저 사용자의 입장에서 조언을 했을 뿐이지."
"하긴 자네가 무(武)와 병(兵)의 일을 모르면 뉘라서 알겠는가. 내가 공연히 난 척을 하였나 보이. 공자 앞에서 문자를 쓴 격이야."
홍윤서가 멋쩍게 웃었다.
"탕, 타타탕."
권기범과 홍윤서가 잠시 말을 트는 그 짧은 사이에 발사 구령이 떨어졌던지 사격이 시작되었다. 다섯 명의 사수가 장전과정 없이 공이치기를 손으로 제끼는 동작만으로 다음 탄을 연속 발사했다. 보총이나 산총에 비하면 총소리가 빈약하고 발사 후 총들림 현상이 심했으나 표적에 박히는 탄의 모습은 자못 위력적이었다. 겨우 20보 밖에 안 되는 이 정도 거리라면 사람이든 짐승이든 심하게 상할 것은 자명해 보였다. 다섯 발의 회전 탄창을 다 비운 사수들이 표적을 뽑아 참관자들 앞을 돌았다.
"우와!"
"만세다, 만세!"
"대단허이!"
다섯 발 모두 표적에 적중한 것을 확인한 참관자들이 모두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유독 동이가 돌 때 사람들의 환호가 뜨거웠다. 동이가 표적을 들고 집행위원석 앞을 지날 때 권기범은 깜짝 놀랐다.
다른 사수들도 물론 표적 중앙에 안정적인 탄착군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동이는 표적의 머리 부분 한 뼘 이내에 다 모여 있었다. 이런 식의 사격이라면 설사 흉갑(胸鉀)을 입고 있다 할지라도 단 한 방에 사람을 살상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이제 암기(暗器)의 시대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수리검(手裏劍)이라고도 불리우는 탈수표(脫手票:표창)로도 20보 거리에서 사람의 머리를 적중시키기는 어려운 노릇이었다. 칼 길이만 여섯 치가 넘는 유엽비도(柳葉飛刀)라면 모를까 표창으로는 20보 거리에서 이 정도 타격력을 얻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이것을 보급한 북송 시대의 중도 사천(四川)의 절에서 10년을 연마한 뒤에야 중국 각지에 전수했다하니 수련에 보통 공이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의 사수들은 갓 개발된 오혈포로 짧은 시간을 연마한 끝에 모두 저 정도 살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로 변해 있는 것이다.
누차 그런 생각으로 서양식 화약병기의 개발을 주도 했던 자신이었고 어제도 그런 말을 강조했던 터였지만 권기범은 새삼 과학과 기술의 힘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실감했다.
"봉기 전까지는 병장기를 드러내지 않고 다녀야 하니 여러모로 쓸모가 많겠어. 수고했네. 너무도 훌륭하이."
권기범이 옆에 있는 박 서방을 치하했다.
"다 영수님과 부영수 님의 덕입니다요. 이 몸이 어미 몸 밖으로 나와 이토록 보람있고 중차대한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 죽어서도 다 갚지 못할 은혜입니다."
군기시(軍器寺: 병기, 기치, 융장(戎仗), 집물 등의 제조를 담당하던 조선의 관청)에서 야장(冶匠)과 화약장(火藥匠)을 겸하는 기술자로 인정받던 시절 박 서방이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사사로이 조총을 주조해 밀매하다가 적발이 되었다.
경중에 따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수 있는 사안이었으나 권기범의 부친 권병무가 군기시 도제조와 관할 포도대장을 막대한 뇌물로 구워 삶고, 당시 한성부 부윤이던 홍윤서의 부친 홍영익이 청을 넣어 구명(救命)해 주어 풀려날 수 있었다. 이것을 계기로 대동계의 일원이 되었고 혼신을 다해 계의 일에 일조하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무슨 소리를 그리하는가, 박 창장(廠長). 우리가, 그리고 우리 계가 박 창장에게 기대는 바가 크네. 서양의 총포 제조기술을 익혔다고는 하나 산업화된 서양의 여건과 비견할 수 없는 조선에선 그대로 적용할 수 없었을 터인데 이 만큼 훌륭한 병기들을 만들어 준 은혜는 잊지 않을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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