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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돈
더구나 걱정되는 것은 숨이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유은비였다. 시간이 더 지난다면 그를 구할 수 없을지 몰랐다. 어차피 회생하기 힘든 모습이었지만 승부를 빨리 결정지어야 했다.

“이 놈이… 감히…?”

청마수 호광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양손을 기이하게 사선으로 내린 그의 팔이 점차 금속 광택을 뿜기 시작하고 햇빛을 반사시키는 그 모습은 끔찍할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본 담천의는 검을 빼 들었다. 태극산수로 당해 내지 못할 상대는 아니었다. 내공 수위가 딸린다 하더라도 충분히 대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태극산수는 본래 공격적이 아니라 수비적인 것이었다. 그를 꺾으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후---욱!)

청마수 호광은 갑작스럽게 변한 주위의 공기에 숨이 막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가슴을 헤집어 오는 예기가 그의 호흡을 흐트러 놓고 있었다. 그가 검을 빼어들자 상대의 모습에서 알지못할 중압감이 느껴졌다. 그의 뇌리로 풍운삼절이 떠올랐다. 풍운삼절의 위명이 저 자로 인하여 무너졌다고 들었다. 목숨을 내놓은 생사의 대결에서 그들이 패했다는 사실이 이제 피부에 와 닿고 있었다.

자신이 한수로 결정지으려 하자 저 놈 역시 한수로 끝장내려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신중하게 전신의 공력을 모두 끌어 올렸다. 이미 이 한수로 결정짓겠다고 결심한 이상 더 이상 망설여서는 안되었다. 푸른 기운이 점차 짙어지며 그의 전신을 휘감아 돌았다. 그 모습을 본 담천의는 마음을 가라 앉히며 담담한 시선으로 청마수를 바라 보았다.

(제 십팔검로(十八劍路)… 예상치 못한 중극(中克)과 천중(天中)의 검로를 따르되 개현(開顯)으로 끝을 본다.)

담천의는 마음을 굳혔다. 그의 검이 비스듬히 치켜 올려졌으나 검끝은 호광의 발끝을 향하고 있었다. 마치 검끝에서 이슬이라도 또르르 맺혀 흐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것을 신중하게 살려 보던 청마수 호광은 기이한 느낌에 사로 잡혔다.

(역검(逆劍)을 익힌 것일까? 아니면 쾌검임을 과신하고 있는 것인가?)

검로(劍路)에 있어서 손등의 방향으로 올려치는 검은 위력이 훨씬 떨어지고 변화의 여지도 적다. 대체로 일반적인 방향과 다른 것을 역검(逆劍)이라 하지만 역검 역시 검을 손 안쪽으로 잡아 밖으로 올려치며 베어가는 것이 대부분. 저렇듯 상리에 벗어난 자세는 손을 뒤집어 쳐올릴 수 있을 정도로 쾌검이거나 역으로 베어 올릴 수 있을 정도로 팔목의 힘이 무쇠보다 단단해야 가능하다.

뜻밖의 상대에 의외의 발검(拔劍) 자세는 청마수 호광으로 하여금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위축되게 만들었다. 그의 전신에서는 푸른 기류가 더욱 맹렬하게 치솟아 올랐지만 그것은 그의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두려움에 대한 반발이었다.

상대가 흔들리고 있음을 본 담천의의 발이 미끄러졌다. 기이하게도 두 발을 지면에서 떼지 않았음에도 그의 신형은 이미 그 자세 그대로 끌리는 발 흔적을 지면에 남기며 호광 쪽으로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스스---스슷----

발이 지면에 끌리는 소리가 소름끼치게 들려왔다. 청마수 호광은 두려움을 떨치듯 선수를 치기로 결정했다. 그는 신형을 반장 가량 허공으로 떠올림과 동시에 쌍수를 양어깨 위로 치켜 올리며 곧바로 담천의의 전신을 찢어버릴 듯 내리 꽂혔다.

마치 학이 두 날개를 활짝 편 채 먹이를 노리고 내려 꽂히는 백학량시(白鶴亮翅)의 자세와 흡사했다. 그의 쌍수에서 푸른 기류가 우박처럼 쏟아져 내리며 빠르게 담천의의 양쪽 견정혈(肩井穴)과 정수리를 노리며 파고 들었다. 그와 연속해서 한 호흡의 차이를 두고 호광의 두 발은 허공에서 교차되며 얼굴과 가슴 복부를 연속적으로 파고 들었다.

촤르르르----슈우--슉--슉---

청마수 호광이 택한 필살의 공격은 발이었다. 쌍수로 담천의의 견정혈과 정수리를 노린 것은 일종의 허초(虛招)일 수도 있었다. 만약 담천의가 검을 쳐올리며 막는다면 금속보다 단단한 청마수로 내리 누름과 동시에 몸을 돌리며 발로 그의 아래턱을 가격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으로 그만일 터였다. 더구나 누구라도 수공(手功)을 익힌 자가 손이 아닌 발로 끝장을 보겠다는 생각을 예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청마수 호광의 일방적인 생각이었을 뿐이었다. 담천의는 검을 쳐올리지 않았다. 그의 상체는 기이하게도 활처럼 우측으로 휘면서 검을 비스듬히 들어 올리며 찔러갔을 뿐이었다. 그것으로 호광은 마치 담천의가 뻗은 검에 스스로 자신의 단전을 갖다대는 상황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가 하고자 했던 그 어떠한 공격도 실행할 수 없었다. 그는 다급하게 몸을 틀었다.

“헛…!”

다시 신형을 허공에 띄우는 순간 담천의의 검은 검화를 피워내며 마치 갈 지(之)자를 허공에 그리듯 그의 가슴과 복부를 베고 있었다. 선혈이 허공에 아름다운 무지개(虹霓)를 그리고 있었다. 뒤늦게 그의 쌍수로 담천의의 검을 튕겨내면서 신형을 뒤로 빼냈지만 담천의의 검에서 눈이 부셔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빛과 함께 검우(劍雨)가 쏟아져 내리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담천의의 검은 그가 본래 생각했던 대로 완벽하게 중극의 찌름에서 허공을 베는 천중으로 그리고 개현에 이르러 청마수의 전신을 난도질 할 듯 쏟아져 내린 것이다.

츠르르르----츠 파---

그때였다. 수십 가닥의 금색 강기(罡氣)가 쏟아지는 담천의의 검로를 끊고, 그의 아홉군데 대혈을 노리며 쏘아져 들어왔다. 동시에 엄청난 압력을 동반한 장력이 파도처럼 밀려 들었다. 담천의는 어쩔 수 없이 청마수 호광을 베겠다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 그를 벨 수는 있지만 자신도 심각한 타격을 입을 터였다. 그는 재빨리 신형을 뒤집어 허공에서 한 바퀴 돈 후에 재차 그 탄력을 이용해 더욱 높이 허공에 치솟아 오르며 검화를 흩뿌렸다.

“타---핫---!”

맑고 경쾌한 음성이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옴과 동시에 그의 대혈을 노리고 파고 든 금색 강기가 마치 끈이 짤려지듯 허공에서 수십 조각이 나며 연기처럼 허공에 사라져 갔다. 하지만 금색강기를 베면서 느껴지는 묵중한 진동은 팔이 저릴 정도였다.

“……!”

담천의는 자신을 공격한 자가 누구인지 아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이미 자신은 무리하고 있었다.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내상을 입은 것은 분명 사실이었다. 가슴과 옆구리 쪽에서 은은히 통증이 느껴지는 것도 그렇지만 진기의 운용이 원활하지 않았다. 헌데 신형을 바로 잡기 전에 이미 금빛가사를 걸치고 얼굴이 발그레해 화기(和氣)가 충만한 금존불(金尊佛)이 보인 것이다.

“이제는 불가(佛家)에서 암습도 하오?”

뇌음사(雷音寺)의 생불(生佛)로 알려진 삼존불(三尊佛) 중 금존불(金尊佛)에게 담천의는 냉랭하게 말을 내밷었다. 그러나 금존불은 뜻밖에도 자애스런 미소를 띠웠다.

“아미타불… 쓸데없는 살상을 막자는 것일 뿐 본불(本佛)로서는 다른 뜻이 없소. 담시주는 잠시 격앙된 마음을 가라 앉히시오.”

금존불에게는 적의를 발견할 수 없었다. 담천의는 내심 안도를 하면서도 금존불의 내심을 짐작하려 애썼다. 그로서는 한 번의 격돌에서 느꼈지만 현재 상태로는 금존불을 상대하기에 벅찼다. 이미 호광과의 격돌에서 그 역시 상당한 진기를 소모해야 했다. 더구나 부상을 입었다 하나 호광과 금존불이 합공을 한다면 그는 여기서 뼈를 묻어야 할 판이었다.

“호시주… 당신은 섭시주의 당부를 잊었단 말이오?”

호광의 가슴과 복부에서는 선혈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이미 그의 청색 장포는 갈지(之) 자로 찢어져 맨가슴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는데 상처는 의외로 깊어 보였다. 이미 죽었다가 살아난 호광은 금존불의 질책어린 말에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하게 되었소. 본인은 단지 저 젊은 놈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주려 했을 뿐이오. 정말 다른 뜻은 없었소.”

그의 의도와는 달리 그는 망신만 당했다. 섭장천이 담천의를 당분간 건들지 말라고 했던 말은 그들이 속한 조직에서 내려진 명령이었을 뿐이라 생각했다. 또한 그것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것이었지만 그의 말에 다른 뜻이 있었다는 사실을 지금에야 깨달았다. 저 어린 놈을 없애려면 그만한 희생을 치러야 하는 것이다.

“아미타불… 마침 소궁주도 찾았으니 돌아갑시다.”

금존불의 재촉에 청마수 호광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모든 사건의 발단은 바로 저 철없는 아가씨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들과 합류한 일행들은 철혈보와의 혈투 끝에 심한 부상과 피로에 지친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서 저 철부지를 기다리느라 그들을 뒤쫒고 있던 종남의 인물들에게 추적을 허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빠르게 장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행 중 낭씨쌍살이야 상관없지만 죽은 종오(終五)와 점육(點六)의 시신은 없애야 했다. 금존불 역시 그 뜻을 알았는지 이미 혼절해 있는 흑마조(黑魔爪) 형가위(邢苛尉)를 안아 들었다.

“이 상처는 언제까지나 기억해 두겠네.”

청마수 호광은 순순히 물러났다. 가슴을 졸이며 청마수 호광과 담천의의 대결을 지켜 보았던 진진이 놀란 표정을 하고는 복잡한 시선을 담천의에게 던졌다. 하지만 끝내 말은 없었다. 이미 자신의 일행과 담천의는 적이었다.

“소궁주! 지체하지 말고 따라오시오. 섭시주가 무척 걱정하셨소.”

금존불은 여전히 자애로운 미소를 보이며 담천의를 바라보더니 장내를 떠나갔다. 담천의는 가볍게 포권을 취해 주고는 몸을 돌려 유은비에게 다가갔다.

유은비의 숨은 멈춰 있었다. 종남의 교두라 칭송되던 그가 죽었고, 종남의 내일을 이끌어 갈 것이라 믿었던 종남칠수 역시 화려한 꽃을 피우기도 전에 사라졌다. 상대한 자들 역시 죽거나 중상을 당했지만 그것이 죽은 자에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찬란한 위명이나 명예는 살아 있음으로해서 그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미 피냄새를 맡은 짐승들이 주위에서 배회하고 날짐승들이 하늘을 선회하고 있었다. 무림에 몸담고 있는 자의 삶이란 이런 것이다. 화려한 명성과 만인의 존경 뒤에는 언제나 이런 허무함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무림인의 숙명이었다.

(33장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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