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순전히 제목에 현혹되어 읽기 시작했다. 마침 돈에 대한 내 강박관념과 공포심에 대해서 한참 생각해보고 있을 때라 이 책은 쉽게 나를 끌어당겼다. 예술가와 돈. 얼핏 생각하기에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해 있을 것 같은 이 두 화두가 어우러져 있는 것을 보자 나는 문득 궁금해졌던 것이다.
우리가 흠모해 마지 않는 위대한 작품을 탄생시킨 사람들, 그들은 돈에서 자유로웠을까? 흔히 생각하듯 돈에 관해 아무런 관심이 없었을까?
예술가들은 결코 돈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자유롭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많은 예술가들이 순전히 돈을 모으기 위해 작품을 창작하기도 했다. 이는 생활고와 작품 창작을 위한 재료비 등을 충당하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부'를 쌓아올리기 위한 순수한 욕망이기도 했다.
우리에게 이제는 고전이 되어버린 수많은 예술품 중 적지 않은 수의 작품들이 순전히 예술가의 '생활고 해결'이라는 동기에 의해 탄생되었다. 돈은 예술가들의 창작 동기이자 목표였으며 때로는 예술적 영감과 추진력의 동인이 되기도 했다.
미켈란젤로는 평생 동안 돈을 보내달라고 아우성치는 골치 아픈 가족들에게 시달려야 했으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유명한 기마상은 제작 요금을 받기까지 23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빛의 화가 루벤스는 웬만한 사업가 뺨칠 정도로 기민한 사업수단을 발휘해서 자신의 작품을 마케팅했으며 피카소는 누구보다도 이재에 밝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야기는 피카소를 열렬히 추종하는 한 젊은 미국인이 어찌어찌하여 이 존귀한 인물의 집에 발을 들여놓는 것에서 시작된다. 피카소는 평소처럼, 저택 주변을 순시하는 경호원의 손길을 용케도 벗어난 이 젊은이를 매우 사근사근한 태도로 대했다. 그 친절함에 감읍한 젊은이가 자신도 모르게 불쑥 내뱉었다. "어떻게 하면 피카소처럼 될 수 있지요?"
피카소는 그에게 1달러짜리 지폐를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젊은이가 1달러를 건네자 피카소는 지폐를 이젤 위에 걸린 캔버스에다 핀으로 고정시킨 뒤 예의 굵은 붓놀림으로 두어 번 그 위에 칠을 함으로써 몇 분 안에 전혀 새로운 디자인으로 재탄생시켰다. 거기다 사인까지 한 뒤 완성된 그림(?)을 추종자에게 주면서 말했다. "이제 자네의 1달러짜리 돈은 500달러의 값어치를 지니게 됐네. 이것이 바로 피카소처럼 된다는 의미일세."
나는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기대치 않게도 내 '돈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조금 벗어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내 '돈에 대한 욕망'이나 '가난에 대한 공포감'에 대해 스스로 면죄부를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돈에 대한, 재화에 대한 욕망은 인간 모두에게 본능적으로 잠재된 것이어서 위대한 예술작품을 만들어낸 이들조차-그런 세속적인 것과는 털끝만큼도 관련이 없을 것만 같은-평생 돈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내 세속적 욕망을 자연스럽게 품어 안을 수 있게 되었다. 더불어 천상에 올려놓았던 '예술'이라는 개념도 지상으로 끌어내렸다.
예술, 아름다움을 향한 갈망.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절대적 아름다움, 절대적 예술이란 존재하는가? 아니, 예술도 결국 인간의 흔적이다. 인간의 파생물인 것이다. 우리가 예술작품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티끌 한 점 섞이지 않은 선하고 맑은 영혼의 세계를 표출해냈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의 슬픔, 욕망, 고통, 환희, 그 유한의 세계를 다 뭉뚱그려 자신만의 언어로 표출해 낸 예술가의 영혼과 한순간 맞닿아 같은 유한자로서 연민의 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감동은 같은 인간으로서, 부여받은 인생을 어떻게든 살아내야만 했던,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로서 자신에게 허락된 짧은 순간을 어떻게든 포착해내려 애썼던, 한 처절한 영혼의 몸짓을 볼 때에야 밀려오는 것이다.
책을 읽어가다 보면 예술과 도덕의 상관관계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거금의 작품비를 타내기 위해 르누아르는 인상주의 화가로서의 소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샤르팡티에 부인과 아이들'을 그렸고 공교롭게도 이 작품은 지금은 불후의 명작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당시 돈을 위해 소신을 팔아치웠다는 비난은 이제 자취를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아름다운 예술작품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다. 수많은 유태인들을 학살했던 히틀러는 또 어떤가. 그는 회화에 대한 안목이 굉장히 뛰어났으며 스스로 회화 실력도 뛰어나서 그를 알았던 몇몇 예술가들은 그가 정치가가 되지 않았다면 이름난 화가가 되었을 거라 말하기도 했다.
그가 점령지에서 약탈했던 명화들, 그로 인해 명화로 확고히 이름을 굳히게 된 예술작품들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그도 나름대로 예술분야에 공헌을 했으므로 살인행위와는 별개로 예술적 가치를 인정해주어야 하는 것일까? 예술은 현실과 이상, 고통과 희망, 욕망과 절망의 복합체이며 단순히 고결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대목이다.
이 책은 예술가들을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지상에 복귀시켜줄 뿐만 아니라 미술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도 많이 들려준다.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같은 천재화가들의 돈에 얽힌 사생활, 베르니니와 보로미니같은 두 화가 사이의 질투와 견제, 부자 아버지를 두었던 세잔느와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던 모네, 나폴레옹의 부인이었던 조세핀이 예술사에 끼쳤던 영향 등 화가들의 사생활에서부터 역사적인 인물의 소소한 일상까지 맛깔스럽게 보여주는 것이다.
중간중간에 에피소드와 함께 삽입되어 있는 명화들은 작품에 대한 친밀감과 애정도를 높여주어 이 책의 백미를 이룬다. 예술, 특히 미술에 관심있는 이들에게 한번쯤 읽어보라고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심각한 이론이 아닌 잔잔하고 일상적인 시선으로 회화와 조각 작품에 한 발짝 다가서게 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