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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단에 팥고물을 입히면 수수 무삶이 떡이 완성된다.
경단에 팥고물을 입히면 수수 무삶이 떡이 완성된다. ⓒ 최성수
늦둥이 진형이 녀석 생일을 앞두고, 아내가 갑자기 팥을 꺼내 삶고, 수수를 빻아 오느라 부산하다.

“뭘 하려고 그래요?”

내가 궁금해 하며 묻자 아내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연다.

“수수 무삶이나 해주려고요. 당신도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일 때마다 무삶이를 해주셨다면서요?”

그러면서 아내는 수수 반죽을 만들더니 내 앞에 갖다 놓는다.

수수를 하루 정도 물에 불린다. 국산 수수를 구해야 제 맛이 난다.
수수를 하루 정도 물에 불린다. 국산 수수를 구해야 제 맛이 난다. ⓒ 최성수

수수 반죽을 손바닥에 놓고 동그랗게 빚으며 나는 문득 눈시울이 촉촉해 지고 만다.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나서다.

내 생일날은 할아버지 제사 전날이라 생일상을 제대로 받아 보기 힘든 처지다. 다음 날이 제사인데 굳이 음식을 차려 생일잔치를 하기에는 번거롭기 때문이다.

아내는 내 생일이면 아침에 미역국 한 그릇을 내놓으면서 안됐다는 듯이 한마디 하곤 한다.

“생일날도 참 잘 받아서 미역국 한 그릇 뿐이네요.”

나이를 먹어가며 생일이란 그저 제 태어난 날일 뿐,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은 날로 무덤덤하게 지나가기 마련이니 나라고 굳이 아쉬울 것도 없다.

팥은 삶아 고물을 만든다. 역시 우리나라 팥을 구하는 게 좋다.
팥은 삶아 고물을 만든다. 역시 우리나라 팥을 구하는 게 좋다. ⓒ 최성수

늦둥이 생일에 만든 수수 무삶이

그런데 늦둥이 아들 녀석 생일이면 아내는 미역국에 생일 케이크라도 하나씩 준비하는 것 보니 늦게 본 자식일수록 귀하게 느껴지나 보다.

늦둥이의 올 생일에는 새삼 수수 무삶이까지 준비하며 아내는 신바람을 낸다.

삶은 팥은 찧어 부드럽게 만든다.
삶은 팥은 찧어 부드럽게 만든다. ⓒ 최성수

“수수 무삶이를 생일에 먹으면 귀신이 범접하지 못한데요.”

아내는 쟁반 가득 수수경단을 담아내며 늦둥이 아들 녀석의 무병장수를 비는 듯 그런 말을 한다.

물에다 삶아 낸 경단을 가져다 팥고물을 입혀 내면서 나는 또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린다.

어머니는 내가 열 살이 될 때까지 수수 무삶이 떡을 생일 때마다 해 주셨다. 다음 날이 시아버지 제사라 바쁜 속에서도 어머니의 무삶이는 한 해도 거르는 적이 없었다.

“열 살까지 수수 무삶이 떡을 먹으면 평생 앓지 않고 잘 산단다.”

어머니가 내미는 수수 무삶이 떡을 억지로 받아먹는 내게 어머니는 웃으시며 그렇게 말하곤 하셨다. 어린 나는 약간 씁쓰레하고 붉은 그 떡이 영 마음에 차지 않아 자꾸 꽁무니를 뒤로 빼곤 했는데, 나를 달래며 어머니는 잊지 않고 그런 말씀을 하셨다.

수수를 물에서 건져 빻아 가루를 만든다.
수수를 물에서 건져 빻아 가루를 만든다. ⓒ 최성수

늦둥이 생일로 수수 무삶이 떡을 해 주면서, 나는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얼마나 소중한 자식이었나를 새삼 깨닫는다.

시집 오셔서 딸만 내리 낳고 마음 졸이셨을 어머니, 마흔을 앞 둔 나이에 나를 낳고는 비로소 가슴을 쓸어 내리셨다고 한다. 요즘이야 딸이 더 좋다고 하지만, 어머니 시대에는 어쩔 수 없었을 아들 타령에 가슴에 까맣게 멍이 드셨을 것이다.

겨울이면 시리디 시린 개울물을 업어 건네주시며 학교에 잘 다녀오라고 하시던 어머니, 내가 신작로를 아득하게 사라질 때까지 가물가물 개울가에서 지켜보시던 어머니는 어쩌면 내 생의 전부를 늘 그 자리에서 감싸 안아주신 존재인지도 모른다.

늦게 둔 아들 녀석 앞날이 늘 평안하라고 열 살이 되도록 바쁜 틈에서 수수 무삶이를 잊지 않고 해 주신 어머니의 마음을 이제야 조금 짐작하게 된 나는 어쩔 수 없는 불효자다.

수수를 익반죽해 경단을 만든다.
수수를 익반죽해 경단을 만든다. ⓒ 최성수

아내가 삶아 내 온 수수경단에 팥고물을 무치는데 늦둥이 진형이 녀석에 옆에 바투 달라붙어 묻는다.

“아빠, 생일에는 왜 수수 무삶이를 먹어야 해?”
“응, 수수 무삶이를 먹으면 건강하기 때문이지.”
“아빠 생일에도 수수 무삶이를 먹었어요?”
“그럼,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열 살 때까지 수수 무삶이 떡을 해주셨단다.”

내 말에 녀석이 빙긋 웃으며 제 엄마에게 한 마디 한다.

“엄마, 그럼 내년에도 내 생일에 수수 무삶이 떡 해 줘야 돼요.”

녀석의 말에 아내도 웃으며 대답을 한다.

“그래, 얼마든지 해 줄 테니 맛없다고 안 먹으면 안 된다.”

아내는 약간 씁쓰레한 맛을 내는 수수무삶이 떡을 진형이 녀석이 먹지 않을까봐 미리 선수를 치는 것 같다.

떡이 다 완성되자 진형이 녀석이 얼른 한 개를 집어 입에 넣는다. 우리 부부는 그런 녀석을 바라보며 도로 내뱉지나 않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인데, 녀석은 뜨거운지 떡을 입 안에 굴려가며 우물우물 하더니 씹어 삼킨다.

“하나 더 먹어야지.”

그리고는 녀석은 얼른 또 하나를 집어 든다. 나도 그제야 떡을 하나 집어 든다. 팥고물이 툭툭 떨어지는 수수 무삶이는 아직도 김이 솔솔 피어오른다.

입에 넣자 약간 씁쓰레하면서도 구수한 맛이 그만이다. 입맛도 세월에 따라 변하는 법인지, 옛날 어머니가 수수 무삶이를 해 주실 때는 ‘뭐 이렇게 맛이 씁쓰레한 떡도 있을까?’ 했지만, 이제는 그 맛이 더 없이 구수하게 느껴진다.

물에 삶아 건져낸 수수 경단
물에 삶아 건져낸 수수 경단 ⓒ 최성수

생일에 붉은 색 음식 먹으면 무병장수

생일에 수수 무삶이를 해 주면 건강하게 오래 살고, 귀신이 해코지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수수는 붉은색의 곡식이다. 그 붉은색에 또 붉은 색인 팥고물을 묻혀 만든 떡이니 더 붉은 셈이다.

붉은 색은 음양을 따질 때 양(陽)의 색이다. 산 사람이 활동하는 공간은 양계(陽界)이고 죽은 귀신들이 활동하는 공간은 음계(陰界)에 속한다. 그러니 양계의 색인 붉은 색을 통해 음계의 존재가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의미에서 붉은 색 음식인 수수 무삶이를 해 먹으면 무병장수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리라.

동지에는 팥죽을 쑤어 먹고, 또 대문이나 집안 곳곳에 팥죽을 바르기도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다. 붉은 색이 벽사(辟邪) 즉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의식에서 나온 세시풍속인 셈이다.

생일에 수수 무삶이를 해 주는 풍습도 동지 팥죽처럼 붉은 색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무삶이는 물로 삶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전을 뒤져보면 무삶이는 떡이 아니라 논에 물을 대고 삶아 내는 일을 말한다. 건삶이는 마른 논을 삶는 것이고 무삶이는 젖은 논을 삶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생일 떡인 수수 무삶이는 수수를 반죽하여 물에 삶았다는 뜻이다. 떡에는 삶는 떡, 찌는 떡, 지지는 떡, 찌는 떡이 있는데, 수수 무삶이는 삶는 떡의 한 종류다.

무삶이 보면 떠오르는 어머니 모습

어머니는 무삶이를 할 때면 꼭 수수경단의 가운데를 손가락으로 눌러 작은 구덩이를 만들곤 하셨다. 그렇게 하면 수수경단이 더 잘 익기 때문인 듯하다. 시집와서 수수 무삶이를 만들어 본 적이 있는 아내는 어머니의 솜씨를 그대로 흉내 내어 가운데가 오목한 무삶이를 만들어 낸다. 그 떡 모양을 보니 어머니 생각이 더 간절하다.

수수 무삶이가 가지는 붉은색의 벽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게는 어머니의 추억 때문에 수수 무삶이가 더 소중하다.

어머니는 늦둥이 진형이가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돌아가셨다. 아픈 몸을 이끌고 병원까지 찾아오셔 손자 얼굴을 보고 환하게 웃으시던 어머니는 그 손자의 해맑은 얼굴을 오래 보시지도 못하고 그만 이승의 끈을 놓아 버리셨다.

그러나 세상에 없다고 어디 그 사람이 아주 지워지는 것일까? 어머니는 집안 구석구석, 아니 우리 가족 삶의 곳곳에서 아직도 여전히 살아 계시다. 어머니가 쓰시던 냄비에도, 나물을 말리던 소쿠리에도, 침침해진 눈을 가늘게 뜨고 바느질하시던 어머니 곁에 놓였던 반짇고리에도 어머님은 남아 우리 가족을 지켜주고 계신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보다도 어머니의 모습을 가장 생생하게 느끼게 해주는 존재는 늦둥이 진형이다. 녀석은 제 할머니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할머니 산소를 지날 때면 잊지 않고 “할머니,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한다. 장난감을 가지고 노느라 앉아있는 녀석의 뒷모습은 어머니와 흡사해 그런 녀석을 보면 때로 가슴 한 켠이 아릿해 지기도 한다.

제 엄마가 해 준 수수 무삶이 떡을, 그 쌉싸래한 맛을 어린 애 답지 않게 즐기는 것처럼, 맛나게 먹는 모습을 보고 나는 또 어머니 생각을 한다.

내게 수수 무삶이는 어머니의 떡이다. 그 어머니의 떡이 나를 거쳐 늦둥이 진형이 녀석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그래서 가족이란 눈물겹기조차 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도 하며, 나도 수수 무삶이를 베어 문다.

떡에서 문득 어머니의 내음이 나는 듯하다. 그 내음은 그리움이며, 오랜 세월을 지나온 추억이기도 하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영원히 잊지 못할 내 존재의 고향인 어머니에 대해 이제는 다가갈 수 없는 애틋한 몸짓이기도 하다.

수수 무삶이 떡 만드는 방법

▲ 수수 무삶이를 맛있게 먹는 늦둥이
1. 수수를 서너 번 씻는다.

2. 씻은 수수를 깨끗한 물에 담아 한 나절 동안 불린다.

3. 불린 수수를 소쿠리에 담아 물기를 20분 정도 뺀다.

4. 불린 수수쌀을 방앗간에 가져가 소금을 넣고 곱게 빻는다.

5. 팥을 깨끗하게 씻어 인 다음 냄비에 찬 물과 함께 넣고 삶는다.

6. 팥이 첫 번째 끓어오르기 시작하면 찬 물을 조금 붓고 주걱으로 휘저어 팥을 가라앉힌다(찬 물을 부으면 끓어오르던 것이 가라앉는다).

7. 이런 과정을 두 세 번 반복한 후, 팥이 푹 익을 때까지 기다린다.

8. 익은 팥을 손으로 만져 보아서 약간 뭉개지는 듯 하면 물을 따라 내고 소금을 조금 넣어 간을 한 후, 약한 불에서 팥이 물기가 없어지고 포슬포슬해 질 때까지 주걱으로 저어준다(따라낸 팥물은 버리지 말고 밥을 할 때 쓰면 좋다).

9. 다 익힌 팥을 주걱이나 절구공이로 찧어 준다.

10. 빻아온 수수가루를 끓인 물로 익반죽한다. 이때 물을 너무 많이 넣으면 질척해진다(익반죽은 따뜻한 물로 하는 반죽을 말한다).

11. 반죽된 수수 가루를 새알심 경단으로 빚은 뒤 가운데를 엄지손가락으로 눌러 오목하게 한다(빨리 익고 모양도 내기 위해).

12. 끓는 물에 수수경단을 삶아낸다. 이때 수수경단이 익으면 물위로 동동 떠오른다. 그때 체로 건져내면 된다.

13. 건져낸 뜨거운 경단을 팥고물에 무친다.

14. 맛있게, 추억을 생각하면서 먹자! / 김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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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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