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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신형을 급히 뒤로 물리며 검을 뽑았다.
“잊지는 않은 모양이구나. 이것으로 일초가 지났다. 나머지 구초만 막을 수 있다면 너는 살 수 있을 것이다.”
파직---파지직-----!
기이했다. 강명이란 인물의 검은 마치 쇠와 쇠가 마주치는 듯 불꽃을 피어 올리고 있었다. 대개 검을 펼치면 기가 응집되어 일종의 독특한 문양(紋樣)이 허공에 그려지게 된다. 사람들은 그것을 검화(劍花)라고 부른다. 하지만 저렇듯 검극에서 피어 올리는 불꽃은 검화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검화보다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기이하고 아름답다고 느끼게 했다.
“제이초다!”
슈--우--욱----!
느릿하게 내려 오던 검이 갑자기 두개의 검으로 바뀌더니 네 개로 변화하고 다시 여덟 개로 분리되면서 불꽃을 쏘아내자 어두워지기 시작한 주위가 갑자기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해졌다.
일반적인 검이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상대와 느낌이 사뭇 달랐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생각하기도 전에 담천의는 전신을 헤집고 들어오는 검을 막아야 했다.
(칠로(七路)의 변화… 중극에서 유현(幽玄)으로…)
그는 세 번의 찌름과 아홉 번의 검로를 따라 검을 운용하면서 가까스로 그의 공격을 막아냈다. 너무 급작스런 공격이기도 했지만 손목에 느껴지는 묵중한 타격은 상대의 검이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빠름 속에 무거움을 가진 중검(重劍)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제법이다… 제삼초…!”
다시 불꽃이 일었다. 이제 그의 검은 보이지 않았다. 온 사방에 불꽃이 퍼져 나갔다. 마치 폭죽이 한꺼번에 터지듯 일시에 터져 오른 불꽃은 하나같이 비수가 되어 그를 향해 쏟아졌다. 어디선가 저런 모습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암천을 가르며 쏟아져 내리는 유성우(流星雨)가 바로 그것이었다.
담천의의 신형이 좌측으로 젖혀지면서 그의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쾌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떨어져 내리는 유성을 다 막을 수 있으랴! 그의 발이 빨라지며 본능적으로 칠성도해(七星圖解)를 밟았다.
파직--파직--!
보이지도 않는 검과 검이 마주치며 듣기 역겨운 괴음을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담천의는 검로를 따라 채 검을 그어보기도 전에 하나 둘 모두 막히고 있었다. 종래에는 검을 쳐내는 것조차 자유롭지 못함을 느끼며 답답해졌다. 더구나 전신을 압박하는 기세가 더욱 강해지며 움직이기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그 정도가 한계이더냐? 그런 정도로 이 무림에 발을 딛었단 말이냐? 제사초!”
빠름(快)과 변화(變化)라면 자신이 익힌 천중무극검을 따라 올 것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상대가 펼치는 검식은 그것을 넘고 있었다. 자신이 죽도록 익혔으나 아직 도달하지 못한 그의 한계를 벗어난 검이었다. 검로를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이미 사고는 마비되었고 본능이 시키는 대로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마음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여 올바른 검로를 따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무공이란 것이 머리로 익히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익혀야 한다는 것은 이런 경우에 알맞은 말이었다. 수련(修練)이란 것이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똑같은 동작을 수백번, 수천번 단련해야 실전에서 자연스럽게 한번 펼칠 수 있는 것이었다. 깨달음으로 검을 익힌다는 것은 이미 몸으로 익혀 그것이 자연스럽게 반응할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사고(思考)와 신체(身體)가 동시에 시차(時差)없이 반응할 수 있는 경지가 되었을 때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까스로 사초를 막았다 싶은 순간 주위는 갑자기 어둠 속으로 빠져들며 차가운 검날의 감촉이 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강명의 오초는 유성우가 지난간 뒤에 찾아오는 죽음과도 같이 깊은 암혼(暗睧)이었고, 그것은 굉렬한 빛이 지난 후에 시력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스며드는 그림자 같은 검을 의미했다. 몸속으로 파고드는 이물질의 느낌은 처음에는 차가운 듯하다가 오히려 화끈한 느낌을 주었다.
굉렬한 빛 속에서 스며드는 유성의 그림자.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의 검이 너무나 쉽게 자신의 방벽을 뚫고 들어왔다. 하나의 검이 수개, 수십개로 변화한다 해도 그것은 변(變)일 뿐이오, 환(幻)에 불과하다. 보이는 것은 아무리 변화가 극심하다 해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밝은 속에 은밀히 숨어 있다가 몸을 스쳐가는 저 암검(暗劍)은 도저히 느껴지지 않았다. 대상이 있어야 막을 것인데 그 막을 대상이 없는 것을 어찌하랴!
“오초(五招)조차 버티지 못하면서 이 험난한 강호에서 네 목숨을 지킬 것이라 생각했나? 제육초.”
다시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미 강명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느낄 수 없었다.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담천의는 허둥대고 있었다. 청마수 호광과의 접전에서 얻은 내상 때문이 아니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갑작스런 동생에 대한 소식과 자신의 신세에 대한 말 때문에 받은 충격과 흥분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수의 대결에서 조그만 차이는 극단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마음의 평온은 상대를 앞에 둔 자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이었다. 그는 그것을 갖추지 못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쫒기는 것 이였고 그것은 패배와 직결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쏟아지는 유성우를 피해 빛살처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천추위(天樞位)를 밟고 연이어 천선(天璇), 천기(天璣), 천권위(天權位)를 밟아 나갔다. 강명이 있는 곳은 북두(北斗)의 위치라 생각했다. 그를 향해 도는 칠성의 방위는 유일하게 그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방위였다. 옥형위(玉衡位)를 밟는 순간 또 다시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왼쪽 허벅지에서 불에 지져지는 느낌과 함께 축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 허벅지에는 깊은 검상이 그어져 있을 터였다. 이런 식이라면 상대의 말대로 반격조차 해 보지 못하고 십초 안에 패할 것이었다. 공격 한번 못하고 무너져 내리기는 싫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갑자기 칠성도해를 역(逆)으로 밟음과 동시에 발악하듯 검을 쳐냈다.
파파---파파--팍---파파팍---!
밝음을 제어하듯 그의 검 끝에서 암영(暗影)과도 같은 무수한 검화가 피어올랐고, 그것은 맹렬하게 쏟아지는 유성우를 향해 마주쳐갔다. 검과 검이 마주치고 있었지만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의 검은 무수한 변화를 내포하고 있었고 빛살 같은 빠름이 있었다. 검막(劍幕)이라 할 만큼 빽빽한 검기가 허공을 감싸 안았다.
“조금 낫군. 제칠초!”
비웃는 것일까? 다시 어둠이 찾아 든 가운데 담천의가 허공에 펼쳐 놓은 검 막을 찢으며 네 줄기 새하얀 검광이 뱀의 혀처럼 날름거리며 파고들었다.
슈--악---슈우우---
“우---욱----!”
담천의의 입에서 나직한 비명이 터지며 그의 신형이 이장 가량 뒤로 급하게 튕겨졌다. 그에 따라 선명한 핏줄기가 허공에 몇 줄기 붉은 선을 그었다. 잡고 있는 검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마터면 잡고 있던 검을 놓칠 뻔 했다. 가슴과 어깨, 팔목에 또 다른 검 흔이 새겨졌다. 흐르는 피가 그의 전신을 적시고 있었다.
강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강할 것이라곤 생각해 보지 않았다. 완벽한 무인이었다. 무(武)를 위해 태어난 화신 같았다. 자신의 무위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 본 바도 없었지만 자신을 이토록 초라하게 만들 수 있는 상대가 있으리라곤 상상해 보지 않았다. 태극산수를 깨우친 이후로 그의 깨달음은 한층 깊어졌고 넓어졌다. 하지만 결국 그 깨달음은 궁극의 깨달음이 아니라 그저 과정의 깨달음이었을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기로에 섰음을 느꼈다. 자신의 손아귀에 잡힌 검 자루가 무겁게 느껴졌지만 그는 혀끝을 깨어 물었다. 찝찔한 피가 입안으로 스며들었고 그는 호흡을 차분하게 가라 앉혔다. 승부를 앞에 두고 준비하지 못한 것은 자신의 탓이었다. 만반의 준비를 했어도 어려운 승부가 되었을 상황에서 자신은 준비를 하지 못했다.
“당신이 펼친 이 검학(劍學)은 무어라 부르오?”
그는 태산처럼 버티고 오연하게 서 있는 강명을 보았다. 마치 석상을 깎아 놓은 듯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렇게 서 있었다.
“성하구구검(星河九九劍).”
담천의는 자신을 초라하게 만든 그 검식의 이름이 너무나도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그 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이름은 없을 것 같았다. 강물처럼 흐르는 군성(群星)을 어찌 막을 수 있으랴! 때로는 폭포처럼 떨어지는 유성을 어찌 막을 수 있으랴! 갑자기 뿜어지는 활화산의 맹렬한 불꽃을 어찌 피할 수 있으랴! 그리고 그 속에 유성의 그림자가 흐르고 있음을 어찌 간파할 수 있으랴!
과거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으로 불리웠던 성하검(星河劍) 섭장천(葉張天)의 독문절기가 바로 이것이었다. 하한(河漢:은하수)의 무수한 별들이 유성우가 되어 우박처럼 쏟아진다고 한 그 검법. 그러나 지금 강명이 펼치는 성하구구검을 본다면 섭장천은 고개를 저을 것이었다. 그것은 성하구구검이 아니었다. 성하구구검에서 시작된 것이되 이미 성하구구검을 넘은 것이었다.
“무서운 검이었소. 하지만 이제는 다를 것이오.”
그 말에 강명의 입가에 하얀 선이 그어졌다. 그것은 웃음이었다. 비웃는 것인지 아니면 진정으로 웃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고개를 끄떡였다.
“성하구구검은 천하제일이라 할 만하지. 하지만 그 정도도 네가 버티지 못했다면 나는 더욱 실망했을 것이다.”
“당신에게 결코 실망을 안겨 주지 않겠소.”
“이제 삼초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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