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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기 화백 제공
김인기 화백 제공
오월문학상 관계자 및 전남대 학생들이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시상식 장소는 전남대학본부 건물 안에 있는 용봉홀이었다. 나는 수상 소감도 시의 형식을 빌었다.

수상자, 심사위원, 그리고 축하객들이 모여 조촐한 뒤풀이가 이어졌다. 문병란 교수를 비롯하여 소위 민주인사라는 분들을 직접 뵙게 되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졌다.

뒤풀이 이후 초희와 나는 전남대 캠퍼스와 용봉로, 금남로, 그리고 전남 도청 앞 등 광주 시내를 두루 둘러보았다. 아! 여기가 80년 당시 광주항쟁의 불꽃이 타올랐던 바로 그곳이란 말이지. 정말 성지(聖地)를 방문한 사람처럼 우리는 숙연해져 있었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디 갔지
망월동에 부릎뜬 눈 수천의 핏발 서려 있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산 자들아 동지들아 모여서 함께 나가자
욕된 역사 투쟁없이 어떻게 헤쳐 나가리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대머리야 쪽바리야 양키놈 솟은 콧대야
물러가라 우리역사 우리가 보듬고 나간다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가슴에 붉은 피 솟네 붉은 피피피!

잘 탄다 진아, 너는 불 가운데 눕고 너를 태운 불길로 진달래 핀다
죽어서 살아 있는, 불 타는 산천으로 흙가슴으로 사랑으로, 함성으로

잘 탄다 진아, 너는 검은 재로 남아 너를 묻은 가슴에 한 줄기 햇살이 잊었던 넋이 되어, 부르던 이름 되어 하늘이 되어 사랑으로, 함성으로

잘 탄다 진아, 너는 어둠 속에 되살아 너를 묻은 이 산하 타오르던 봄날에 죽어도 죽지 않는, 뜨거운 바람 결에 붉은 피 터져 사랑으로, 함성으로


마치 그날의 함성이 다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우리는 오월의 정신을 가슴 가득 싣고 기차에 올랐다. 문득 광주의 밤하늘을 올려다 보니 별빛이 눈물처럼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전남대를 다녀온 다음 날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보니, 내 자취방 앞에서 사복경찰로 보이는 몇몇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깐 조사할 것이 있으니 서까지 가잔다. 잠깐이면 될 것이라고 몇 번이나 이야기했다. 나는 거의 납치되다시피 서부경찰서로 끌려가 밤샘 조사를 받았다.

그들은 조명도 어두운 방에 나를 앉혀 놓고는 무조건 자백하라고 했다. 그래야 신상에 좋다나. 괜히 이리 저리 핑계 대고 부인하려 들면 여러 사람이 다치게 된다고 공갈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이 내놓은 조서에는 시위를 주도한 적이 한번도 없음에도 나를 시위주동자로 적고 있었다.

오월문학상을 받은 시(詩) <푸른 낙엽>도 문제를 삼았다. 지나치게 도전적이고 선동적이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전남대에 가서 누구를 만나 접선을 하고 왔느냐고 다그쳤다.

너무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그랬더니 안 되겠다며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호출하겠단다.

또 군에 가 있는 형에게 안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도 했다. 그들은 이미 나의 약점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할 수 없이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으니 제발 부모님께는 연락하지 말아 달라고 사정했다. 그랬더니 순순히 자백하란다. 도대체 무엇을 순순히 자백하란 말인가!

내가 아무런 이유 없이 등교하지 않자, 초희가 우리 집에 왔다가 안집 아주머니로부터 내 소식을 접하고는 노진에게 연락했고, 노진은 다시 한철에게 부탁하였고 한철은 그의 아버지에게 내 얘기를 했던 모양이다.

다행히 한철 아버지가 서까지 찾아와 손을 쓴 덕분에 나는 삼일 만에 지옥 같은 그곳을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하마터면 '기독사상연구회' 동아리 선배처럼 군에 강제 징집되었거나, 더 운수가 사나웠다면 아마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온갖 곤욕을 치를 수도 있었다.

"대체 어떤 놈이 짭새에게 찌른 거야? 나쁜 놈들, 정말 나쁜 놈들!"

노진이 내 대신 분개하고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나는 집회와 시위에 거의 가담하지 않았다. 경찰이 겁이 나서가 아니라 겉과 속이 다른 운동권 지도부의 행태에 식상했기 때문이었다.

여름방학이 되자, 초희는 다시 기숙사를 나와야 했다. 방학 동안은 숙소를 비워 주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이사를 한다기에 가 보았다. 금남(禁男)의 집인 여학생 기숙사에 들어가 보기는 그날이 처음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생각보다 짐은 많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그녀가 조금씩 천안으로 날랐기 때문이었다. 짐 보따리는 모두 4개였다. 우리는 두개씩 나누어 들고 내려와 기숙사에서 터미널까지는 택시 편으로, 그리고 터미널에서 천안까지는 시외버스 편으로 짐을 날랐다. 그녀와 함께 천안에 오기는 처음이었다.

그녀의 집에 들어서자 난향이 온 집에 가득했다. 거실 한편에 자리 잡은 온갖 난초들이 앞을 다투어 자태와 향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상록수림의 나무나 바위에 붙어서 자란다는 소엽풍란, 해발 900m 이하의 다소 건조한 숲에서 자란다는 한국춘란(보춘화), 고산의 침엽수림 밑의 이끼 낀 음지에서 자란다는 풍선난초, 바닷가 가까운 야산의 풀밭에서 자란다는 자란,

숲 그늘에서 자란다는 은난초, 비교적 햇빛이 잘 드는 곳에서 자란다는 금난초, 낙엽수림 밑에서 자란다는 큰새우난초, 해발 900m 이하의 나무나 바위에서 자란다는 석곡, 고원 및 산지의 다소 양지바른 풀밭이나 습지, 낙엽수림 밑에서 자란다는 복주머니꽃, 남해안 일부 도서지방에 자생하며 오래된 나무등지나 바위 등의 습한 곳에 붙어산다는 나도풍란(대엽풍란),

한라산 남쪽 저지대의 상록수림이나 단풍나무에 자란다는 탐라란, 해발 1200m 이상의 숲에서 자란다는 나도제비란, 한라산 1000~1800m의 햇빛이 잘 드는 습지에서 자란다는 큰방울새란, 양지바른 습한 풀밭에서 자란다는 해오라비난초, 산의 숲 그늘에서 자란다는 은대난초,

해발 600m 이하의 상록수림 밑에서 자란다는 녹화죽백란, 그 외에도 제주한란, 닭의 난초, 혹난초, 타래난초, 병아리난초, 새우란, 붉은사철란, 차걸이란, 금자란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진귀한 난들이 나로 하여금 난꽃집에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고 있었다.

"무슨 난이 이렇게 많아요? 솔직히 놀랐어요."

"아빠가 워낙 난을 좋아해서요. 괜찮은 난이다 싶으면 무조건 사가지고 오시거든요."

나의 질문과 느낌에 그녀가 그렇게 대답했다.

떡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나는 그녀의 부모님께 정식으로 인사를 드렸다. 일곱살의 다솜이도 나를 예쁜 모습으로 맞아주었다. 다솜은 영악할 정도로 귀엽고 깜찍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겠다는 말이 실감이 날듯 했다.

융숭한 점심 식사 대접을 받은 후 우리는 거실에 나와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던 중에 그녀의 어머니가 내게 종교가 무엇이냐고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저는 기독교 신자로 지금은 유성 장로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면 장래 희망은 무어예요?"

"예, 저는 장차 신학대학원에 진학하여 목회자 또는 신학대 교수의 길을 걸을까 합니다."

"네, 그래요. 우리 집은 모두가 천주교 집안인데‥‥‥."

초희의 어머니는 자기 집안은 5대째 내려오는 전통 있는, 뼈대 있는 가톨릭 집안이라며 자랑이 대단했다. 신부를 3명, 수녀는 7명이나 배출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뼈있는 말을 놓치지 않았다.

"천주교로 개종하지 않으면 우리 초희와의 결혼은 어려울 텐데. 워낙 집안의 반대가 심해서‥‥‥."

"엄마, 오늘 처음 인사드리는 자리예요. 덕담은 못할망정 그게 무슨 말이에요?"

초희가 정색하며 달려들듯 말하자, 그녀의 어머니도 슬그머니 말꼬리를 내렸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얘는 사람 말도 못하게 해."

결과적으로 양가 집안에서 우리 결혼을 반대하고 있는 셈이었다. 초희 어머니는 겉으로는 종교를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진짜 속내는 따로 있어 보였다. 다시 말해 어렵게 이룩한 가업을 이어나갈 의사 사윗감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초희의 집을 나오면서 솔직히 기분이 퍽 씁쓰름했다. 나의 기분을 눈치 챘는지 초희가 독립기념관으로 바람이나 쐬려가자고 했다. 우리는 독립기념관에 전시된 당시의 유물과 사진, 그림, 자료 등을 관람했다.

특별히 인형으로 만들어 놓은 독립투사들의 고초, 고문당하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못해 참혹한 느낌마저 들었다. 우리는 독립기념관을 나오면서 두 손을 마주잡고 약속했다. 일제하의 독립지사들처럼 어떠한 시련과 역경, 그리고 장애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필코 우리의 사랑을 꽃피우겠노라고.

덧붙이는 글 | * 독자 여러분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43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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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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