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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김인기 화백 제공
그림 : 김인기 화백 제공

'내가 대신 하면 안 되는 일이야? 내가 대신 하면 안 되는 일이야? 내가 대신 하면 안 되는 일이야?' 방금 전 그녀석이 한 말이 자꾸 귓전을 맴돌고 있었다.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너 아니라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는 없어!' 나는 녀석의 그 소리를 떨어내려고 마음속으로 그렇게 외치며 추운 줄도 모르고 눈보라가 휘날리는 거리로 달려 나갔다.

순풍에 돛단 듯이 잘 나아가던 우리 3인방의 관계가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균열이 일기 시작하더니 몇 년 사이에 아주 복잡하게 꼬이고 뒤틀려 있었다.

대학 2학년 여름 방학에 우리 세 커플은 1학년 때와 마찬가지로 대천해수욕장과 그 부근 일대로 2박 3일간 놀러 간 적이 있었다. 바다는 언제 찾아가도 좋았다. 그러나 여름바다가 분명 가장 시원했다.

가장 뜨거울 것 같은 여름바다가 가장 시원한 것은 왜 일까? 그 수수께끼를 풀려고 애썼지만 끝내 풀지를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러면서 내년에 다시 와서 반드시 그 정답을 얻어 가리라 그렇게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곳을 다녀온 후 얼마 안 돼 진경이 임신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진경은 분명 한철의 아이라고 했다. 그러나 녀석은 그럴 리가 없다고 했다. 자기가 진경과 잠자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분명히 콘돔을 사용했고, 여의치 않을 때는 질외사정을 했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임신이라니 말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어디서 다른 놈팽이와 신나게 놀고 와서는 자기에게 뒤집어씌운다는 것이었다. 노진이 나서 설명해 주었다.

"이 메뚜기 바보 녀석아, 콘돔을 사용해도 100% 피임이 된다는 보장은 없는 거야. 더군다나 질외 사정은 임신될 확률이 얼마나 높은데 그래."

그러나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한철은 막무가내였다. 자기가 지금껏 숱한 여자를 경험했지만 콘돔을 사용했을 때와 질외 사정을 했을 때 아직까지 임신된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녀석은 의학적 상식은 무시한 채 자기의 경험만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임마, 그것은 네가 그동안 운이 좋았던 거야."

노진이 그렇게 설명을 해도 진경에 대한 녀석의 의심은 풀릴 줄을 몰랐다. 그러자 진경이 말을 내뱉은 자기가 잘못이라며 차라리 죽겠다고 했다. 죽음으로써 자기의 결백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그제야 겁을 집어먹고 한풀 꺾인 녀석은 이번에는 진경에게 돈을 주면서 빨리 병원에 가서 아이를 지우라고 재촉했다. 진경은 못 지우겠다고 맞섰고 한철은 빨리 지우라고 성화였다.

기왕 생긴 생명인데 함부로 지울 수는 없다며 낳겠다는 것이 진경의 생각이었고, 한때의 불장난으로 인해 생긴 아이는 결코 축복 받을 수 없다며 속히 지우라는 것이 한철의 주장이었다. 여러 번의 싸움 끝에 진경은 결국 낙태 수술을 받았다.

진경은 낙태 수술과 동시에 한철과의 인연도 끝났다며 절교를 선언했다. 그리고는 그동안 자기를 친절하게 보살펴준 노진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

노진은 비교적 따뜻하고 자상하게 진경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러나 그녀가 마음에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저 불쌍하고 가여운 마음에서였다.

전부터 진경의 마음이 노진에게 가있었다고 속단한 한철이 녀석이 한번인가는 술을 잔뜩 먹고 와서 진경이 보는 앞에서 노진과 대판 싸웠다. 그러면서 그런 얘기도 했다.

"너 이 자식, 지난번에 지운 애기 혹시 네 씨 아냐?"

아무리 취중이라도 못할 말을 한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노진이 한철을 작신 두들겨 팼다. 내가 끼어들어 말렸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일을 치를 뻔하였다. 이후로 노진은 진경과도 멀어졌고 한철과는 더더욱 소원해졌다.

영희는 속으로 나를 좋아하는 눈치였다.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자기는 나중에 목사사모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내가 또 어떤 남자가 이상형이냐고 물었더니 서슴없이 나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것도 초희가 있는 앞에서. 괜스레 내 가슴이 뜨끔했다. 그래서 얼른 내가 말을 돌렸다.

"내가 나중에 신대원 가면 나보다 훨씬 훌륭한 목사 후보감을 찾아 반드시 소개 시켜줄게."

그러나 그녀는 내가 자기의 둘도 없는 단짝 친구의 남자친구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마음으로는 속병을 앓았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한철과 진경과 노진, 그리고 영희의 일에 관해서는 손금 보듯 훤하게 읽고 있었던 내가 정작 등잔불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정말 중요한 사실, 즉 노진이 초희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만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격도 아니고, 하여튼 기분이 묘하고 참담했다.

비교적 눈치가 빠르기로 소문난 내가 여태 그걸 모르고 있었다니. 나의 감각이 무디어진 것일까? 아니면 녀석의 보호색이 너무나 감쪽같았기 때문일까? 생각할수록 머리 속이 혼란스럽고 아파 왔다. 아버지의 머리 아픈 고통을 십분 이해할 것만 같았다.


* 독자 여러분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46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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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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