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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남문대장 구굉이 성문을 열고 나가 오랑캐 수십명을 죽이고 돌아왔다고 하는구먼.”

병사들은 삼삼오오 모여 아침에 있었던 싸움을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장판수는 아예 그런 말은 듣기도 싫다며 병사들이 모여 있는 곳에는 가까이 가지도 않았다.

“그나저나 날씨가 궂은 것이 또 한바탕 눈이라도 쏟아질 모양일세.”

장판수는 병사들의 말을 뒤로 하며 혼자 조용히 보낼 곳을 찾아다녔다.

“이보시게.”

장판수는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신경질적으로 홱 하니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장판수를 부른 이는 일전에 곤룡포를 도로 가지고 간 적이 있는 내관이었다.

“또 무슨 일입네까?”
“일전의 일은 입을 잘 봉하고 있는가?”

내관이 말하는 일전의 일이라면 왕을 시해하려는 음모에 대한 일이었다. 장판수는 겨우 그런 일로 찾아 왔나 싶어 코웃음을 쳤다.

“그날 이후로 그 일에 대해 생각조차 한 바도 없거니와 잊은지 오랩네다. 다른 사람들이나 조용히 하고 있는지 잘 살펴보시라우요.”
“그래서 말인데.”

내관은 주위를 살펴 보더니 좀 더 은밀한 곳으로 가 얘기를 하자고 권했다. 장판수는 좋지 않은 기분이 들었지만 설마 무슨 일이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허튼 짓을 하면 모가지를 꺾어 놓갔어!‘

장판수는 속을 알 수 없는 상대에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한 채 따라 나섰고 내관은 으슥한 구석의 나무 등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실은 말이네. 그 일은 청나라 오랑캐의 소행인데 성상께서 출성하신다는 일을 첩자가 알려서 생긴 일일세. 더 기가 막힌 일은 그 장소에 그들의 첩자도 있었다는 것이네.”

내관은 품속을 뒤져 종이 하나를 꺼내어 주었다.

“그때 성상 페하를 모시고 출성한 이들 중에서 수상쩍은 이들을 적어 놓은 것이네. 이들을 찾아내어 척살하게.”

장판수가 종이를 보니 십여명의 이름과 그들이 남한산성에서 위치해 있는 곳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아니, 이런 일을 왜 나에게 시킨단 말입네까? 어명으로 불러 모으면 될 일이 아닙네까?”
“불측한 언동을 삼가게! 이것이 어명일세!”

장판수는 어명이라는 말에 허둥지둥 예를 갖추었다. 본래 이런 예법에는 익숙하지 않은 장판수였지만 오랜 세월을 지내면서 초관까지 오르며 보고 들은 바가 있었기에 어명을 어떻게 받드는 지에 대해서 무지한 이는 아니었다.

“초관 장판수는 어명을 받들어 불측한 이들을 척살하라!”
“삼가 어명을 받들겠사옵니다.”

내관은 장판수를 일으켜 세운 후 당부했다.

“뜻하지 않게 드러나는 일도 있겠지만 그럴 일은 다 무마될 터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말게나.”
“어명인데 어련하시겠습네까?”

내관은 다시 한번 주위를 살피더니 행궁으로 간다며 자리를 떠났고 장판수는 잠시 자리에 머물러 있다가 내관이 간 후에 고개를 들고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저 가이삿기 추임새 넣어줬더니 지랄하는구먼.”

장판수는 가벼운 걸음으로 내관이 가버린 방향을 뒤쫓아 따라가기 시작했다.

‘내래 산전수전 다 겪은 놈인데 그런 거짓부렁에 넘어갈 사람이 아니네! 무슨 짓을 꾸미는지 알아야 직성이 풀리갔어!’

내관은 장판수가 뒤를 밟는지도 모르는 채 걸음을 재촉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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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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