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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시작> 표지
<영원한 시작> 표지 ⓒ 안병기
제자들을 대표해서 서문을 쓴 문학평론가 정과리의 말을 빌리면 "제자들이 말 이전의 육체로 배운 것을, 그 고유한 성질에 따라 자유의 운동이나 상상의 운동으로 발동시켜 크게 키워서 가르친 분께 돌려드리는" 마음을 모아 함께 쓴 글을 엮은 책이다. 말하자면 제자들이 바라보는 정현종의 시 세계다.

논의에 참여한 제자들은 정현종 시를 이루는 뼈대를 '상상력'이라고 보고 1부 '질료'에서는 물, 공기, 물, 술, 나무, 거울 등 소재 별로 스승의 시를 분석했으며, 2부 '운동'에서는 용약, 시간, 소리, 웃음, 역설, 성애 등을 중심으로 읽어나갔다.

마지막 3부 '교감' 편에서는 <병허선생과 빈병당주유기>, <시.세계.마음>이라는 주제로 스승과 제자들이 격의없이 나눴던 두 차례의 정담을 싣고 있다. 나처럼 시에 문외한인 사람이 아무런 걸리적거림 없이 재미있게 읽기에는 아무래도 3부의 정담이 좋을 것이다.

병허선생과 빈병당

산행을 거듭하던 스승과 제자들은 자연스럽게 '당'을 결성한다. 그리고 산행 끝에 이어진 술자리에서 쌓여가는 빈병들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다가 마침내 '빈병당'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당연히 스승인 정현종 시인은 이 빈병黨(당)의 총재가 되고, 그는 스스로 병허(甁虛)라는 호를 짓는다. 병속에 담긴 공허라는 얘기인지, 아니면 빈병이란 뜻인지.

빈병당주유기(酒遊記)에 나오는 이야기 한 토막이다. 한 제자가 한국전쟁 무렵 냇가에서 군인들과 뼈 하나씩을 주워들고 달밤에 춤을 추웠다는 시인의 어릴 적 이야기를 꺼내고, 시인은 그 이야기를 두고 "꿈을 가져야 할 나이에, 장난감을 가지고 놀아야 할 나이에 뼈를 가지고 놀았다"라고 술회한다.

언젠가 읽었던 그의 <자전적 작가연보>에도 나오는 이 이야기는 정현종 시인의 삶이나 문학을 놓고보면 매우 암시적인데가 있는 장면이다.

'시.세계.마음'이라는 주제로 열린 외솔관에서의 정담도 읽을 만하다. '가벼움'을 주제로 한 시론으로 부터 시작해서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에게 심취하게 된 과정이나 니체를 좋아했던 이유, 가스통 바슐라르와 옥타비오 빠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다채롭다.

정현종 시인이 보기에 칠레의 시인 네루다는 '지상적인 것과 일상적인 것에 왕관을 씌운' 시인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그가 네루다를 읽으면 즐거워지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자신이 니체를 좋아했던 이유로는 기존의 가치나 진리들을 뒤집어 엎는다든가 관습에 대한 저항 등 니체의 자유로운 정신을 꼽는다.

그는 또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자기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시원치 않은 짓이라고 말하면서 아방가르드들이 대체로 설명을 하려든다고 꼬집기도 한다.

1부와 2부의 정현종론을 읽기 위해서 책의 첫머리로 돌아간다. 제자들이 보는 정현종 시인의 시 세계는 어떤 것일까.

술잔을 낚는 시인

장철환은 정현종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술의 의미에 대해 주목한다. 초기 시에서 삶의 고통을 잊게 해주거나 그 고뇌를 견딜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했던 술이 1990년대로 넘어오면서 시인이 차츰 일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자 '축제의 반주' 같은 것이 되었다고 진단한다. 술이 자연과의 화합을 부추기는 촉매와 같은 기능을 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김창환은 <춤에서 나무로_상승 이미지의 계보>라는 글에서 정현종 시인의 시에 나오는 나무는 그냥 나무가 아니라, 시인의 상상력 속에서 일상적인 범주를 넘어선 성스러운 것으로 나타난다고 본다. 성스러운 나무가 세상의 시공간을 뚫고 들어와 시인을 드높이고 드높여진 시인은 나무를 통해 구원의 가능성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정과리는 정현종의 시가 개인적 자기 충족으로 비치는 시선 속에는 어떤 윤리적 판단이 개입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정현종의 시가 충족을 노래하고 있다는 점이 마치 현실을 외면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라고 스승을 옹호한다.

외국인 제자 스티븐 캐프너는 정현종 시인을 가리켜 '술잔을 낚는 시인'이라고 명명한다. "숨 쉬는 법을 가르치는/술잔 앞에서/비우면 취하는/뜻에 따라서"(시 '술잔 앞에서')라는 그의 시 구절에도 나오듯이 정현종 시인은 술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시대와의 불화, 세상과의 불화를 자연스럽게 화해해 왔다고 보기 때문이다.

퇴임이 또 다른 시작이 되기를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 같은 사람은 정현종의 시사적 위치가 김춘수와 김수영을 극복한 자리에 위치한다고 평한다.

70~80년대 리얼리즘 시의 흐름에서 비껴 서 있는 정현종의 시들은 사회적 상상력이 결여돼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아울러 요설적인 표현이나 언어유희적 요소가 그의 시 곳곳에서 나타난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를 읽는 일은 즐겁다. '세상의 옆구리를 간질이는' 웃음과 '떨어져도 튀는 공' 같은 그의 탄력적인 감수성은 시를 읽는 사람에게 비할 데 없이 유쾌한 즐거움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40년이 넘도록 줄기차게 시를 써온 그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23년 동안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그가 건진 것은 무엇일까. 혹 그의 시 <무얼 건졌지?>를 읽으면 해답이 나올는지 모른다.

건지긴 뭘,
인생이 한 그릇 국인가.
나는 시금치와 배추와
아욱과 근대 같은 걸 잘 건지는 바이지만,
술 만든 사람들한테 축복 있으라
(나쁜 술 만드는 사람들한테는 물론 저주 있으라)
세상의 물결에 떠 저도
물결이라며 흘러가는 술병을
건지고,
허공 허공 피어나는
술잔들을, 술잔을 낚는 어부처럼
잘 건지는 바이지만,
또 酒色은 가끔 神通이라,
제물에 빠져 연꽃 파는 여자도 건지고
내 물에 빠져 물불 허덕이는 나도 건지는 바-
가만있자 브르통이란 사람은
끝없는 始作으로 시간을 건지려 하면서
초현실주의 삼십 년에 여자 셋 건지고
네루다는 여자 여럿, 시 여럿,
세상 모든 걸 건지고,
로르카는 同性 두엇, 피와 죽음
그리고 메아리를 건지고,
정현종은 제 눈 속의 仙女와
스친 여자
(놓친 기차는 모두 낙원으로 갔다)
삼천서른세 명의 빛과 그리고
그림자가 저 들꽃과 화장품과 먼지와 한몸으로
폭풍인 긋, 지평선인 듯
너울거리는 거길 헤매고 있는데,
실로 나무 몇 그루, 새 몇 마리
노래 몇 자락 건지긴 건졌는지-

도망가는 시늉으로 낮술 한잔 하고
끄적거려놓은 걸 다시 읽어보노니,
우리를 건지는 건 예술과 사랑이라,
꿈이여, 태어나기만 하는
만물의 길이여.

-정현종 시 '무얼 건졌지?' 전부


어쩌면 <영원한 시작>이라는 이 책의 제목은 다분히 중층적 의미로 다가온다. 영원한 시작(始作)으로도 읽히고 영원한 시작(詩作)으로도 읽히기 때문이다.

정현종의 시를 좋아하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번 그의 퇴임이 그가 또 다른 시세계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시작이 되었으면 싶고 죽는 날까지 그의 시작이 멈추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정현종(鄭玄宗) 시인 연보

정현종(鄭玄宗) 시인 연보

1939년 서울 출생
1965년 연세대학교 철학과 졸업, 신태양사 입사
1965년 {현대문학}에 <화음(和音)>, <여름과 겨울의 노래>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65년 '60년대 사화집' 동인
1966년 황동규, 김현 등과 함께 '사계' 동인 활동
1970년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
1972년 <사물의 꿈> 민음사에서 출간
1975년 중앙일보 월간부 입사
1982년 연세대학교 교수 부임
1992년 제4회 이산문학상 수상
1995년 제40회 현대문학상 수상
2005년 2월 24일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 정년퇴임


시집

사물(事物)의 꿈(1972),
고통의 축제(1974),
나는 별 아저씨(1978),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1984),
거지와 광인(1985),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1989),
꽃 한송이(1992),
세상의 나무들(1995) 등
갈증이며 샘물인(1999)
견딜 수 없네(2003)

시론집 : 숨과 꿈 (1982), 시의 이해 (1983), 관심과 시각 (1983) / 안병기

영원한 시작

정과리 외 지음, 민음사(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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