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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 인터뷰한 때가 겨울인데 철이 벌써 두 번이나 바뀌었습니다. '내가 만난 소설가' 두 번째 인터뷰 기사죠. 김형이 가장 최근에 낸 소설책 제목이 <봄으로 가는 취주>이므로 겨울에 기사를 올려야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좋은 봄을 다 보내놓고 후덥지근한 한여름이 되어서야 기사를 쓰게 되었습니다. 굳이 변명하자면 3월초에 닥친 뺑소니 교통사고로 무릎 관절을 꽤 다쳐서 그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었기 때문이었죠.

최창학 선생이 문예지에 추천한 단 한 사람의 작가

▲ 2005년 2월의 어느 날, 소설가 김기우씨
ⓒ 김선영
1998년 11월에 장편소설 <바다를 노래하고 싶을 때>를, 2003년 12월에 단편소설집 <봄으로 가는 취주>를 펴냈던 김형(43)을 내가 인터뷰 건으로 만난 것은 지난 2월이었습니다. 과작(寡作)을 하는 편이지만, 과작인 이유가 김형이 창작에 게으르기 때문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죠.

그동안 동국대 문예창작 석사논문 준비를 하느라 바빴고, 안산에 있는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김형이 졸업한 학과이기도 하죠)에서 소설론특강을, 강원도 춘천에 있는 한림대에서 부수전공 영상문예창작 교과목 가운데 소설창작을 강의하느라 바쁘고, 또한 한림대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뒤 박사학위 논문 준비를 하느라 바쁘게 살고 있는 탓이라는 것을.

김형이 데뷔한 것은 15년 전인 1990년, 계간지 <문학과 비평>을 통해서였습니다. '<창>, <바다 위를 나는 목>, <긴 꿈 속의 불>, <아우슈비츠>의 작가 최창학 선생이 문예지에 추천한 단 한 사람의 작가'라고 김형을 아는 문인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죠.

무의식과 의식의 대화

그 뒤에도 김형은 제22회 오늘의 작가상 최종심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85편의 응모작 가운데 본심에 오른 소설은 모두 4편이었죠. <바다를 노래하고 싶을 때>(김기우), <유리>(이종은), <바벨탑의 그늘>(김지영), <권태로운 자들, 소파 씨의 아파트에 모이다>(이치은). 이 중 당선은 <권태로운 자들, 소파 씨의 아파트에 모이다>가 차지했습니다만, 김형의 소설도 좋은 평가를 받았었죠. 예심 심사평에서는 김형의 장편 <바다를 노래하고 싶을 때>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 '오늘의 작가상' 최종후보에 올랐던 장편소설 <바다를 노래하고 싶을 때> 앞표지
ⓒ 문학아카데미
“김기우의 <바다를 노래하고 싶을 때>는 동시대를 대상으로 심리분석을 시도한 장편소설이다. 노동으로부터 소외당해 자기동일성을 상실한 채 흐느적거리고 있는 현대성의 징후를 포착하고자 한 의도가 돋보인다. 분열된 자아들의 목소리를 교차 반복시키면서 무의식과 의식의 대화를 통해 동일성 상실의 비극적 문제들을 조망해 보고자 한 시도는 주목에 값한다. (이하생략)”

김형의 그 소설에는 악보가 들어갑니다. 시인들의 시를 노랫말로 하여 김형이 직접 그린 것이죠. 그러한 시도에 대해 이문열 본심 심사위원은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바다를 노래하고 싶을 때>는 문장이 안정되고 감각적인 표현도 돋보였다. 그러나 혼란스런 시점의 교차나 악보의 수록 같은 것들은 특이하기는 해도 그 필연성을 인정하기는 어려웠다. 주제도 애매한 현대성 외에는 절실한 호소력을 지니지 못한 듯하다.”

이 점에 대해 김형은 단행본으로 펴냈을 때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균형의 긴장을 유지시키며, 망각되거나 파편화된 주인물의 기억을, 부유하는 음표처럼 그려내기 위해 악보를 넣었다.”

가난한 두 소설가를 태운 승용차는 사치품?

지난 2월 어느 날, 우리는 인천 남동구 만수동 하이웨이 주유소 앞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승용차를 몰고 먼길을 달려온 김형은 조금도 피로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내가 찾아가거나 중간지점에서 만나면 될 일인데, 김형이 의정부에서 승용차를 몰고 달려왔죠. 김형은 그런 사람입니다. 상대를 어떻게 하건 불편하게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잘 찾아오셨네요?"
"사람들이 잘 가르쳐 주네요, 하하. 타세요."

소설가가 모는 승용차에 또다른 소설가가 올라탔습니다. 뭐 그게 특별히 이상할 건 없지만, 한때 택시를 타고 다니는 여승이 이상하게 보였던 것처럼, 가난한 소설가 두 사람에게 승용차라는 게 너무 사치스럽다고 생각되니 그렇죠. 김형이 승용차를 몰기 시작한 것은 순전히 강의 때문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습니다. 춘천의 한림대까지 가서 강의를 해야 하니 승용차가 필요했던 거죠. 김형의 운전 솜씨는 과격하지 않고 자연스러웠습니다. 김형의 침착한 성격 덕분일 터.

김형은 얼마 전에 겨울방학 중에 맡았던 소설창작 강의를 마쳤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내장이 듬뿍 들어간 동태전골로 허기를 채우고 다시 승용차에 올라 이야기할 곳을 찾았습니다. 여름이면 공원에 앉아 이야기 나누면 될 일인데 아직은 쌀쌀하니 메모하기도 쉽지 않을 겁니다. 눈에 띈 한 곳에서는 라이브 공연 중이라 돌아나왔습니다.

"하하, 한때 김형(김기우)이 라이브 가수 했었지 않습니까?"
"예."
"김형은 서울예술대학 재학시 예음회 회원으로서 축제 때 대극장에서 통키타 치고 노래할 만큼 노랠 잘했죠."

다행히 간석동에 다방이 있었습니다. 조용한 다방이라 그곳에 앉았습니다. 토마토를 갈아 만든 토마토 주스를 마시며 우리는 1970년대를 이야기했습니다. (공교롭게도 내가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한 장소가 바로 그 다방에서 멀지 않은 곳입니다.)

교련검열을 최고의 점수로 치러냈지만 우리는…

"박정희 군사정권 때 초등학교를 다녀본 사람이라면 알 겁니다. 초등학교 1~2학년 나이에 구구단 외우듯이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느라고 얼마나 애먹었는가를. 그리고 중고등학교를 다녀본 사람이라면 알 겁니다. 세탁기가 귀하던 시절, 우리 어머니들의 손빨래감이 얼마나 많았는가를. 네다섯 자녀 키우는 집안이 보통이던 시절이었으니 그 고생이 오죽했겠습니까. <봄으로 가는 취주>의 표제작은 교련 검열을 앞둔 고등학교 밴드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었습니다만, 어떻습니까? 밴드부 생활을 했었다고 들었는데…."
▲ 박정희 군사정권의 몰락을 배경으로 쓴 단편을 표제작으로 한 <봄으로 가는 취주> 앞표지
ⓒ 민미디어


"예. 고등학생 때는 트롬본을 불었고 전경 복무 때는 경찰악대에서 트럼펫을 불었죠. 입으로 불어서 연주하는 걸 취주(吹奏)라고 합니다."

"<봄으로 가는 취주>에는 뒷부분에 이르러 현대사에서의 획 굵은 대형사건 한 가지가 언급되고 있더군요."

교련검열을 최고의 점수로 치러냈지만 우리는 여의도에 나갈 수가 없었다. 검열을 마친 일 주일 뒤, 대통령이 저격당해 숨졌다는 소식이 온통 세상을 뒤덮었다. 그 소식은 모든 사람들에게 밑도 끝도 없는 불안을 자아내게 했다. 당장에 무슨 큰일이라도 벌어질 것처럼 모두가 쉬쉬하며 눈을 두런거렸다. (중략) 거리에는 어디에서 그렇게 많이 모였는지 대학생들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 목청껏 구호를 외쳐댔고, 낯선 군인들이 살기 가득한 눈빛을 굴리며 다급하게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있었다. -<봄으로 가는 취주> 166쪽

"10.26 대통령 암살이 있기 전의 가을이 계절적 배경입니다만, 취주는 봄을 부르는 희망을 상징하고 있다고 보아도 되겠습니까?"

"예. 악(惡)이나 독(毒)을 제거하는 상징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김형(김선영)도 겪으셨죠? 일제 문화의 잔재인 검정 교복의 호크. 군기 꽤 잡았습니다."

"호크 안 채우고 교문을 들어서면 3학년 규율부한테 걸려서 혼 좀 났죠. 김형, 10.26 대통령 암살 사건이 터진 1979년 가을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봄으로 가는 취주>는 마지막을 숙직선생의 호각소리로 끝맺고 있더군요. 봄은 왔어도 민주는 오지 않았던 어지러운 세월을 암시한 걸로 나는 해석해 보았습니다."

진열대엔 악기가 행군시 배열로 놓여 있었다. 그 중에서 은색의 트럼펫이 언제나처럼 다른 악기에 비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중략) 나는 가방을 열어 조심스럽게 트럼펫을 집어넣었다. (중략) 통금이 곧 해제될 시간이었다. 문득 피로가 몰려왔다. 숨을 깊이 들이쉰 다음 트럼펫이 들어 있는 가방을 부둥켜안고 나는 소리 없이 창문을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삐-삑 하고 호각소리가 내 귓속을 마구 쑤셔댔다. -<봄으로 가는 취주> 170쪽

소시민의 삶 가만히 들여다보기

<봄으로 가는 취주>에는 중편 <여름을 묻다>와 단편 <표리>, <환(環)>, <물너울>, <빈 크리스마스>, <겨울내음>, <갈현동주민약전>, <그릴 수 없는 그림들>, <거짓말의 위안>이 수록되어 있으며 문학평론가 김인호씨는 '원본의 기억과 상처의 반복'이라는 주제로 김형의 소설들을 해설해 놓았더군요. 김형의 소설을 보면 서사성(敍事性)과 소시민의 삶을 중시하되 그 모양과 움직임을 서두르지 않고 가만히 들여다본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것이 김형 소설의 문체일 테죠.

"앞으로 강의 때문에 바쁘실 텐데, 그렇더라도 구상하고 있는 장편소설이 있습니까?"
"예. 10년 넘게 치매에 시달리시는 아버지를 통해, 평범한 시민으로서의 한국의 아버지상을 그려내고 싶습니다. 기억이 곧 생명 아니겠습니까."

김형, '소설을 일컬어 사람 사는 이야기라고 스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또다시 살아가는 이야기를 묶어냅니다'라고 <봄으로 가는 취주>의 머리말을 시작했었죠? 바쁜 강의는 어느새 끝났을 것이고 예정돼 있던 여름방학을 맞이했을 테죠. 전화하여 물어보렵니다. "구상중이던 장편소설, 잘 돼 갑니까?"

덧붙이는 글 | ●김선영 기자는 대하소설 <애니깽>과 <소설 역도산>, 생명 에세이집 <사람과 개가 있는 풍경> 등을 쓴 중견소설가이자 문화평론가이며, <오마이뉴스> '책동네' 섹션에 '시인과의 사색', '내가 만난 소설가'를 이어쓰기하거나 서평을 주로 쓰고 있다. "독서는 국력!"이라고 외치면서 참신한 독서운동을 펼칠 방법을 다각도로 궁리하고 있는 한편, 현대사를 다룬 신작 대하소설 <군화(軍靴)>를, 하반기 완간을 목표로 집필하고 있다.


봄으로 가는 취주

김기우 지음, 어진소리(민미디어)(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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