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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도 창의군 군사장 왕산 허위 선생
13도 창의군 군사장 왕산 허위 선생
왕산(旺山) 허위(許蔿)는 1855년 4월 2일에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함과 슬기가 나타나서 일곱 살 때부터 숙부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달이 대장군 되니, 별이 많은 군사가 되어 따른다((月爲大將軍, 星爲萬兵隨)”
“꽃을 꺾으니 봄이 손에 있고, 물 길으니 달이 집에 들어온다(折花春在手, 汲水月入家)”는 글을 지어서 집안어른들이 모두 그 재주에 놀라며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열다섯 살에 삼경을 독파하였고, 천문 지리와 병진(兵陣), 산수도 그 요점을 다 깨쳤다. 아울러 춘추강목과 육도삼략에도 심혈을 기울여 익혔다. 왕산은 천성이 워낙 과묵한지라 동년배 친구들이라도 그의 깊은 공부를 헤아리지 못할 정도였다.

스물다섯에 어머니를, 스물일곱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때마다 손가락을 끊어서 피를 흘러 부모의 입에 넣으면서 매우 비통해 하였다. 왕산은 한 평생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옷은 화려한 것을 입지 않고 늘 굵은 베옷을 입으면서 “이것이 선비의 본색이다”고 하였다.

갑오년(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일본군대를 끌어들여 평정하자 우매한 사람들이 비적을 소탕하였다고 좋아하였으나 왕산은 격앙된 충성심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탄식하기를 “일본군대가 이를 기화로 우리나라를 쳐 없애는 화를 입을지 누가 알겠는가?”고 흉악한 일본의 본심을 그때부터 짐작하였다.

을미(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자 왕산은 분한 기운이 하늘을 찔러 이듬해 3월 10일에 이은찬, 조동호, 이기하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과 장정 몇 백 명을 뽑은 다음, 김산군(金山郡, 지금의 김천시) 무기고에 수장된 병기를 압수하여 금산과 성주 사이에다가 진을 쳤다. 격문을 원근에 발송하여 한창 군사를 모으는 중, 대구 관병이 성주 진을 덮치자 경성(서울)과 공주 군사도 이에 합세하여 이은찬과 조동호 동지가 그들에게 잡혔다.

왕산은 흩어진 군졸을 다시 모아서 충청도 진천 지방으로 진출하였는데, 밀사 전경운이 고종황제의 밀서를 받들고 와서 왕산에게 직접 전하였다. 그 내용은 “의병을 급히 해산하라”는 것이었다. 왕산은 하는 수 없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군졸들에게 알아듣도록 타일러 해산시켰다.

이후로 분함과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여 세상을 등지고 살고자 맏형 방산이 사는 진보로 가서 한 책상에 공부하며 세상의 이치를 더욱 깨쳤다.

평리원 수반판서

그 무렵 왕산의 그릇과 인물을 알아본 대신 신기선이 고종황제에게 아뢰기를 “허위의 경륜 포부를 세상에서 관중과 제갈 량이라 일컬으니 불러서 높은 벼슬로 등용할 때인가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산의 고향, 구미 금오산
왕산의 고향, 구미 금오산 ⓒ 박도
이에 고종황제가 “밭 갈던 노인(은나라 탕왕이 정승이 되기 전에 농사를 지었음)과 동해 바닷가에서 낚시질하던 첨지(강 태공 여상이 주 문왕의 스승이 되기 전에 동해에서 고기를 낚았음)인들 천거하는 사람이 없으면 내가 어찌 알겠나?”하고 바삐 왕산을 불러오도록 명하였다.

관찰사 조한국이 임금의 전보 칙령을 받고, 선산원 수령 송영대에게 속히 봉행하라 하였다. 그리하여 송영대가 진보에 급히 통보하여 왕산이 역말을 타고 서울에 도착하여 대궐 앞에서 황제의 명을 기다렸는데 그때가 기해(1899년) 3월 1일이었다.

고종황제는 왕산이 서울로 왔음을 듣고, 포의(布衣, 평민)로 대궐에 들어올 수 없는 전례에 따라 임시 벼슬로 환구단 참봉을 내려서 알현케 하고는 곧 영희전 참봉으로 제수하고, 이어 소경원 참봉으로, 4월 4일에는 성균관박사로 임명하였다.

계묘(1903)년 10월에는 승훈랑(承訓郞)으로 승진하였고, 그 이듬해인 1904년 4월 1일에는 주차 일본공사 수행원으로 임명되었다가 같은 달 4일에는 중추원 의관으로 승진하였다. 이어 같은 달 11일에는 통정대부로 승진하였고, 초고속으로 5월에는 평리원 수반판서(대법관)를 제수 받았다.

그때 세도가 김아무개란 자가 토지소송을 일으켰는데, 그로부터 긴한 청탁이 있었다. 하지만 왕산은 그 청탁을 듣지 않고 오히려 김 아무개를 패소시킨 뒤 엄히 가두었다. 세도가 김아무개 집안에서는 하룻밤 사이 그 옥사를 뒤엎어 버렸다. 이에 왕산이 “법관이 법을 집행치 못하니 그 직을 사임함이 마땅하다”고 하면서 근무치 않았다.

고종황제가 그 내용을 통찰하고 왕산의 판결을 재가하며 출근토록 권하였다. 그해 8월 3일, 평리원 재판장(대법원장)에 임명되어 시무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동안 쌓인 송사를 공평 명쾌하게 판단 처리하니 탄복치 않는 이가 없었다.

고종황제의 ‘의대조’

을사(1905)년 3월 1일, 왕산은 고종황제의 두터운 신임으로 비서원승(秘書院丞)으로 임명받았다. 그 무렵 통감 이토히로부미가 우리 대궐 안에 상주하면서 정무를 모두 관장하면서 제 멋대로 권위를 부렸다. 나라 안팎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이 이토를 거쳐서 처리되었다. 이에 충성되고 의기 있는 신하는 모두 벼슬을 그만두었는데 왕산도 이때 사직 소를 올렸으나 고종황제가 윤허치 않았다.

왕산은 찬성 최익현, 판서 김학진과 함께 일제의 주권 및 공사재산권 침탈과 백성들의 집회 금지, 결사 방해, 언론 자유 침해 등을 규탄하는 격문을 전국에 살포했다는 이유로 일본공사에 의해 세 사람이 모두 옥에 갇혔다. 옥에서 나온 왕산은 사직 상소를 올리면서 다음 열 조목을 건의하였다.

첫째, 학교를 세워서 인재를 양성하고 재주가 우수한 자를 골라 외국에 유학시킬 것
둘째, 군정(軍政)을 정돈해서 뜻밖의 변고에 대비할 것
셋째, 철도를 증설하고 전기를 시설하며 교통과 산업에 이바지할 것
…………………………
아홉째, 노비를 해방하고 적서(嫡庶)를 구분하지 말 것
열째, 관기를 엄정케 할 것


이상의 건의를 올리자 고종황제가 가상하게 여겨서 받아들였다.
그해 가을 벼슬에 물러나 시골로 돌아왔으나 집에 머물 수 없어서 지례 두대동에 가서 은거생활을 하던 중, 을사오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분한 마음을 억제치 못하고 경상, 충청, 전라, 강원 각도를 두루 돌면서 유림과 지사에게 연락하여 창의(倡義, 국난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킴)하기로 의논하였다. 곽종석, 현상건, 이학균, 유인석과 더불어 마음을 통하고 영천 출신의 정환직에게 자금을 주선케 하여 2만 냥을 거둬서 떠도는 군인들의 생계를 도왔다.

금오산 들머리에 있는 왕산 허위 선생 유허비각
금오산 들머리에 있는 왕산 허위 선생 유허비각 ⓒ 박도
정미(1907)년 7월, 밀사가 대궐에서 내린 봉서(封書) 한 통을 전하여 펼쳐보니 ‘의거(義擧)’라는 두 글자인데 그것은 고종황제의 ‘의대조(衣帶詔: 임금이 옷에다가 써 내린 왕명)’이었다. 그때 고종황제는 일제의 강압으로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융희 원년이었다. 그달에 군대를 해산하고 일제의 위협 아래 7조약을 정했다는 소문이 잇달아 들렸다.

그해 9월, 경기도에서 창의하여 포천, 연천, 적성, 삭령, 철원, 양주 등 여러 곳에 군사를 배치하는 한편, 강화로 내려가며 부하 권중설, 김규식, 연기우 등이 적진을 여러 번 격파해서 군세를 크게 떨쳤다. 그해 겨울에 국내 각 지역의 지사를 연락하자 모두 양주에 모였는데 군사가 일만 명이었다. 이인영(李麟榮)을 추대하여 총대장으로 삼고 왕산은 군사장이 되었다. 왕산이 일찍부터 병술과 전략이 익숙하기 때문이었다.

각도마다 대장 및 부대 이름을 정하여 갈라 맡겼다. 관동(關東)에는 민긍호, 호서(湖西)에는 이강년, 교남(嶠南, 영남)에는 박정빈, 진동(鎭東, 경기 황해)에는 권중희 관서(關西)에는 방인관, 관북(關北)에는 정봉준이었다.

각 지역의 대장 임명을 마치고 사기충천하여 서울로 진군케 했다. 그리하여 서울 장안에 있는 일제 통감부를 쳐부수고, 새 조약을 파기한 다음, 각국 영사관을 두루 방문하여 일본의 불의를 성토하고 한국의 처지를 자세히 알리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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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쓰면서 한국학문헌연구소편 <왕산전집>과 선주문화연구총서3 <왕산허위의 사상과 구국의병항쟁>을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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