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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을 잘 견뎌낸 무
겨울을 잘 견뎌낸 무 ⓒ 성락
꽤나 깊이 묻었다고 생각했는데, 위에 있던 무들은 말갛게 언 모습입니다. 잔뿌리들은 하얀 성에가 끼어 있습니다. 참 신기합니다. 엄동설한을 땅 밑에서 보냈는데도 멀쩡한 무는 금방 밭에서 캐 낸 것 같은 싱싱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조상들의 지혜에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래 무를 저장하는 구덩이는 항아리 모양으로 만듭니다. 무를 모두 넣은 다음 뚜껑을 덮고 한쪽 옆에 조그마한 구멍을 내 볏짚뭉치로 단단히 막아 놓습니다. 한겨울에도 이 구멍을 통해 길고 뾰족한 작대기로 무를 꺼낼 수 있는 것이지요. 꺼낼 때는 작대기를 한 번에 꺼내고자 하는 무에 꽂아야 합니다. 놓치면 무가 썩기 때문이지요.

막 밭에서 수확한 그대로 입니다
막 밭에서 수확한 그대로 입니다 ⓒ 성락
오늘 개봉한 무 구덩이는 이런 형태는 아닙니다. 아예 땅이 풀리면 꺼낼 생각으로 구멍을 만들지 않은 것입니다. 제대로 된 구덩이를 만들어 겨울에 꺼낼 수 있도록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못마땅해 하셨던 아버지는 못내 아쉬운 듯한 마디 하십니다.

"무는 설 전에 꺼내야 제 맛이지. 지금은 아마 싱거운 맛으로 변했을 게다."

아버지는 맛없는 음식을 빗댄 '설 지난 무맛이다'라는 속담을 소개하십니다. 봄기운이 느껴지면 왜 무맛이 싱거워질까?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버지도 그에 대해서는 명쾌한 답을 주시지 못합니다.

꺼낸 무 한 개를 깨끗이 씻어 껍질을 벗깁니다. 그리고 마치 과일을 담듯 잘게 썰어 접시에 담아 봅니다.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물기가 먹음직스러움을 더합니다. 한 입 베어 먹어 봅니다. 차가운 느낌 때문인지 제법 단 맛이 느껴지는 게 그만입니다.

겨울 간식으로 훌륭한 무
겨울 간식으로 훌륭한 무 ⓒ 성락
어린 시절, 한겨울에 간식거리라고는 기껏 해야 고구마와 무 정도였습니다. 벌겋게 이글거리는 화롯불 주변에 온가족이 모여 앉아 먹는 무는 정말 꿀맛이었습니다. 감기에 걸린 식구가 있으면 무속을 파내고 그곳에 꿀을 채워 화롯불에 묻습니다. 한참 후 익은 무를 꺼내 꿀을 따라 마시고 무도 함께 먹어치우면 감기는 씻은 듯 나아버리곤 했습니다.

무는 '밭에서 나는 산삼'으로 표현할 정도로 사람에게 이로운 채소입니다. 배추, 고추와 함께 3대 채소로 꼽히기도 하지요. 특히 우리나라 토종 무는 소화와 해독에 효과가 뛰어나고 원기를 높이는 데도 산삼에 버금간다고 전해집니다. 실제로 '본초강목' 등의 기록을 보면 한방에서 무를 약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무는 디아스타제 같은 전분 소화효소는 물론 단백질 분해효소도 가지고 있어서 소화작용을 돕기도 합니다. 고기나 생선회를 먹을 때 무와 같이 먹거나 무즙을 내서 여기에 찍어 먹는 것도 다 그런 이유이지요. 감기에 걸렸을 때 엿을 넣고 즙을 내서 먹으면 좋고, 니코틴을 중화하는 해독작용이 있으므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무를 자주 먹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당분간 먹을 만큼만 꺼내고 다시 잘 덮습니다. 아침으로 기온이 영하에 머물기 때문에 자칫 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무 고유의 맛을 느낄 수 있는데, 한번 구덩이를 파헤친 후라 정말 맛이 싱거워지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무 구덩이를 파는 동안 마치 숨겨놓았던 보물을 캐내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하긴 온 세상을 꽁꽁 얼어붙게 했던 겨울을 잘 견뎌낸 무야말로 보물이라 할 수 있지요. 다시 땅 속에 숨겨진 '무'라는 보물이 부디 무사하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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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지키며 각종 단체에서 닥치는대로 일하는 지역 머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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