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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감사 홍명구는 벌써 닷새째 도원수 김자점을 찾아가 의논할 것을 청했으나 또다시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병을 핑계로 만나지 않는 것이었지만, 홍명구는 김자점이 건강한 상태로 지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쳐해 있는데 대체 도원수란 작자는 어찌 저리 태연할 수 있단 말인가!”
홍명구는 얼마 전 종사관으로 임용된 윤계남, 별장 장훈과 마주앉은 채 분노를 터트렸다.
“소인의 좁은 안목으로는 길을 막고 오랑캐의 뒤를 노리면 싸워 물리치지는 못할지언정 남한산성의 숨통이 트일 것이 온데 도원수는 많은 병력을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으니 대체 무슨 계책이 있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윤계남의 말에 홍명구는 크게 한숨을 쉬며 바닥을 쳤다.
“내 말이 바로 그렇네! 듣자하니 남한산성에서 사람을 보내 속히 구원하라는 어명이 내렸다는 소문이 도는데도 망설이고 있다는 것은 불측한 마음을 품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네!”
“한시라도 바삐 군사들을 움직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도원수의 명을 기다릴 수 없습니다.”
장훈의 말에 홍명구는 분연히 일어서 지도를 꺼내들어 펼쳤다.
“평양감영에 있는 병사와 평안병사 유림의 병력을 합하여 철원으로 향한다. 자모산성에 병력을 모아놓고 오랑캐의 뒤를 노리면 자연히 저들의 병력은 나뉠 것이다.”
“하지만 병사(병마절도사)께서는......”
말을 꺼낸 윤계남은 말끝을 흐렸다. 마땅히 평안도의 병권을 쥐고 있는 유림이 앞장서도 모자랄 판인데 그 역시 미적지근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홍명구는 윤계남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병사는 내가 설득할 것인 즉, 너희들은 언제라도 병사들이 나갈 수 있도록 준비하라.”
장훈과 윤계남은 홍명구의 명을 받들고 병사들을 점고했다. 홍명구와 유림휘하의 병사들은 모두 5천으로서 보군 2천8백, 사수(射手) 1천, 포수(砲手)1천백여명, 기병4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윤계남은 병사들에게 근왕병으로서 어가를 구하러 간다는 명을 전했고 병사들은 다가올 결전에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보시오 병사! 내가 잘 못 들은 것이오? 그 무슨 해괴한 말씀이오!”
같은 때, 평안병사 유림은 창백한 얼굴로 홍명구의 질책을 듣고 있었다.
“도원수의 뜻은 어가를 포기하고 그 뒤를 생각하자는 것이라 했습니다.”
유림은 어제 도원수 김자점과 술자리를 같이 한 일을 털어놓으며 그가 한 경망스런 말들을 담담히 읊조리듯이 이어나갔다.
“또, 술에 취해 이런 얘기도 했습니다. 지금의 평안감사는 너무 고지식한데다가 자신들의 뜻에 반하는 일을 많이 해서 예전에 목숨을 위협받은 적이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사람이 너무 담백하여 애써 그 실체를 알고자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홍명구는 잠시 동안 머리가 복잡해졌다. 유림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선 김자점을 찾아가 역적질을 했다는 엄포를 놓아 강제로라도 끌어내어 따져봐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저 역시 도원수의 뜻에 따르고자 합니다. 척화니 주화니 하며 썩은 논쟁만 하는 중신들과 함께 잊혀지길 바랍니다.”
홍명구는 고개를 흔들었다.
“잘못 생각하셨소. 절도사를 그렇게 생각하게끔 한 김자점도 썩은 중신 중 하나일 뿐이오.”
유림의 뜻은 홍명구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확고했다.
“도원수가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소. 다만 어느 점에서 나와 일치할 뿐이외다.”
“이보시오 절도사! 난 절도사의 뜻 따윈 상관없소. 지금은 다만 절도사의 능력이 내게 필요할 뿐이오! 날 도우시오!”
유림은 한층 더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감사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굳이 제 뜻을 앞세우진 않겠사옵니다. 다만 이 일은 남에게 발설하지 마옵소서. 감사의 목숨이 달린 일일지도 모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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