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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묘 일대는 벼룩시장이 형성되어 자못 번잡하다. 동묘 입구에 있는 '동묘공원' 표시석도 좌판으로 가로막혀 있다. 비석 뒷면에 보면, 동묘공원은 '1976년 4월 1일 개원'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동묘 일대는 벼룩시장이 형성되어 자못 번잡하다. 동묘 입구에 있는 '동묘공원' 표시석도 좌판으로 가로막혀 있다. 비석 뒷면에 보면, 동묘공원은 '1976년 4월 1일 개원'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 이순우
동묘의 정문은 더욱 가관이다. 지난해부터 시작한 정문 보수 공사는 해를 넘기고도 가림막만 쳐둔 채 별 진척이 없다. 지붕 기와를 다 들어내 서까래만 앙상하고 대팻밥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으니 이래저래 어수선한 분위기는 이곳까지 이어진다.

간이식 통로를 따라 들어선 자리에는 '금잡인(禁雜人)'과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고 새긴 비석이 먼저 사람들을 맞이한다. 다시 중문을 통해 걸어 들어가면 조금은 낯선 형태의 건물을 마주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동묘의 정전이다.

이 건물을 가만히 살펴 보니 가로 방향의 배치에만 익숙한 우리들에게는 많이 낯설게 여겨질 만큼 세로 방향으로 더 길쭉하게 생겼다. 말하자면 속이 깊은 건물 구조인 셈인데, 정면에서 보면 마치 건물 옆구리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갖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건물을 한바퀴 돌아 보면 전면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방향이 온통 벽돌 벽으로 둘러싸인 본새가 영락 없이 중국풍(中國風)이다. 하기야 여기가 달리 '관왕묘'이겠는가?

동묘 정전의 모습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특이하게도' 가운데와 오른쪽에 현판을 둘이나 달고 있다. 크기만 약간 다를 뿐 글씨도 똑같고, 만든 날짜까지 일치한다. 왜 여기에는 현판이 둘씩이나 달려 있는 것일까?
동묘 정전의 모습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특이하게도' 가운데와 오른쪽에 현판을 둘이나 달고 있다. 크기만 약간 다를 뿐 글씨도 똑같고, 만든 날짜까지 일치한다. 왜 여기에는 현판이 둘씩이나 달려 있는 것일까? ⓒ 이순우
그런데 이곳을 들릴 때마다 한가지 궁금증이 솟아난다. 보아 하니 동묘 정전 앞에 달아 놓은 편액이 둘이다. 현판의 길이만 약간 다를 뿐 '顯靈昭德義烈武安聖帝廟(현령소덕의열무안성제묘)'라고 하는 글자와 글씨체라든지 모든 것이 똑같다. 이것도 중국식일까?

현판의 한쪽에 적혀 있는 작은 글씨를 보니까, 이는 고종 황제가 관왕(關王)을 관제(關帝)로 추숭하면서 친히 글씨를 내려 고쳐 달게 했던 것이라고 한다. 그때가 광무임인맹춘(光武壬寅孟春)이라 하였으니 곧 1902년 정월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두개의 현판을 달았을까? 과연 처음부터 두개를 달았던 것일까? 여기에는 도대체 어떤 내력이 숨어 있는 것일까?

이를 위해서는 먼저 관왕묘의 연혁부터 대략 살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여러 문헌을 훑어 보면 조선 땅에 관왕묘 즉 관우(關羽)의 사당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선조 31년(즉 1598년)의 일이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군 진인(陳寅)이 울산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후 서울 남대문 밖에다 거처를 정하고 요양을 하면서 이곳 후원에 사당을 설치한 것이 그 기원이었다. 이것이 남관왕묘(南關王廟)이며, 줄여서 '남묘(南廟)'라고 불렀다.

그리고 다시 동대문 밖에다 '동묘'가 들어선 것은 그 이듬해의 일이며, 공사의 완공은 선조 34년(즉 1601년)에 있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선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다 관왕묘의 터를 정하기까지는 이런저런 논란이 있었던 모양이다. 두번째의 관왕묘를 세우기로 작정했던 명나라 측에서 애당초 남대문 밖을 건립 위치로 지정했다는데, 선조 임금은 이에 대해 동대문 밖에 관왕묘를 세우도록 여러 번 교섭했다는 것이다.

구태여 동대문 밖을 고집한 것은 크게 두가지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남대문 밖에는 이미 남묘가 있으니 한곳에다 중복되게 관왕묘를 세움은 불가한 일이라는 것이 하나이며, 이와는 별도로 서울의 지세로 보아 동쪽이 허하다 하여 이를 보완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 나머지 하나였다. 그리하여 결국 지금의 자리가 관왕묘를 세울 곳으로 결정된 데는 그러한 까닭이 있었다.

동묘 정전의 내부 모습이다. 가운데에 보이는 것은 '나무'로 만든 관우상이다. 천정 쪽을 올려다 보면 맨 먼저 '현성전(顯聖殿)'이라는 편액이 눈에 들어온다. 이걸 왜 건물의 내부에다 걸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것으로 동묘 정전의 이름이 원래 '현성전'이라고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동묘 정전의 내부 모습이다. 가운데에 보이는 것은 '나무'로 만든 관우상이다. 천정 쪽을 올려다 보면 맨 먼저 '현성전(顯聖殿)'이라는 편액이 눈에 들어온다. 이걸 왜 건물의 내부에다 걸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것으로 동묘 정전의 이름이 원래 '현성전'이라고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이순우
이 땅에 느닷없이, 그것도 한꺼번에 둘씩이나 '관왕묘'가 들어선 것은 요컨대 임진왜란의 와중에 대국(大國)의 원조와 군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조선의 처지가 빚어낸 반대 급부이자 부산물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중국의 황제도 모자라 이제는 '관왕'까지 섬겨야 하는 것이 내키지 않는 일이었음은 분명했다.

하지만 참으로 묘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그렇게 관왕묘가 자리를 잡게 되자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관왕'의 위상은 서서히, 그리고 아주 굳건히 조선 땅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숙종 17년(즉 1691년)에 능행(陵幸)을 하고 돌아오던 임금이 몸소 이곳을 들른 것이 그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

이것이 선례가 된 이래로 역대 임금이 모두 기회가 닿을 때마다 동묘를 찾게 되었으니 자연스레 이곳은 나라의 지극한 보살핌을 받는 장소로 탈바꿈됐던 것이다. 이것 말고도 영조 임금은 '현령소덕무안왕묘(顯靈昭德武安王廟)'라는 편액을 내려 걸게 했을 뿐만 아니라 정조 임금 때는 동묘와 남묘에 모두 '사조어제무안왕묘비(四朝御製武安王廟碑)'까지 만들어 세우기에 이른다.

그런데 관왕이라는 존재의 의미는 역대 임금이 배알(拜謁)하는 대상이 되었다는 데에만 그치질 않았다. 언제부턴가 숱한 백성들에게 관왕은 추앙과 신앙의 대상으로 통하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관왕은 오래 전부터 '신통방통'하고 '영험'한 존재였다.

애당초 이 땅에 관왕묘가 들어선 것도 알고 보면 그러한 믿음과 관련이 있었다. 가령 <연려실기술>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 구절이 보인다.

일찍이 임진년과 정유년의 왜란 때에 관우의 신령이 나타나 신병(神兵)으로써 싸움을 도와 주어 명나라 장수와 군사들이 모두 말하기를, "평양의 싸움에서 이긴 것과 도산(島山)에서의 싸움과 삼도(三道)에서 왜병을 구축할 때 관우의 신령이 늘 나타나 음조(陰助)하였다."

이러한 관왕이었기에 민간에서는 곧잘 '재앙을 막아 주고 복을 비는' 대상으로 섬김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무당이나 점바치가 사는 공간마다 어김없이 관우의 형상이 등장하는 것은 이미 그가 신통하고 주술적인 존재로 자리매김 된 탓이라고 풀이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매일신보> 1928년 3월 2일자에는 보신각 옆에 있던 중앙관제묘(즉 현성전)의 내력을 소개하는 기사가 수록되었다. 여기에서 보듯이 서울 시내에는 남묘, 동묘, 북묘, 서묘 말고도 민간에서 만든 관왕묘가 여럿 있었다. 이들 가운데 장충동의 '성제묘'와 방산동의 '현성전'은 아직도 그 형태가 보존되고 있다.
<매일신보> 1928년 3월 2일자에는 보신각 옆에 있던 중앙관제묘(즉 현성전)의 내력을 소개하는 기사가 수록되었다. 여기에서 보듯이 서울 시내에는 남묘, 동묘, 북묘, 서묘 말고도 민간에서 만든 관왕묘가 여럿 있었다. 이들 가운데 장충동의 '성제묘'와 방산동의 '현성전'은 아직도 그 형태가 보존되고 있다.
어쨌거나 관왕을 추앙하는 일은 고종 시대에 이르러 정점에 이르게 된다. 바야흐로 관왕묘의 전성 시대가 열린 것이다. 남쪽과 동쪽에 있는 두개의 관왕묘도 모자라 이번에는 서울의 북쪽과 서쪽에도 새로운 관왕묘가 세워졌다.

임오군란의 이듬해인 고종 20년(1883년)이 되자 혜화문 근처에 북묘(北廟)가 먼저 들어섰고, 그보다는 한참 뒤인 광무 6년(즉 1902년)에는 새문 밖에 서묘(西廟)가 세워짐에 따라 관왕묘는 동서남북으로 하나씩 에워싼 꼴이 되고 말았다.

다만 새문 밖의 것은 정확히 말하면 후한의 소열제(즉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를 모시고 관우(關羽), 장비(張飛), 공명(公明), 조운(趙雲), 마초(馬超), 황충(黃忠), 옥보(玉甫), 주창(周倉), 조루(趙累), 관평(關平) 등을 배향한 곳으로 정식으로는 '숭의묘(崇義廟)'라 했으나, 흔히 '서묘(西廟)'라는 이름으로도 통했다.

그런데 특기할 만한 것은 북묘나 서묘가 창설된 것은 모두 왕실과 무녀가 얽힌 결과물이었다는 사실이다.

가령 북묘는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신한 민후(閔后)에게 환궁 시기를 예언해 주었다는 이성녀(李姓女, 이씨 성을 가진 여자라는 뜻)가 주청하여 만든 것이라 한다. 서묘는 엄비(嚴妃)의 신임을 얻은 현령군(賢靈君)이라는 무녀 윤성녀(尹姓女, 윤씨 성을 가진 여자라는 뜻)가 주청하여 세운 것이라 전하는데, 어디까지가 믿을 수 있는 얘기인지는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북묘의 건립과 관련하여 이성녀라는 무녀가 이른바 '진령군 대감(眞靈君 大監)'이라 하여 온갖 권세를 부리고 세상에 허망한 일을 많이 벌였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북묘는 1884년에 벌어진 '갑신정변'의 현장이라는 데에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고종 임금이 정변을 맞아 피신한 장소가 바로 '북묘'였고, 나중에 이곳에서 겪은 일을 담아 손수 비문을 짓고 민영환에게 글씨를 쓰게 하여 '북묘비(北廟碑)'를 세우기까지 하였는데 이때가 바로 1887년이었다.

경복궁 내 국립고궁박물관 야외전시구역의 안쪽에는 이른바 '북묘비(北廟碑)'가 남아 있다.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수장품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비석의 갓 아래에는 제작 당시의 먹줄까지 남아 있을 정도로 보존 상태는 매우 양호한 편이다. 다만 비석이 옮겨진 때는 자세히 알 수 없어 1922~26년 사이에 옮겨진 것이 아닐까 하고 추정할 따름이다.
경복궁 내 국립고궁박물관 야외전시구역의 안쪽에는 이른바 '북묘비(北廟碑)'가 남아 있다.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수장품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비석의 갓 아래에는 제작 당시의 먹줄까지 남아 있을 정도로 보존 상태는 매우 양호한 편이다. 다만 비석이 옮겨진 때는 자세히 알 수 없어 1922~26년 사이에 옮겨진 것이 아닐까 하고 추정할 따름이다. ⓒ 이순우
그리고 관왕묘의 위상에 있어서 큰 변화가 생겨난 것은 1902년 1월의 일이었다. 대한제국의 황제는 일찍이 북묘에서 겪은 일을 잊지 못했음인지 마침내 이때에 관왕을 높여 황제로 삼고 그 칭호를 '현령소덕의열무안관제'로 정했다.

그러니까 1598년에 처음 이 땅에 '관왕묘'로 뿌리를 내렸고 다시 300년이 흘러 동방의 조선에서 그렇게 '황제'가 된 이, 그가 바로 중국 후한의 장수 관우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관제에게 붙여진 칭호는 북묘 정전 앞에 달린 현판에서 보았던 바로 그 이름이다. 또한 현판에 작은 글씨로 '광무임인맹춘(光武壬寅孟春)'이라고 했던 것이 바로 이 시기의 일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앞에서 이미 설명했다시피 글씨는 고종 황제의 친필이다.

이 시기에는 세군데의 관왕묘가 있었으므로 새로운 '관제묘(關帝廟)'의 현판은 남묘, 동묘, 북묘에 모두 고쳐 달았다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서묘'의 경우에는 아직 설치되지 않았을 뿐더러 '숭의묘(崇義廟)'가 정식 명칭이었으므로 애당초 이와는 무관했다.

그런데도 왜 동묘 정전의 현판은 둘씩이나 달려있는 것일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아직 약간의 설명이 더 필요하다.

'관제묘'가 성립되고, 곧이어 '서묘'까지 건립되어 가히 '관우묘의 전성시대'라 할만 했지만, 이러한 시절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바야흐로 세상은 국권 피탈의 시기로 접어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력이 쇠진하고 나라를 제대로 꾸려나갈 수 없는 형편이 된 마당에 때마다 사당에 제사를 올린다는 것은 너무도 벅찬 일이었다.

이리하여 1908년 7월 23일에 새로운 황제는 국가의 제사에 관한 조칙(詔勅)을 내린다. 그리고 이에 관한 세부사항은 칙령으로 정리되었다. 이름하여 '칙령 제50호 향사이정(享祀釐整)에 관한 건'이 그것이었다.

<대한제국 관보> 1908년 7월 27일자에는 국가 제사에 관한 조칙과 더불어 "칙령 제50호 향사이정(享祀釐整)에 관(關)한 건(件)" (1908년 7월 23일)이 수록되어 있다. 이때에 이르러 모든 '관제묘'에 대한 제사는 한꺼번에 폐지되었다.
<대한제국 관보> 1908년 7월 27일자에는 국가 제사에 관한 조칙과 더불어 "칙령 제50호 향사이정(享祀釐整)에 관(關)한 건(件)" (1908년 7월 23일)이 수록되어 있다. 이때에 이르러 모든 '관제묘'에 대한 제사는 한꺼번에 폐지되었다.
요컨대 재정에 부담이 되는 제사의 횟수를 크게 줄이고, 사당이나 묘, 단 등은 중요한 것만 남기고 합쳐서 정리한다는 취지였다. 흔히 육궁(六宮)으로 부르던 후궁들의 사당이 한곳에 모인 것도, 선농단과 선잠단이 사직단에 합쳐진 것도, 역대 어진을 모신 전각들이 선원전만 남기고 사라진 것도 모두 이때에 벌어진 일이었다.

당연히 네 곳이나 되던 관왕묘에 대한 정리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이에 관해 칙령에 표기된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이러했다.

"…… 제7조 대보단(大報壇) 만동묘(萬東廟) 숭의묘(崇義廟) 동관묘(東關廟) 남관묘(南關廟) 북관묘(北關廟) 급(及) 지방(안동 성주 완도 남원 전주 개성 평양) 관묘(關廟)의 제사(祭祀)를 폐지(廢止)하고 대보단 기지(基址)는 궁내부(宮內府)에서 보관(保管)하며 숭의묘 북관묘는 국유(國有)에 이관(移管)하고 만동묘 동관묘 남관묘 급 지방 관묘는 해지방관청(該地方官廳)에 하부(下付)하여써 인민(人民)의 신앙(信仰)함을 종(從)하여 별(別)로히 관리(管理)할 방법(方法)을 정(定)함."

이로써 동, 서, 남, 북에 있던 모든 '관제묘'에 대한 제사는 한꺼번에 폐지되었고, 소유권도 국유로 편입되거나 지방관청에 넘겨지는 조치가 이어졌던 것이다. 관우묘의 전성시대는 사실상 그렇게 막을 내렸다.

동묘 정전 앞에 남아 있는 석등의 모습이다. 왼쪽은 <한국건축조사보고> (1904)에 수록된 것으로 세키노 타다시(關野貞)가 1902년에 촬영한 모습이다. 위에 있던 동제등(銅製燈)은 사라졌고 지금은 받침돌 부분만 남아 있다. 여기에는 "광서십사년무자시월일(光緖十四年戊子十月日)"이라는 명문이 있어, 이것이 1888년 10월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동묘 정전 앞에 남아 있는 석등의 모습이다. 왼쪽은 <한국건축조사보고> (1904)에 수록된 것으로 세키노 타다시(關野貞)가 1902년에 촬영한 모습이다. 위에 있던 동제등(銅製燈)은 사라졌고 지금은 받침돌 부분만 남아 있다. 여기에는 "광서십사년무자시월일(光緖十四年戊子十月日)"이라는 명문이 있어, 이것이 1888년 10월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 이순우
그리고 그 후의 관제묘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경성부사> 제1권(1934)에는, 숭의묘 즉 서묘가 1909년 4월에 먼저 동묘에 합사(合祀)되었고 북묘는 1913년 5월에 가서야 다시 동묘에 합사되었다고 적혀 있다. 이와는 별도로 남묘의 경우에는 합사되었다는 기록이 발견되지는 않았고, 다만 '남묘유지사(南廟維持社)라는 민간단체에 불하되어 그 존재가 계속 보존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그 무렵의 신문 기사에 따르면 '북묘'가 없어진 때는 훨씬 다르게 나타난다. 가령 <대한매일신보> 1910년 5월 27일자에는 "송동(宋洞)에 재(在)한 북관왕묘를 영위(永爲) 폐지할 차로 현금 훼철중이라더라"고 했다. 다시 <대한매일신보> 1910년 5월 29일자에는 "북묘를 훼철한다 함은 이미 게재한 바이어니와 관왕의 화상을 작일에 동묘로 옮겨갔다더라"는 내용이 들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보다 약간 앞서 <대한매일신보> 1910년 5월 4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가 등장한다.

"신궁경의회에서는 국조이라 하는 신들 봉안할 차로 작일 상오 십이시에 그 회 회원이 탁지부관리를 대동하고 북관왕묘에 있는 기명과 물품과 용포와 각대와 휘장 등물을 모두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더라."

이걸로 미뤄 보면 북묘의 정리는 <경성부사>의 기록처럼 1913년 5월이 아니라 1910년 5월에 있었던 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조선총독부의 관유재산정리에 따라 경성부 동부 송동 소재 '북묘' 택지 4273평과 건물 일체 311평에 대한 매각 공고가 나온 것이 1913년 9월이었다. "1913년 운운"하는 것은 아마도 그것과 시기를 혼동한 탓이 아닌가도 여겨진다.

짐작컨대 북묘의 정리와 더불어 그곳에 있던 일체의 물건들이 동묘로 옮겨졌고, 당연히 그곳에 있던 '관제묘'의 현판 역시 동묘 쪽으로 따라 왔을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동묘 정전에 똑같은 현판이 둘씩이나 달려있는 연유는 바로 여기에 해답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서묘 즉 숭의묘의 경우에는 엄밀하게 말하여 '관제묘'는 아니었으므로 애당초 그러한 현판이 있을 리가 없다. 또 남묘는 그 상태 그대로 존재를 이어나갔으니까 결국에 정체불명의 현판은 북묘 쪽에서 넘어온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할 듯하다.

바꿔 말하자면 지금 동묘 정전에 매달린 두개의 현판은 관왕묘의 전성시대가 남긴 씁쓰레한 징표의 하나였던 셈이다.

<매일신보> 1920년 8월 1일자에는 '일본신도가'에서 동묘를 불하받아 '아마테라스 오오카미'와 '단군'을 합사하여 모시려 한다는 기사가 나온다.
<매일신보> 1920년 8월 1일자에는 '일본신도가'에서 동묘를 불하받아 '아마테라스 오오카미'와 '단군'을 합사하여 모시려 한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왕 동묘에 관한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이지, 이에 관한 '특이한' 신문 기사 하나를 여기에 소개하면서 글을 마무리하는 것이 좋겠다.

이 기사는 <매일신보> 1920년 8월 1일자에 나온 것으로 "동대문외 소재 관제묘내에 천조황대신(天照皇大神)과 조선건국주 '단군(檀君)'까지 합사(合祀), 동묘를 일본신도가가 총독부로부터 빌려가지고 수선"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조선총독부가 대영단으로써 일본신도가(神道家)에 대하여 조선개교의 인허를 하였으므로 등지 부상교관장(藤枝 扶桑敎官長)과 및 금천 신궁봉재회장(今泉 神宮奉齋會長) 등은 그 인가의 주지를 이루고자 목하 포교방법에 관하여 준비 협의 중인데 착문한 바에 의한즉

경성 동대문밖 관제묘(關帝廟)를 총독부로부터 빌려주기를 청하여 그곳을 대수선하고 9월 중순으로써 그 개교식(開敎式)을 거행할 예정으로 일본의 신도 각파로부터 지명의 인사 각 수십명이 참렬하고 제신은 천조황대신 소잔명조 즉 조선 건국의 주인으로 숭배하여오는 단군(檀君)을 합사(合祀)하고 또 조선인 신앙의 지도 배사(拜祀)하고 개교대제를 집행하는 동시에 조선 수천년 역사상 세습적 신앙으로써 세워있는 인사 즉 충절인사를 찾아서 각도로부터 대표가 참렬케 할 터이라.

그 대제에 다음하여 조선역대의 황족 왕족과 및 국가에 공로가 있는 충절의 신라 기타 국사로 목숨을 버린 사람의 영혼을 모시고 대초혼제를 집행하기로 결정하였다는데 또 이상 관제묘 안에 일대 강당을 건설하고 경신적 종교자와 및 기독가 등의 양성을 계획하고 일본학원 대학출신자로 하여 교육을 받기로 되어 이것도 또한 결정하였더라. 이 같이 하여 점차 각도에 교무청(敎務廳)을 설치하고 정식교화의 실적을 들기에 노력한다더라."


여기에 나오는 '천조대신' 즉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는 잘 알다시피 일본의 건국시조이다. 결국 일은 여기에 나온 기사대로 이뤄지지 않았지만, 중국의 관왕에다 우리의 단군까지 합사하려고 했던 것이었으니 까딱했더라면 동묘는 참으로 해괴한 국제적인 외교 무대(?)로 귀착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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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년전부터 문화유산답사와 문화재관련 자료의 발굴에 심취하여 왔던 바 이제는 이를 단순히 취미생활로만 삼아 머물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습니다. 알리고 싶은 얘기, 알려야 할 자료들이 자꾸자꾸 생겨납니다.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버린 얘기이고 그것들을 기억하는 이들도 이 세상에 거의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이에 관한 얘기들을 찾아내고 다듬고 엮어 독자들을 만나뵙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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