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으로서 죄송하고 부끄럽다. 개인의 권리가 침해당한 것을 구제해 주는 곳이 바로 법원인데 나고야 지방법원은 이 사명을 포기하고 말았다. 한일협정으로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다."
한일협정 문서공개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파문으로 한일과거사 문제가 새로운 논란이 되고 있는 가운데,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을 도와 온 일본 지원단체와 변호단이 지난 26일 광주를 방문했다.
'나고야 미쯔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회'와 소송 변호단 소속 회원 11명은 26일 저녁 7시 광주시 남구청 회의실에서, 이 소송 원고와 강제동원 피해자 등 7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지난달 24일 나고야 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재판 보고회를 개최했다.
일본 내 지원단체와 소송 변호단이 소송 준비차 한국을 방문한 사례는 있지만, 직접 한국으로 와서 재판 보고회를 갖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6년여 이어온 재판, 한일협정 이유 '기각' 판결
99년 3월 1일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회장 이금주) 소속 박혜옥씨 등 7명의 피해자들이 일본 나고야 지방법원에 제소한 '나고야 미쯔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손해배상 청구소송'은 지난달 24일 나고야 1심 재판에서 최종 '기각' 결정이 내려졌다. 65년 맺은 한일협정을 이유로 '개인 청구권이 소멸됐다'는 주장이다.
우치가와 요시카즈 변호단 단장(內河惠一·66)은 인사말에서 "나고야 지방법원의 기각 판결에 대해 일본인으로서 죄송하고 부끄럽다"며 "다만 원고들이 고령에도 불구하고 항소를 한 만큼 고등법원에서 꼭 승리하도록 힘내겠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한일간에 어려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이 문제 역시 중요한 문제중의 하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재판 상황을 설명 드리기 위해 하루라도 빨리 한국을 방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일본에 책임이 있지만, 한국에서도 힘을 실어주지 않으면 대단히 어려운 재판이다"며 이번 소송에 대한 한국 내 관심을 당부하기도 했다.
다카하시 마코도 지원회 회장(高橋信·62)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 나라는 잘못을 반복한다는 말이 있는데, 우리는 그런 나라의 사람이고 싶지 않다"며 "이번 소송은 원고의 한을 푸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찾는 귀중한 투쟁이다"고 말했다.
"기각 됐지만 이후 항소에 큰 발판 마련"
재판 상황에 대해 이와츠키 코오지 변호단 사무국장(岩月浩二)은 "기각 판결을 받았지만 우리가 싸움에서 진 것은 아니다"며 "재판과정에서 피해자들이 받은 상처와 고통에 공감하는 일본인이 많이 늘어났고, 이후 항소를 진행하는데도 큰 발판이 마련된 셈이다"고 말했다.
그는 "판결문을 보면 (나고야 지방법원은) 피해자들이 받은 사실을 모두 인정하면서도 한일협정을 이유로 정치적 판결을 내렸다"며 "이번 판결은 한일협정의 부조리를 더욱 확실하게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울러 "원고들이 모두 고령이어서 항소하는 것조차 큰 용기가 필요했다"며 "힘든 싸움이겠지만 한국민과 손잡고 꼭 이기고 싶다"고 말했다.
태평양전쟁 희생자 광주유족회는 이날 '한일양국 정부에 보내는 촉구문'에서 "일본은 한일협정으로 인해 책임이 끝났다고 기각판결을 내리려거든 당장 한일협정 문서를 공개해 정당한 근거를 대라"며 "당장 사죄와 합당한 배상을 실시하고 일본의 국민들도 알 수 있도록 한일협정문서를 일본 내에서도 당당히 공개하라"고 촉구했다.
이어 우리 정부에 대해서는 "피해자들이 죽어가는 만큼 한일협정 문서 모두를 완전히 공개하라"며 아울러 "과거사 청산과 관련해 일본과 즉시 교섭할 것"을 촉구했다. 3박 4일간의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한 소송 변호단은 27일 제주에서 설명회를 한 차례 더 갖고 28일 일본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 | '변호단'과 '지원회'는 어떤 곳? | | | 8년째 피해자 위해 무료변론·지원활동 펼쳐 | | | |
| | ▲ 다카하시 마코도 지원회 회장 | ⓒ이국언 | | '나고야 미쯔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 변호단은 34명의 양심적 변호사로 구성돼 있다. 또 1000여명의 지원단은 각종 활동을 통해 일본 정부를 압박하는 한편 일본 내 사회적 관심을 촉구하고 있다.
다카하시 마코도 지원회 회장(高橋信)은 역사교사로 재직 중이던 1986년 전쟁관련 조사 과정에서 처음 조선 여자근로정신대 사건을 접하게 됐다고 한다. 교직에서 세계사를 가르치던 그는 특히 44년 동남해 지진에서 소녀 6명이 사망하게 된 사실을 알면서 마치 자신의 학생들처럼 생각돼 이 일을 시작하게 됐다고 한다.
1988년에는 당시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일본으로 초청해 지진으로 희생된 장소에 6명의 위령비를 세우기도 했다.
그는 "그때부터 재판을 시작할 생각을 했지만 피해자들이 군 위안부로 오해 받을까봐 많이 두려워해 소송에 이르기까지는 많이 시간이 경과됐다"고 말했다. 소송 준비부터 일을 도맡은 지원회는 정식 소송이 시작된 99년 3월 발족, 8년째 활동중이다.
지원단은 매월 3천엔(한화 약 3만원) 가량의 회비를 자발적으로 납부, 변호활동을 돕고 있다. 소송 준비를 위해 매년 1∼2차례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심리 재판 차 수차례 일본을 방문했던 원고들의 체류비 일체를 지원하기도 했다. | | | | |
| | '나고야 미쯔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란? | | | "돈벌고 공부시켜 주마"... 군수업체에 강제 동원 '중노동' | | | |
| | ▲ 일제에 의해 정신대로 동원된 전라북도 여자근로정신대.(2003년 독립기념관·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특별기획전 사진자료) | ⓒ독립기념관 | '나고야 미쯔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란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전이 짙어지던 1944년 5월경 군용 경비행기를 제작하던 나고야 미쯔비시 중공업 군수공장에 조선 소녀들을 동원해 감금 속에 강제노동을 시킨 사건이다.
일본인 교장과 헌병들은 당시 초등학교 5, 6학년이던 12∼14세 소녀들을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학교에도 보내준다'고 이들을 속였다. 전남지역의 경우 광주, 나주, 여수, 순천, 목포 5개 초등학교에서 140여명의 소녀들이 강제 동원됐다.
피해자들은 당시 임금 한푼 없이 군용항공기를 생산하는 이 공장에서 배고픔에 허덕이며 하루 10시간씩의 중노동에 시달렸다. 오전 6시에 기상한 이들은 하루 1시간의 휴게시간만 주어진 혹독한 환경에서 오후 6시까지 강제 노동에 동원됐다. 13, 14살에 불과했던 이들 소녀들은 서신검열때문에 가족들한테 소식 한번 전하지 못하고 해방을 맞을때까지 홀로 그리움을 달래야 했다.
군 위안부 오인, 정상적 가정생활도 못 꾸려
특히 44년 12월에 발생한 도난카이(東南海) 지진 사건으로 최정례씨 등 당시 강제동원 조선인 소년 6명이 건물더미에 깔려 희생되기도 했다.
일본은 '급여는 저축했다가 나중에 조선에 돌아갈 때 지급하겠다'고 했지만 이 또한 지켜지지 않았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당한 상처와 한은 귀국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정조관념'을 중요시했던 당시의 시대상에서 이들을 군 위안부로 오해했던 것.
특히 혼령기를 맞은 피해자들은 '일본에 다녀왔다'는 이유로 오가던 혼담이 깨지기 일쑤였다. 비록 결혼에 성공했더라도 뒤늦게 남편이 이 사실을 들어 이혼을 요구해 오는 등 대부분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이루지 못했다.
피해자들은 모두 70대가 넘는 고령으로, 원고 7명 중 한 명은 6년여간 이어진 지리한 소송과정 중 사망하기도 했다. 남은 이들도 당시 고된 노동과 부상 등으로 지금껏 각종 질병을 앓고 있다.
한편 원고 7명은 1심 판결에 불복, 지난 7일 나고야 고등법원에 정식 항소했다. / 이국언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