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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근의 <번개를 치다>
정병근의 <번개를 치다> ⓒ 문학과지성사
인류를 둘러싼 환경의 두 축을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입장에서 두 가지 환경의 상호관계를 가늠해 보면, 인간 혹은 '인공적' 산물에 의한 자연의 정복이라는 결론이 어렵지 않게 나온다.

특히 서구에서 출발한 이분법적 세계관은 '자연'에 대한 두 가지 환상을 안겨 주었는데 그것은 '자연'이 정복의 대상임과 동시에 동화적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 대상이라는 두 겹의 환상이다.

현재 자연이 지닌 위상이 이러한 것이라면, 우리 인간에게 '자연'이란 어떤 대상인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한자어에서 유래한 '자연'을 분석하면 '스스로 자(自) 그러할 연(然)'으로 이루어진 말이다. (언어 유희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자연'이라는 말을 남용해 왔던 것은 아닐까.

최근 출간된 시인 정병근의 두번째 시집 <번개를 치다>는 우리에게 '과연 자연에 대한 성찰이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자연 앞에 선 '시인'이라는 그 독특한 개인의 자연에 대한 탐구는 어떠한가. 그러한 탐구의 출발과 여정, 그리고 시인이 판단한 '자연'의 참모습은 그의 시 '붉은 숲'에서 드러난다.

그 제목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그가 바라보는 자연, 혹은 그 다른 이름 '숲'은 '푸른 숲'이 아닌 '붉은'색을 띤 지극히 비정상적인 모습이다. '여름 숲 속에 혼자 있으면 / 무섭다'라고 고백하는 시인, 이것은 자연 속 '욕망의 촉수'에서 연유한 공포가 시인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는 곧 '숲의 魔手(마수)'에 잡혀 버리고 그것은 시인이 자연 속에 갇힘, 그 안에서 외부 세계와 차단됨을 의미한다.

나는 초록의 密使(밀사)가 되어 숲을 빠져나온다
여태 내 눈은, 붉음을 초록으로만 보는
지독한 색맹이었음을 알겠다
핏줄을 타고 한 몸 가득 번져오는
이 새빨간 초록

- <붉은 숲> 부분


이 시의 전체에서 시인이 '숲'으로 대변되는 자연을 대하면서 느끼는 감정의 유로는 '(자연에의) 공포→ 동화→ 공포의 잔존'의 도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위의 인용 부분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시인은 자연을 '새빨간 초록'으로 파악한다. 너무도 낯선 새빨간 초록. 시인이 <붉은 숲>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바는 무엇일까.

데리다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전통적인 이분법적 대립 개념들 사이에는 대등하고 평화로운 공존이 아니라 폭력적인 계급관계가 내재한다. 용어들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가치론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지배하고 명령하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대립 개념들 사이의 폭력적인 계급관계에 시인은 일차적으로 반발한다. 그래서 그에게 보이는 자연(숲)은 붉은 색을 띠고 있는 것이다. 그 '붉은 숲'을 통해 1차적으로 자연은 우리의 관념 속에 존재해 왔던 그 자연과 다른 것임을 인식시킨다.

우리의 관념 속에 존재해 왔던 자연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보자. 우선 일상 속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아파트 광고를 떠올려 보자. 광고 속에서 아파트는 푸른 잔디밭 혹은 (실제 아파트의 모습과 동떨어져 있어도 무관하다는 듯) 숲 속에 위치해 있다. 이처럼 자연은 대개 '평화'의 공간이었고 만물이 생성되는 '공간'을 의미했다.

바로 이러한 작업, 즉 '자연'과 같이 기성 언어가 갖는 고정관념의 울타리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 넣어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것을 현대시에서는 '데포르마시옹'이라 한다.

시인 정병근은 이러한 기법을 잘 활용해 시인만의 자연관을 구축해 간다. 그의 시 여러 편에서 '어디든 뻗어가는 / 위험한 채찍이다'(<덩굴의 路線>), '풀들은 더 사나워졌다'(<엉겅퀴>) 등과 같이 자연이 '평화'의 상징이 아닌 '폭력'의 상징으로 대두되는 것은 시인에 의해 창출된 '자연'의 새로운 의미이다.

육교 계단에 벌겋게 토해놓았다
출렁이던 고통이 割腹(할복)했다

코를 풀면서 치를 떨면서,
쏟아진 내장을 수습한 그가
어둠 속을 뚜벅뚜벅 걸어갔다

- <흔적> 부분


위의 시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그에게 고통은 근원적으로 죽음을 내재하고 있다. 그에게 죽음은 존재 그 자체의 의미를 지우는 하나의 연습이며, '잊혀짐' 혹은 '지워짐'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의 시에서 '죽음'은 곧장 왜 의미 없는 삶의 흔적을 남겨두어야 하는지 그 끈적거리는 인연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시인의 관심은 그의 시야 안에 펼쳐 있는 풍경과 그 많은 인연이 아닌 그 이면에 숨겨진 삶의 집착과 미련으로 향한다.

<머나먼 옛집> <빙하기의 추억> 등의 작품 제목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시인이 주목하는 것은 숨겨져 있는 삶의 집착과 미련이며 그 안에 존재하는 강한 '연민'이다.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이상향은 아마도 '명상의 세계'일 것인데 그 절대성의 세계가 가능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 절대성의 세계를 추구하는 마음은 그로 하여금 새로운 시 창작을 가능케 하는 힘이 되어주고 있으리라. 그 안에 서 있는 시인 정병근의 힘이 느껴진다.

번개를 치다

정병근 지음, 문학과지성사(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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