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가량 성차별·반(反)여성인권의 상징이던 호주제가 드디어 폐지됐다. 길게 보면 50년, 짧게 봐도 6년 만에 거둔 성과다. 여성운동 가운데 이처럼 긴 역사를 가지고 진력해 온 이슈도 드물다. 1953년 신민법 제정 당시부터 여성계 대표들의 문제제기가 있었지만, 1957년 12월에 제정되고 다음해 2월 공포된 신민법에는 호주제를 비롯한 남녀 성차별적 조항이 포함되었다.
그 후 1979년, 1989년 두 차례에 걸쳐 가족법이 개정돼 호주의 권리와 의무 조항이 대폭 삭제되고, 친족 범위는 부모 양계 각 8촌까지로 조정되는 등 개선은 되었지만, 핵심적 성차별 조항인 호주제는 최근까지도 그 존폐 논란이 지속되어 온 사항이다.
호주제, 무엇이 문제인가
1989년 2차 가족법 개정 이후 호주제 폐지 이슈는 한동안 수면으로 떠오르지 못하다가, 1997년 시작된 ‘부모성 함께 쓰기’ 운동을 통해 다시 촉발되었다. 이이효재, 조한혜정, 고은광순, 이유명호, 오한숙희…. 지금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이름이지만, 1997년 당시 저명인사 170명이 어머니 성을 붙여서 이름을 발표했을 때 우리 사회는 상상을 초월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아버지의 성과 본만 따르도록 한 것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자 시작된 이 운동은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문화적 충격이었지만, 호주제 폐지운동을 본격적으로 쟁점화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두 차례의 가족법 개정으로 이혼시 여성의 재산분할청구나 출가한 딸에 대한 상속권 등 경제적 부분에서의 성차별이 어느 정도 해소됐다. 호주의 실질적 권한도 상당히 약화됐다. 그러나 호주제의 핵심인 남성우선적 호주승계순위나 부가(夫家·父家)입적 조항, 부성강제 조항은 부계혈통주의를 확고히 유지하게 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남성 중심 문화를 강화하는 역할을 해왔다.
이 조항들에 따라 아버지인 호주가 사망하면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아들이 호주지위를 승계할 뿐 아니라 아버지와 동일한 책임과 권한을 갖고, 결혼한 어머니는 실질적으로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고 있더라도 호주승계 순위에서는 가장 마지막이 된다. 또한 결혼과 동시에 여성은 남편(또는 남편의 家)이 호주인 호적에 입적되어야 하므로 여성을 종속적 지위로 규정하고 있다.
무엇보다, OECD 국가 중 이혼율이 2위인 대한민국에서 이혼이나 재혼한 여성이 자녀와 함께 거주하며 부양을 책임지더라도 법적으로는 동거인밖에 될 수 없다. 따라서 점차 다양해지고 있는 가족 형태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한계를 그대로 갖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호주제는 국민 개개인이 가족을 구성하고 가족원의 지위를 정하는 데 있어 국가(법)가 강제적으로 남성에게 우선적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헌법이 정한 개인의 존엄과 남녀평등이라는 기본 가치를 위배했던 것이다.
호주제를 둘러싼 쟁점들
호주제는 폐지됐지만, 이로써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다. 호주제를 대체할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 내고 대안적 가족문화를 만들어 가는 미래지향적 태도가 뒤따라야 한다. 따라서 호주제 폐지 이후에 생겨날 여러 상황들을 우려하고 있다. 특히 호주를 없애고 개개인이 호주(기준인)가 되는 새로운 신분등록 방식이 ‘가족해체’를 부추긴다며 우려하고 있다. 호적은 출생과 혼인, 사망 등 신분 변동 사항을 기록하여 민법 관계를 규율하기 위한 것인데, 현행 호적이 가족단위로 되어 있다 보니 이를 족보나 가족기록부로 오해하여 생긴 문제다.
오히려 호주제가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지만 이혼이나 비혼, 무자녀 가족 등 ‘가족해체’- 엄밀히 보면 ‘가족형태의 변화’다 - 는 최근 들어 더욱 급증하고 있다. 따라서 가족해체의 가속화를 우려하는 주장은 가족 내 젠더 관계의 변화를 수용하지 못한 결과다. 호주에게 부과되는 일방적인 의무감이나 권위가 가족관계를 유지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또한 국회에서도 마지막까지 쟁점이 되었던 ‘성씨 변경’ 문제가 있다. 성씨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게 함으로써 수십 년 내에 가족끼리도 알아보지 못하는 사태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부성 강제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는 없다. 성씨를 바꾸기 위해서는 자녀의 복리를 위해 필요한 경우에 가정법원의 허가를 받아야 하므로 성을 함부로 바꿀 수 없다. 오히려 부성 강제 조항의 폐지는 가족 내에 다양한 성씨가 존재할 수 있다는 문화적 다양성을 수용하게 함으로써, 재혼가정의 자녀들이 주변의 시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새아버지의 성으로 바꿔야 하는 일을 줄일 수 있다
호주제가 우리 고유의 전통이므로 고수해야 한다는 입장도 최근까지 강하게 제기되었으나, 이는 여러 연구를 통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고, 헌법재판소가 호주제의 헌법불합치 결정문에서 지적했듯이 그 어떤 관습과 전통, 이념도 개인의 존엄과 양성평등의 가치를 침해할 수는 없다.
이번 호주제 폐지 결정으로 신분등록 형태가 크게 바뀐다. 우선, 호주와 호적이 사라진다. 이번에 개정된 민법은 2008년 1월부터 시행된다. 현행 호적법을 대신할 새로운 신분등록법을 만들고, 국민 개개인의 신분기록 및 공시 시스템을 만드는 데 필요한 시간이다. 호적은 새로운 신분등록부로 대체되고, 호주를 중심으로 나머지 가족을 기재하던 현행 호적과 달리 국민 개개인이 호주(기준인)가 된다. 즉 부, 모, 자녀가 각자 신분등록부를 갖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본인의 출생, 혼인, 입양 등의 신분 변동 사항과 부모, 배우자, 자녀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등 기본 인적사항이 기재된다.
호주제 폐지, 무엇이 달라지나
또한 여성들의 경우 혼인신고와 동시에 ‘호적을 파서’ 남자 집에 입적해야 했는데, 이제 ‘호적 팔’ 일이 사라진다. 단지 본인의 신분등록부에 혼인 사실이 기재될 뿐이다. 따라서 현재처럼 혼인, 이혼, 기타 이유로 호적을 이리저리 옮겨야 하는 불편이 사라진다. 아버지, 장남, 장손자 순서로 이어지던 호주 승계도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된다.
국민들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획기적 변화는 아무래도 자녀들이 어머니의 성을 따를 수 있다는 것이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성과 본을 따르는 것이 원칙이지만, 부부가 혼인신고할 때 협의하면 어머니의 성을 따를 수도 있다. 재혼한 가정의 아이도 가정법원의 허가를 받아 새아버지의 성을 따를 수 있다.
무엇보다 호주제 폐지는 호주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호적이 새로운 신분등록부로 대체되며, 자녀들이 어머니의 성씨도 따를 수 있다는 실질적인 변화를 넘어서서,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민주적이고 수평적인 공동체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중요한 출발선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호주를 없앤다는 것은 공동체의 중심을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하나였던 중심을 여러 개의 중심으로 전환한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담고 있다. 하나의 중심에 종속된 수동적 객체가 아니라, 구성원이 모두 주체가 되는 것이다. 개개인의 권리가 많아진 만큼 자기결정권에 대한 책임이 높아지고, 민주적 의사결정이 중요해진다. 이렇게 상대방의 생각을 존중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속에서 공동체 자체는 평등해지고 민주적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다. 어느 일방의 희생이나 성별 또는 연령 등으로 인한 차별이 점차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 사회에 요구되는 진정한 공동체적 가치이며, 이를 위해 가족 내 민주주의적·수평적 사고방식을 확산하고 수용할 수 있는 대안적 가족문화를 만드는 데 모든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 3월호(3월 26일 발행)에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