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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화이트, 젠트리 리 저/이순호 역
ⓒ 책과 함께
미래를 알고 싶어 하는 심리 때문일까? 연초부터 연말까지 미래를 예측한다는 책들이 갖가지 이유를 대며 사람들을 유혹한다. 연초에는 1년을, 연중에는 남은 기간을, 연말에는 다음 해를 알려주겠다는 식이다. 그것이 완벽하게 맞을 거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그런 책들이 계속 등장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들은 미래를 알고 싶어 혹시 하는 마음에 그 책들의 부름에 손짓하기 때문이다.

영국의 과학 저술가 마이클 화이트와 미 우주항공국의 연구원 젠트리 리가 공동으로 집필한 <가상역사 21세기>도 사전적인 도서 분류로 보면 미래를 알려준다는 ‘미래예측’도서다. 그런데 이 책은 섣불리 미래예측 도서로 평가할 수가 없다.

서술하는 방식이 파격적이기 때문일까? <가상역사 21세기>는 이제껏 등장했던 미래예측 도서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22세기에 21세기의 역사를 서술한다는 방식이 그것인데 그렇기에 책의 서술방식은 ‘역사서’와 흡사하다. 이것은 눈에 띄는 설정임에 분명하다.

이 책은 트렌드를 정해놓고 미래를 예측하거나 통계를 증거로 사회변화를 논하는 것보다 독자들이 더 쉽고,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독자들은 22세기에 살고 있다는 감정 속에서, 지금 국사책을 들여다보듯이 21세기를 다룬 ‘종합역사서’를 본다는 기분으로 보면 되는 것이다.

저자들이 그런 것을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가상역사 21세기>는 현재 한국에서 민감하게 작용하는 하고 ‘대 일본 정서’와 관련해 반갑게 여길 부분들이 있다. 21세기말에 ‘한국의 GNP와 생활수준이 일본을 추월’한다는 것이고 ‘중국의 새로운 지도자에 의해 일본이 전 세계 앞에서 민간인 학살과 전쟁의 책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다는 내용이 그렇다.

중국이나 한국 입장에서 보면 이런 내용은 반갑기 그지없다. 반면에 일본 입장에서 본다면 아니꼬울 수밖에 없다. 극동아시아 3국만 이렇게 희비가 교차할까? 이 책은 종합역사서이기에 선진국이 중심이 된다고 하지만 비교적 전 세계가 고루 등장하고 있다. 그렇기에 누군가에는 기쁨을, 누군가에는 분노를 줄 수 있는 내용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이쯤에서 그런 내용이 실제로 벌어질까 하는 논란이 벌어질 수 있다. 정말 한국이 일본을 추월할지, 시애틀에서 대지진이 벌어질지, 중국이 대만을 점령할지, 인도와 파키스탄이 핵전쟁을 벌일지 등등 <가상역사 21세기>에서 언급된 내용들의 가능성을 두고 이야기하는 데만 해도 족히 몇 달은 거릴 정도다. 미래예측 도서들에서 으레 발생하는 과정이다.

앞서 <가상역사 21세기>를 미래예측 도서로 평가하기 어렵다는 말을 했다. 사실 그것은 설정이 파격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또한 가능성을 추측하기 어려운 사건들을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가상역사 21세기>에서 이런 사건이 일어날지 말지는 무의미하다. 저자들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을 것이다. 노스트라다무스도 감히 밝히지 않았던 ‘지배자’들의 존재를 말한다는 것부터가 이미 미래예측 도서의 범위를 벗어나고 있다는 반증이다.

더군다나 시애틀에서 지진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도 사실가능성에서 추측하는 것이면 모를까 어느 때에 일어나고 피해액이 얼마나 될지를 말한다는 것이나 우주여행에 이르는 길, 인간복제에 대한 이야기 또한 ‘예측’이 아니라 ‘확신’으로 말하고 있다. 미래예측도서가 이런 입장을 취한다는 것은 속된 말로 ‘자살행위’다. 저자들 스스로의 명성을 깎아내리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한 것일까? 단순히 선정성으로 책을 팔아보려는 얄팍한 속셈일까? <가상역사 21세기>가 갖고 있는 내용의 충실함으로 볼 때 저자들이 그런 얄팍한 수를 썼다고 볼 수는 없다. ‘확신’의 문장들을 둔 것에 대해 그 이유를 역사서로 서술한 입장이라고 말하기에도 떨떠름한 감이 없지 않다.

무언가 이상하지 않은가? <가상역사 21세기>가 말하고 싶은 것은 액면 그대로 페이지에 나타난 것일까? 혹시 저자들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매력적인 사실들을 나열한 활자 뒤에 따로 숨겨져 있다는 것이 아닐까?

증명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증명되지 않은 말이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그것인데 이 말이 사실인지는 누구도 증명하지 못했지만 진실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사람도 없다. <가상역사 21세기>에도 이 말이 적용된다. 이 책에서 눈길을 끄는 ‘인도와 파키스탄이 핵전쟁을 벌인다’는 사실도 그렇다. 이 사실에서 찾을 수 있는 역사의 반복, 즉 활자의 ‘진실’은 ‘전쟁’이라는 역사다.

세계 2차 대전 막바지에 일본 영토에 떨어진 핵무기의 위력에 세계는 놀랐다. 그리고 두려워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두려움 속에서 세계는 핵무기를 보유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왔다. 핵무기뿐일까? 온갖 무기들도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세계는 보유하고 싶어 했고 누군가의 생각에 의해 사용되어졌다. 작품에서 핵전쟁 후의 참혹함을 생생하게 그린 ‘쿠마르 박사의 일기’는 전혀 낯선 것이 아니다.

전쟁만 그러할까? 인간의 실수는 계속되고 있다. 얼마 전 동남아시아에서 발생한 지진해일을 본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환경의 힘을 느꼈지만 또한 인간의 불감증이 어떤 사태를 초래하는지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과 몇 달이 지난 지금 불감증으로 잦은 사고가 일어나고 있다. 불감증에 의한 사고뿐 아니라 외국인 노동자를 배척하는 것, 아프리카에서 굶어죽는 아이들의 소식을 머나먼 별의 외계소식쯤으로 여기는 것도 이 책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가상역사 21세기>에서 희망이라는 단어를 집어삼키는 ‘절망’이라는 단어들은 지난 날 인류가 걸어왔던 길에서 발견되어졌던 것이다. 저자들이 종합역사서라고 불릴 정도로 문화, 정치, 사회 등의 여러 분야를 막론하고 방대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인류의 지난날을 체계적으로 분석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 책이 21세기 초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가상역사 21세기>는 사실 미래예측도서지만 진실은 그것이 아니다. 진실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책 속의 여러 메시지들을 종합해 볼 때 막연하게나마 그것을 추측해볼 수는 있다.

전쟁과 테러, 환경파괴, 안전 불감증, 이기주의 등 나쁘다고 생각하고 지양해야 한다고 외치지만 언제나 망각해서 소홀하게 대하는 그 파괴적인 것들을 다시금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눈을 저자들은 수차례에 걸쳐 반복해 말하고 있다.

또한 개인들의 ‘부익부빈익빈’을 넘어 절대적으로 등장하는 국가들의 ‘부익부빈익빈’까지 경계할 수 있는 눈도 그렇다. 지나칠 정도로 반복해 설명해 독자들로서는 한번, 때로는 그 이상으로 그것을 생각하게 된다.

<가상역사 21세기>에 등장하는 톰 호지슨이라는 열두 살 미국인은 “역사에서 내가 배운 게 있다면 옛날보다 세상이 무진장 좋아졌다는 것이다”라는 말을 한다. 이 말은 20세기를 바라보는 현재의 사람들도, 19세기를 바라보는 20세기의 사람들도 하는 말이다.

그런데 톰 호지슨이 심각하게 여기지 않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세계가 모두에게 공평하게 좋은 것을 제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 또한 21세기에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이미 우리는 그것을 오랜 역사에서 경험했다. 같은 시간에 누군가는 굶어죽고 누군가는 돈을 뿌리고 다니는 미래, 미래의 그것은 어제와 오늘날의 연속이다. 미래에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심각함에 가속도가 더 붙었다는 차이 정도일까?

저자들은 이 책을 품게 될 독자라는 존재, 오늘을 사는 인간 개개인의 눈에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주려 한다. 절망을 막을 수 있는 눈이다. 그리고 눈을 가지고 대비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메시지는 막연하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인간들이 오랫동안 반복해서 보여줬던 그 실수를 어떻게 한 명의 의지로 바꿀 수 있는가? 홀로 알고 있다고 해서 작품에서 예로 들었던 절망적인 것들을 어떻게 피해갈 수 있을까? 막연하게 여겨지는 것이 당연하다.

<가상역사 21세기>에서 등장하는 인물 중 랑거라는 부잣집 아들이 있다. 세계의 절망 따위는 모르고 지낸 인물이다. 그런 이를 함께하는 세계로 끌어들인 것은 루디라는 청년의 진심 어린 말이다. 루디 또한 가상의 인물로 작품에 등장한다. 그러나 저자들의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는 듯하다. 루디의 말이 <가상역사 21세기>에 담긴 눈을 설명하는 그 자체라고 봐도 무관할 것 같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힘도 없을까요? 정말 그럴까요? 상황을 변화시킬 능력이 없다고 회의에 빠질 때마다 나는 20세기의 위대한 과학자 마거린 미드가 한 말을 상기합니다. ‘소수의 헌신적인 사람들이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결코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세상을 바꾼 것은 그들이었어요.” <본문, 루디의 말 中>

<가상역사 21세기>는 흥미롭다. 유용한 정보다 지식을 얻기 위해서나 미래를 엿보기 위해서 볼 수 있고 흥미로운 설정 그 자체에 끌릴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이 책에서 비중 있게 다루어지지만 진실한 목소리를 담고 있지 않다. 진실한 목소리는 21세기에 발을 내민 사람들의 변화를 향한 울림에 담겨 있다.

과거의 우를 범하지 않고, 제대로 된 희망을 만들어가자는 것, 그 시작이 바로 당신에게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가상역사 21세기>가 주는 진실한 울림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도서정보 사이트 '리더스가이드(http://www.readersguide.co.kr)'에도 실렸습니다.


가상역사 21세기

마이클 화이트.젠트리 리 지음, 이순호 옮김, 책과함께(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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