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명의 친구가 있다. 예술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잘나가는 피부과 의사 수현. 예술과 우정에 대해 냉철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 다혈질 대학 교수 규태. 그리고 좀 헐렁한,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생각으로 사는 우유부단한 친구 덕수.
이 이야기는 수현이 1억8천만원짜리 그림을 한 점 사면서 시작된다. 수현이 산 그림은 하얀 바탕에 하얀 선이 그어져 있는 작품. 수현이 보기에 이 그림은 철저한 모더니즘의 상징이다. 관객의 상상력으로 무엇이든 볼 수 있게 된 이 그림은 어떤 날은 밝은 옐로우를, 어떤 날은 정열적인 레드를 나타내며 자유와 무한한 상상력을 표현한다.
규태가 보기엔 이 그림은 단지 하얀 ‘판때기’다. 수현은 미친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얀 ‘판때기’를 1억8천이나 주고 살 수는 없다. 잘나가는 피부과의사로 수입이 좋긴 하지만 떼부자는 아닌 수현은 정말 오버한 거다.
수현은 단지 자기가 1억8천만원짜리 그림을 샀기 때문에 상류계층이 되었다고 착각하고 있다. 수현은 점점 이상하게 변하고 있다. 잘난 예술을 한다면서 다른 사람들을 점점 깔보고 자기만 잘난 줄 안다. 친구로서 이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다.
한숨을 푹푹 쉬며 다시마 홍삼정을 꾹꾹 씹으며 규태가 찾아간 곳은 덕수의 집. 규태는 입에 거품을 물고 수현이 아무 것도 없는 하얀 판때기를 1억8천에 샀다며 분개한다. 덕수는 작가가 누구냐고 물어보고, 유명하냐고 물어본다.
“수현이 좋다면야 괜찮지 않겠어? 돈도 많은데 뭐.”
“그 그림은 너희 집 전세값 보다 비싸. 너 같으면 그 그림을 얼마에 사겠냐?”
“나 같으면…, 안사지!”
수현을 찾아간 덕수. 그림을 본다.
“오오~~ 이 그림이 1억8천?”
“이 각도에서 보면 말야~~어쩌구 저쩌구~ 멋지지 않냐?”
“오오, 뭔가 느껴져.”
@IMG3@ 덕수의 결혼을 앞두고 함께 만나기로 한 세 사람. 덕수는 약속 시간을 넘겼는데도 나타나지 않고, 수현은 규태에게 덕수가 그림을 맘에 들어 하더라고 말하고, 규태는 아니라고 말한다. 우유부단한 덕수는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 박쥐로 낙인찍히고, 두 사람의 언쟁은 점점 심해진다. 단지 그림의 문제가 아니다. 수현은 규태가 잘난 척하고 아무 것도 모르면서 깔아뭉개길 좋아한다고 비난하고, 규태는 수현을 비웃는다. 그리고 둘은 우유부단한 덕수를 비웃는다.
마침 옆에서 둘을 말리기를 포기하고 술을 들이붓던 덕수가 그깟 하얀 판때기 때문에 이게 뭐냐고 말하자 그 말에 흥분한 수현은 매직으로 그림을 망치려고 한다. 덕수와 규태가 말리지만 수현은 규태에게 매직을 건네고 덕수는 1억8천짜리 그림 위에 스키 타는 사람을 그린다.
규태는 자신이 그림을 그려놓고도 어쩔 줄 몰라 하고 수현은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이들을 이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들은 오랜만에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저녁식사를 한다.
‘하얀 하늘에서 하얀 눈이 오고 땅도 하얘졌다. 하얀 세상에 스키 타는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는 스키를 타고 점점점 멀어져 간다.’
결국 1억8천만원짜리 하얀 판때기에 그려진 세상에서 하나뿐인 규태의 <스키타는 남자>는 규태의 부인이 추천한 홈쇼핑에서 2만9800원에 판매하는 매직블록으로 감쪽같이 지워졌고 이 사건으로 세 남자의 우정에 간 금도 말끔히 지워졌다.
세 명의 친구는 세상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우리의 친구들을 상징한다. 겉으로는 티격태격하고 다툴 수도 있지만 억대를 넘는 그림과도 바꿀 수 있는 우정 말이다.
그리고 우정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 줄 때 비로소 빛나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동숭아트센터 소극장, 2005. 3. 17 ~ Open Run(종영 날짜를 정하지 않고 매출이 일정액을 밑돌면 막을 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