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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림 ⓒ 강우근
송금 처리를 마친 직원은 내게 전표를 준 다음, 다른 쪽에 앉은 직원에게 내 통장을 넘겨 주며 처리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쪽 창구 앞에는 다른 남자 손님이 앉아 있었다. 그 남자 뒤에서 기다리려고 하는데 동료 직원에게서 내 통장을 건네받은 담당자는 서류 작성 용지를 꺼내며 내게 말했다.

“잠깐 거기 앉으세요.”

창구 앞에 앉아 있던 남자가 조금 옆으로 비켜 내가 앉을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남자에게 목례를 보내고 그 옆의 의자를 끌어당겨 창구 앞에 앉았다. 그 남자가 비키는 것도, 창구담당 직원이 내 서류를 먼저 집어 드는 것도 너무 자연스러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나 때문에 옆으로 물러난 남자를 보며 창구 담당자가 처리한 서류를 뒤쪽에 앉은 상사가 결재처리하는 중이고 그래서 기다리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나의 새 계좌 개설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직원은 새 통장과 도장, 주민등록증을 창구 밖으로 밀어 주고 잠깐만요, 하더니 안쪽으로 가서 포장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비누예요. 저희가 마련한 작은 선물이에요.”

통장을 새로 만든 사람에게 주는 선물인 듯했다. 큰 돈도 아니었는데, 시골 은행이라 역시 단위가 다른가 보다 싶어 속으로 웃었다. 값나가는 물건은 아니지만, 뜻밖의 선물을 받는 건 역시 기분 좋은 일이었다. 나도 환히 미소지으며 받았다.

“고맙습니다. 잘 쓸게요.”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직원은 내 새 통장을 만드는 데 쓰였던 서류들을 치우더니 그 옆의 서류를 끌어당겼다. 대출 신청 서류였다. 그러자 내 옆에 있던 남자가 창구로 바싹 다가앉았다. 맙소사, 그 창구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 남자, 은행에 돈을 빌리러 온 사내의 서류는 결재 처리 중이었던 게 아니다. 돈을 빌리러 온 그는 은행에 돈을 넣으러 온 내가 끼어드는 바람에 자기 차례를 내주고 밀려나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그걸 깨닫는 순간 머릿속이 잠깐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그 남자에 대한 미안함, 직원 또는 은행의 시스템에 대한 분노, 그토록 둔감했던 나 자신에 대한 경멸 같은 것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나는 무심하게 일하고 있는 창구 담당 직원의 단정한 정수리를 쏘아보았다. 그녀가 내게 보여 주었던 미소와 친절이 그렇게 싫을 수 없었다.

그대로 은행을 나설 수가 없어서 일단 은행에 비치된 의자에 앉았다. 왜 순서를 바꿨냐고, 기다리는 손님이 있었으면 그 사람 거 먼저 처리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따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그런데도 나는 창구로 다가가지 못하고 앉아 있었다. 이미 특혜를 받은 내가, 일이 다 끝난 시점에서 따지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내 일이 신속히 처리되는 동안 옆으로 비켜서 기다려야 했던 사내의 마음을 더 다치게 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없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선뜻 일어서지 못한 것은, 사내가 일을 마치고 간 뒤에라도 그 직원에게 묻고 싶은 마음을 거둬내지 못해서였다. 왜 그래야 했냐고, 돈을 대출하러 온 사람은 무시해도 되냐고, 대출금에서 꼬박꼬박 이자를 받아 챙기는 은행이 손님을 그런 식으로 대접해야 하느냐고.

그러나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은행에서 나왔다. 행색조차 초라한 사내의 뒷모습에 눈길을 주며 기다리는 동안 노여움은 슬픔으로 변해 버려, 처음의 그 앙칼진 기운이 스러지고 말았다. 설사 내가 항의하고 직원의 사과를 받아낸다 한들 무엇 하겠는가. 그런다고 은행 직원들의 행태가 달라지지도 않을 텐데. 기다림이 권력과 반비례한다는 걸 안 게 어제오늘 일도 아니면서 무슨… 하는 체념 때문이었다.

그냥 물러났던 남자에게 묻고 싶기도 했다. 왜 순순히 비켜 주었느냐고, 자기 권리를 왜 주장하지 못하느냐고. 그러나 내겐 그런 잔인한 질문을 던질 자격이 없었다. 내가 그 남자의 입장이었을 때 나 또한 그러지 않았으리란 보장이 없었으니.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 3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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