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내 일생은 비록 추웠으나" 백매와 홍매
"내 일생은 비록 추웠으나" 백매와 홍매 ⓒ 안병기
고등학교 시절 국어책에서 육사의 시 <광야>를 읽은 후 부터 내게 매화 향기는 아득한 향기였다. 가까이서 스미듯 다가오는 향기가 아니라 멀리서 근엄하게 불어오는 향기였다. 梅一生寒不賣香이라, 한고(寒苦)를 맛보지 않으면 결코 맑은 향을 발할 수 없다는 말은 일생을 두고 내 마음을 눌러온 빙설같이 차가운 비유였다.

시간이 주는 온갖 풍상을 겪은 내 머리칼은 이제 저 백매처럼 하얗게 쇠어버렸다. 그러나 내 영혼의 나무에는 아직도 꽃이 피지 않았다. 아무런 향기도 날리지 않는다.

꽃은 왜 가지에서 필까. 왜 꼭 극단에서만 피는 걸까. 온힘으로 밀어붙이지 않으면 꽃을 피울 수 없다는 것을 식물들은 보여준다. 그것은 식물의 이치이기도 하지만 사람의 이치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저 매화 향기는 매화 자신의 일생의 기록이다. 나는 지금 매화 향기를 맡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매화의 일생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형님 먼저, 아니 제가 먼저". 미선나무. 대전 한밭박물관 뜰에서
"형님 먼저, 아니 제가 먼저". 미선나무. 대전 한밭박물관 뜰에서 ⓒ 안병기
미선나무는 개나리와 같이 물푸레나뭇과에 속하는 나무다. 열매의 모양이 부채를 닮았다고 해서 꼬리 미(尾)자 부채 선(扇)자를 써서 미선나무라 부른다. 꽃색이 살짝 분홍이면 분홍미선, 상아색이면 상아미선, 꽃받침이 푸른색이면 푸른미선이다.

미선나무는 세계적으로 딱 한 종 밖에 없는 나무다. 오로지 우리나라에서만, 그것도 충북 괴산에서만 자생하는 희귀종이다.

개나리와는 과만 같은 게 아니라 생김새도 흡사하다. 그러나 두 나무는 동시에 개화하지 않는다. 미선나무가 반칙을 서두르기 때문이다. 개나리가 피기 전에 먼저 피어버린다. 잎이 피기도 전에 꽃이 저 홀로 피어난다.

개성이란 희귀성이다. 그 개성이란 어쩌면 자기만이 다르다는 지독한 편견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미선나무 꽃이, 꽃이 가진 그 희귀성이 모든 이파리는 게으르다는 편견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를 희망한다.

"내 색깔이 촌스럽다고요?" 개나리
"내 색깔이 촌스럽다고요?" 개나리 ⓒ 안병기
옛 선비들은 모든 꽃에 일품에서 구품까지 화품을 매겼다. 그러나 개나리는 구품에조차 끼지 못한 품위 없는 꽃이었다. 매화처럼 추위 속에서 피어나는 꿋꿋함과 지조를 지닌 것만이 꽃이라는 경직성에 사로잡혔던 선비들이 바람만 조금 불어도 함께 흔들릴 줄 아는 개나리의 유연성을, 그 현실성을 감히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개나리가 품고 있는 노란색은 소박한 것인가, 아니면 촌스러운 것인가. 소박함과 촌스러움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젊었을 때 나는 개나리가 가진 노란색이 초라한 것이라고 단정했었다.

지금의 나는 개나리가 가진 노란색을 소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이 든다는 것은 이렇게 감수성마저 유연하게 변화시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옥매화야, 나비가 너더러 무어라 속삭이더냐" 옥매화
"옥매화야, 나비가 너더러 무어라 속삭이더냐" 옥매화 ⓒ 안병기
노란색은 그 소박한 색감이 바라보는 사람과의 사이에 은근히 친밀감을 느끼게 해준다. 산수유 꽃, 생강나무 꽃, 개나리 꽃. 봄철이면 가장 먼저 피어나는 꽃들이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제멋대로 피어나는 모양이 민중의 품성을 닮은 듯하다.

‘옥매화야, 호접이 너더러 무어라 속삭이더냐’. 몇 년 전 팔순을 훌쩍 넘긴 송철봉 할머니가 낸 시집 <님은 가시고 꽃은 지고>라는 제목의 시집에 든 시의 한 구절이다.

할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나버린 말 붙여 줄 사람 없는 할머니는 말 붙여 줄 호접이 있는 옥매화를 부러워한다. 나는 아까 노란색을 소박하다고 했다. 소박하다는 뜻이 애틋하다는 뜻의 변형일 때가 종종 있다. 할머니의 소박한 망부가가 마음을 애처롭게 한다.

"꽃이 예뻐요?  제가 예뻐요?"  움트고 있는 모란의 싹
"꽃이 예뻐요? 제가 예뻐요?" 움트고 있는 모란의 싹 ⓒ 안병기
많은 사람들이 애송하는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는 자신이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그'가 자신이 그의 이름을 불러주자 비로소 꽃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누군가 자신을 불러준다면 자신도 '그'에게 가서 꽃이 되고 싶다고 희망한다. 그렇게 서로에게 잊히지 않는 눈짓이, 의미가 되고 싶다고 한다.

꽃은 내가 불러주던, 불러주지 않던, 여기에 서 있던 저기에 서 있던 변함없이 꽃이라는 존재 그대로 이다. 그것이 꽃이 가진 존재의 개별성이자 각자성이다. 내가 불러주었을 때만 비로소 꽃이 된다는 말 속엔 혹 소유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규보가 쓴 '절화행(折花行)'이란 한시에는 꽃을 꺾어들고 가던 미인이 낭군에게 "꽃이 예뻐요? 제가 예뻐요?" 라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장난기 많은 낭군이 "꽃이 당신 보다 예쁘다"고 대답하자 미인은 "꽃이 저보다 더 예쁘시거든/ 오늘밤은 꽃하고 주무세요." 라고 토라져버린다.

따지고 보면 꽃이라는 건 식물이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표현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소유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여자는 꽃을 꺾는다. 자신의 소유욕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식물의 욕망을 좌절시킨다.

여자는 꽃이 토라지는 것 따윈 안중에 두지 않는다. 제가 더 예쁘게 보이면 그만일 뿐. 모란의 가지에서 돋아난 싹은 그저 더디 오는 봄을 기다릴 뿐 내색하지 않는다.

"나도 한 때 목련꽃 그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었노라" 목련꽃
"나도 한 때 목련꽃 그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었노라" 목련꽃 ⓒ 안병기
4월이었다. 이층 교실 창문에 기대어 바라본 오래된 교정에서는 목련꽃이 한창 피어나고 있었다. 사춘기를 앓던 꽃 한 송이가 가늘게 떨고 있었다. 나의 로테. 이 순간 그대의 꽃송이도 저 꽃송이처럼 떨고 있을까. 그때 나는 감정의 동시성과 시간의 동시성을 함께 추구하고 있었다.

열정이라는 감정처럼 결함이 많은 감정이 또 있을까. 열정을 지배하는 것은 냉정이다. 냉정이라는 차가운 음식 속에는 이미 운명이라는 소스가 넣어져 있다는 것을 나이어린 소년이 알 리 없었다.

다시 4월이 오고 목련이 피었다. 그러나 오늘 내가 마주보고 있는 냉정이라는 음식에는 현실이라는 소스가 첨가돼 있다. 걱정하지 마라, 난 안 아프다. 아프지 않다.

'산가시내 사랑 다 보았으리' 원추리
'산가시내 사랑 다 보았으리' 원추리 ⓒ 안병기
원제가 '꽃대가리'인 신동엽 시인의 시 '원추리'를 읽으면 토장국 냄새가 풍긴다. 봄이 되면 산자락 마다 원추리가 지척으로 돋아난다. 고사리 보다 일찍 돋고, 취나물보다도 더 빨리 돋는다. 그것을 조심스럽게 뜯어다 달래를 넣고 된장국을 끓여 먹곤 했다.

신동엽 시인은 '원추리'라는 시에서 원추리가 "산 가시내/ 사랑, 다/ 보았으리.'라고 추측한다. 가장 먼저 돋아난 원추리가 나물 캐러 다니던 처녀의 행각을 오랫동안 지켜보았으리라는 추측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원추리는 원추리 훤(훤)자를 써서 훤초(헌초)라고 부른다. 옛 선비들은 벗의 어머니를 부를 때 훤당이라 불렀다. 어머니가 거처하는 뜰에 원추리를 심어 즐겁게 해드렸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원추리는 달리 망우초라고도 부른다.

왜 원추리를 심으면 어머니가 즐거워했을까. 왜 원추리를 망우초라 불렀던 것일까. 춘궁기의 어머니에게 있어 원추리는 반찬 걱정을 덜어드리는 나물이기 때문이 아닐까.

머위야, 나도 다리 좀 뻗고 살자" 돌나물
머위야, 나도 다리 좀 뻗고 살자" 돌나물 ⓒ 안병기
돌나물이나 머위나 다 텃밭에서 자라는 채소들이다. 둘 다 번식력이 좋아 공간만 있으면 사정없이 번져나간다. 그러나 머위의 덩치와 돌나물의 덩치는 하늘과 땅이다. 콩알이 백 번 구른들 호박이 한 번 구르느니만 할까.

머위의 등쌀에 생존의 위기를 느낀 돌나물은 통사정을 한다. "머위야, 나도 다리 좀 뻗고 살자". 돌나물의 눈물어린 공존을 위한 제안에 머위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아직까지 아려진 바 없다.

돌나물 무쳐놓고 어머니 기다리네
유리창에 빗물 어리우니 없던 흔적 생기네
어머니 왔다 그냥 가신 듯 슬퍼지네
참기름은 미리 넣지 말렴
돌나물 간 맞추고 참기름 살짝 버무리니
흐득흐득 빗줄기 굵어지네
어머니 안 오시고 봄날은 가네
봄날은 가고 어머니 향기 가득 남네

김혜옥 시 '봄날은 가고 향기는 남네' 전문


김혜옥 시 '봄날은 가고 향기는 남네'를 읽는 시간엔 마음속으로 그리움 하나가 저벅저벅 걸어들어 온다. 언젠가도 썼지만, 세상의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결국 한 그릇의 음식으로 남는다.

시인의 추억은 구체적이다. 추억 속에서도 어머니는 딸에게 조리법을 가르친다. "얘야, 참기름은 미리 넣지 말렴". 봄날은 가지만 어머니의 향기는 그렇게 남는다. 오늘 아침엔 이 시의 한 장면처럼 비가 내렸다. 봄날엔 이렇게 음식 하나에도 아픔이 돋는 때가 있다.

"사는 일은 산수유꽃빛 만큼 아득했노라" 산수유
"사는 일은 산수유꽃빛 만큼 아득했노라" 산수유 ⓒ 안병기
붉은 열매를 가진 나무들은 상처가 숨겨져 있다. 신용목 시 '산수유꽃'은 내 삶의 흉터를 들여다보게 한다. 시인은 "나는 천한 만큼 흉터를 늘리며 왔고 데인 데마다 산수유 한 그루씩이 자랐다'고 지난 세월을 회상한다.

노란색은 본디 현기증 나는 이다. 영양실조의 색이며 빈혈의 색이다. 아득한 삶을 견뎌낸 산수유는 가을이 오면 빨간 열매를 주렁주렁 달게 된다.

산수유 열매를 우려낸 차는 약간 신맛도 나고 떫은맛도 난다. 내 삶의 상처에서는 신맛이 날까, 떫은맛이 날까. 시인의 표현대로 '사는 일은 산수유꽃빛처럼 아득한 일'이다.

그러나 낙망하지 마라. 산수유꽃빛 만큼 아름다운 꽃이 어디 있는가. 아득하다는 것은 사무치다는 뜻이다. 사무치는 사랑일수록 아득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사는 일이 아득하게 느껴질 때야말로 삶이 가장 절실할 때가 아닌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