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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오. 우리가 죽인 청나라 병사들이 족히 백 명이 넘고 들고 가기 벅찰 정도로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왔는데도 수급하나 없다는 이유로 과장된 말들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다니.”
한기원은 기막혀 하며 장판수에게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공을 몰라주어 야속하기는 장판수도 마찬가지였으나 곁으로는 이럴 줄 알았다는 투로 답할 뿐이었다.
“너무 마음에 담지 말어. 우리 팔자래 원래 기런긴데 잘 싸웠으면 된 거 아니갔어? 기건 기렇고 충청도에서 원병이 왔다고 하는데 왜 협조해서 적을 치지 않는기야?”
암울했던 남한산성에도 한 줄기 희망의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다. 처음으로 충청병사가 병사들을 거느리고 도착했다는 소식을 화전(火箭)으로 알려온 터였다.
“그렇소. 이렇게 포위된 성에 앉아서 시간만 끌고 있으면 아니되오. 오랑캐들이 잠시 지구전(持久戰)을 벌이는 것은 필시 원병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인데, 우리의 원병이 오지 않고 저들의 원병이 먼저 이르게 되면 더욱 어떻게 할 수 없소. 한 쪽 문으로 군사를 내보내 싸움을 독려한다면 충분히 해볼 만 하오.”
한기원의 말에 장판수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바로 그거야. 기런데 왕이고 대신들이고 그저 여기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것 같이 보이니 참......”
남한산성에서 왕과 대신들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동안 성 밖을 나간 두청과 서흔남은 각기 길을 나누어 두청은 북으로, 서흔남은 남으로 향했다.
‘참 인연이 기묘하이.’
전라도로 향하는 서흔남은 12년 전, 조선역사상 반란군으로서는 처음으로 도성에 난입한 이괄의 일을 떠올렸다. 그 당시 서흔남은 아무것도 모르는 20세의 새파란 풋내기 포수일 뿐이었다. 도성에 들어선 이괄의 수장들은 쓸 만한 이들을 자신의 휘하에 편입하려 했고, 서흔남은 아무런 사정도 모른 채 무작정 그들을 따라나서게 되었다. 서흔남은 전투에 나서기도 전에 이괄의 군대가 한양 인근에서 크게 패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여기 있으면 역적으로 몰려 목이 떨어질 수밖에 없네. 어서 떠나야 하네.”
서흔남은 이괄의 패잔병들에게 내몰리다시피해서 한양 인근의 광주로 떠나게 되었다. 도중에 이괄의 패잔병들은 변변한 호위조차 없는 광주목사 임회를 사로잡았고, 당시에는 터만 앙상하게 있던 남한산성에 몸을 숨기게 되었다.
“네 이놈들! 어서 나를 죽이거라!”
임회는 절대 반란군에게 굽힐 수 없다며 호통을 치곤했다. 이름을 알 수 없었던 늙수그레한 서흔남의 상관은 임회를 다독이며 설득했지만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았다. 막상 이괄은 길을 나누어 이천으로 달아난 터라 패잔병들 사이에서는 임회를 앞세워 못이기는 척 항복하리라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이보게 서두령.”
늙수그레한 상관은 얼마 남지 않은 이괄 부대 포수의 대장이 된 서흔남을 서두령으로 불렀고 서흔남은 그 말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대는 이미 역적이 된 것이네. 역적의 굴레를 벗으려면 어찌해야겠나? 이 싸움에서 이겨야 하네.”
서흔남은 그 말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어찌 해야 좋을지 판단이 서지 않을 따름이었다. 그날, 임회가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서흔남은 들이닥친 관군에 사로잡힌 후 다른 포수들과 함께 남한산성을 쌓는 노역을 짊어지게 되었다.
‘그때의 일을 후회하지 않게끔 하겠다......’
서흔남은 두청이 이괄의 난에 가담한 인물 중 하나라는 사실만 짐작할 뿐 정확히 그 속을 알 수 없었다. 서흔남은 글을 읽을 줄 몰라 두청이 뒤바꿔 준 장계에 무슨 말이 적혀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서흔남이 믿는 것은 두청의 말대로 한다면 청나라 오랑캐들은 물러날 것이고, 서흔남에게는 그간의 고생을 인정하여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준다는 것 뿐이었다.
“지금 조선의 운명은 우리 손아귀에 들어가 있네.”
서흔남은 두청의 말을 떠올리며 남쪽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더욱더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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