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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묵은 민박집 옥상 한쪽 모서리에 만들어 놓은 널마루. 전망대 겸 휴식처. 창 없는 창으로 지천에 피어 있는 산수유가 보인다.
하루 묵은 민박집 옥상 한쪽 모서리에 만들어 놓은 널마루. 전망대 겸 휴식처. 창 없는 창으로 지천에 피어 있는 산수유가 보인다. ⓒ 박태신
산수유 나무는 지리산 한자락에 자리잡은 이곳 구례 산동면 지천에 심어져 있습니다. 산수유 열매가 솔솔한 이익을 가져다 주기도 해서 그렇지만 봄을 여는 이 연노란 꽃때문만이라도 심을 만한 가치가 충분합니다.

산수유 꽃은 마치 노란색의 함박눈 같습니다. 또렷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강한 빛깔도 아니고 자잘한 꽃잎들이 가지 전체에 골고루 피어 있기 때문인데, 마치 막 내리기 시작하는 함박눈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한밤중 고개를 젖혀 함박눈 내리는 것을 보면 그 가벼움과 느림, 여유로움과 연약함 때문에 황홀해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산수유 꽃은 그런 이미지가 고정된 상으로 박혀 있는 것 같습니다.

차량이 뜸한 도로의 가로수로서, 집 뒤뜰 정원수로서, 마을 들판과 논밭 옆 빈자리를 채우는 조경수로서, 산야 밑 조림수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봄을 여는 꽃으로서 너무 강한 색과 향은 주위를 놀라게 할까봐 옅은 노란색으로 조심스레 핍니다. 벚꽃의 흰색, 매화의 홍색도 그러합니다. 이제 봄이 여름을 불러들일 때쯤이면 강렬한 진분홍과 붉은색의 철쭉, 강한 향기의 라일락이 제 자태를 뽐낼 것입니다.

옥상에 만들어 놓은 황토방 중 하나. 독립된 집을 들어서는 느낌이 들게 방마다 전통 양식의 미닫이문을 달아 놓았다. 왼쪽의 개수대 창, 오른쪽의 화장실 창, 방안의 창이 전부 다른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옥상에 만들어 놓은 황토방 중 하나. 독립된 집을 들어서는 느낌이 들게 방마다 전통 양식의 미닫이문을 달아 놓았다. 왼쪽의 개수대 창, 오른쪽의 화장실 창, 방안의 창이 전부 다른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 박태신
산동면 반곡 마을, 하위 마을을 지나 상위 마을로 올라갑니다. 산동면 입구에 대단위 온천이 지어져 있지만 이런 북적대는 곳을 지나 작은 다리를 건너 조금만 걸어올라가면 도시화와 거리가 먼 한적한 시골길이 되고 이곳에서부터 산수유 나들이가 시작됩니다.

식목일을 앞둔 토요일, 나중에 알았지만 사실은 지난주까지 산수유 축제가 있어 관광객들이 많았고 지금은 산수유가 끝물인 때라 한적했던 것입니다. 걸어서 여행온 사람은 저 밖에 없는 듯 했습니다. 덕분에 무척 행복하게 산수유 길을 걸어올라갑니다. 혼자 누리기에 황송할 지경입니다. 관광이 아닌 여행의 묘미를 체험하는 순간입니다.

해가 지려고 할 무렵 뒤안으로 펼쳐지는 저녁하늘도 봅니다. 몇 년 전 여름 휴가 때 올랐던 청량산 차길도 이랬습니다. 인적도 차도 거의 끊긴 곳을 달빛에 의지하여 올랐습니다. 반딧불이가 출물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적막과 고적의 시간, 오히려 안락함마저 드는 이런 시간을 또 경험하고 싶군요,

걷다가 아담한 민박집 하나를 발견합니다. 보통의 양옥집 옥상에 한옥방을 올렸습니다. 넓은 옥상에 방이 서너 개 만들어져 있는데 상호를 보니 황토방 민박집이라 되어 있습니다. 가만히 살펴보고 눈에 찍어 둡니다.

계속 걸어가 상위 마을로 올라갑니다. 산수유 나무가 가장 많이 심어진 상위 마을 주변에는 민박집이 많아 이곳이 최종점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위는 점점 더 어두워집니다. 아까 찍어둔 민박집에 전화를 걸어 방을 예약합니다.

지금도 이 오래된 텔레비전 수상기가 그대로 있을지. 먼 과거의 영상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 이 방에서 산수유 같은 노란 잠을 잤다.
지금도 이 오래된 텔레비전 수상기가 그대로 있을지. 먼 과거의 영상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 이 방에서 산수유 같은 노란 잠을 잤다. ⓒ 박태신
민박집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정갈하게 지어진 황토방을 전통 여닫이 문으로 들어갑니다. 예전 같으면 농기구를 두는 솟을대문 밑 공간이라고 할 만한 곳에 개수대와 화장실이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한지를 바른 방문이 있습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천장에 서까래와 대들보가 훤히 드러납니다. 창은 한지 창살입니다. 여기에 노란 산수유 닮은 연노란 커튼을 달았습니다. 벽은 벽지 없이 황토가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바닥에는 돗자리를 깔았습니다. 예전 서민들의 한옥이 이랬나 생각하니 정겹습니다.

한쪽 모퉁이에는 삼각 받침대 위로 오래된 텔레비전이 놓여져 있습니다. 다이얼을 돌려 채널을 찾는,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수상기입니다(슬프게도 아니 다행스럽게도 다이얼을 아무리 돌려도 한 채널 밖에 그것도 아주 거칠게 나와 한숨을 쉬고 스위치를 내리고 마는 그런 텔레비전이었습니다).

덕분에 고즈넉한 시간을 더 보낼 수 있었습니다. 가게에서 사온 소주를 한두 잔 먹는 둥 마는 둥 합니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때라 이불을 꼭꼭 덮고 잡니다. 누런 황토 속에서 노란 빛깔을 대기 삼아, 정적을 자장가 삼아 잡이 듭니다. 꿈기운도 동색(同色)으로 물듭니다

창호문을 열고 아침 기운을 받는다. 문을 잡아 당겨 잠그면 시원찮은 방풍 효과 덕분에 틈 사이로 노란 봄기운들이 들어와 한참을 머물다 간다.
창호문을 열고 아침 기운을 받는다. 문을 잡아 당겨 잠그면 시원찮은 방풍 효과 덕분에 틈 사이로 노란 봄기운들이 들어와 한참을 머물다 간다. ⓒ 박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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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번역가이자, 산문 쓰기를 즐기는 자칭 낭만주의자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여행, 책 소개, 전시 평 등의 글을 썼습니다. 『보따니스트』 등 다섯 권의 번역서가 있고, 다음 ‘브런치’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https://brunch.co.kr/@brunocloud). 번역은 지금 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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