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주는 돈이 얼만데 왜 또 입장료를 받는 거냐?"
2일 오후 1시 과천 경마공원 앞. 800원짜리 입장권을 끊지 않고 경마공원에 들어가려다 제지를 당한 30대 남자가 투덜댄다. 그의 투덜거림 뒤로 사람들의 물결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3800대를 세울 수 있다는 주차장은 이미 만원이다. 경마장 담 둘레에 인근 상인들이 마련한 1만원짜리 유료주차장과 거리가 좀 떨어진 곳에 마련된 5천원짜리 유료주차장도 주차된 차들로 붐비기는 마찬가지.
마사회에 따르면 주말에 이곳을 찾는 사람은 5만여 명 선이다. 그러나 공원이라는 말에서 연상되는 '가족' '연인'의 이미지와는 달리 짙은 색 점퍼를 걸친 노동으로 주름진 새까만 얼굴의 중장년층 남성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어떤 주말을 보내는 걸까.
실내로 들어서자 배당률과 지난 경기 등 각종 경마 정보를 제공하는 TV 수상기가 사방에서 눈에 띈다. 6층 건물의 곳곳에 설치된 마권구매 창구 앞에는 사람들이 수시로 긴 줄을 만들고 있었다.
사람들의 움직임은 거의 비슷하다. 건물 안으로 들어와 TV 수상기를 보거나 우승마를 점친 책자를 탐독한 후 베팅할 경주마를 선택하고 단식, 복식, 연식 등 더 많은 배당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점친 뒤 마권을 구입한다. 마권 1매당 베팅할 수 있는 금액이 10만원이지만 마권을 사는 데는 제한이 없으니 '한 몫' 크게 잡아보려면 수천단위까지도 베팅할 수 있다.
띠띠띠. 경기 시작. 경기가 펼쳐지는 1~2분 동안은 희비가 엇갈리는 순간이다. 마침내 결승선에 다가선 말들의 번호에 그들의 운명이 걸려 있다. 그러나 환호성은 탄식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잘못된 베팅으로 현금이 바닥나도 문제될 건 없다. 대형할인마트가 원스톱 쇼핑을 유도하듯, 현금인출기는 물론 계좌투표기(자신의 은행계좌에서 바로 마권 구매)까지 친절하게 마련돼 있으니 말이다. 30분~1시간 간격으로 1일 11~12경기가 펼쳐지는 동안 이러한 움직임이 수차례 반복된다.
모든 경기가 종료되면 아쉬움을 뒤로한 채 다음 주를 기약하며 하나둘씩 떠난다. 사람들이 지나간 바닥에는 날아가 버린 꿈을 대변하듯 마권과 구매표가 어지러이 널려 있다.
주말, 중장년 남성들의 '우울한 나들이'
"알리(노름에서 1과2), 알리! 그래애, 가자! 알리 조오타."
"그래, 필승××야. 가자아. 달리자! 야, 앞에 5번 안 비킬래. 이 ×××야!"
말들이 과천경마공원에서 경기를 벌이는 일요일 낮, 현지보다 더 후끈 달아오른 곳은 실내경마장(마권장외발매소)이다. 광명시 일번가 노른자위의 상가 4층부터 7층을 차지하고 있는 실내경마장(철산동)은 흡사 90년대 말 주식객장의 '묻지마 투자' 현장과 같다.
그들의 눈은 TV 화면에 고정돼 있고, 귀는 과천경마장 현지에서 보내는 소스를 듣기 위해 휴대전화에 고정돼 있다. 금연 건물이었지만 복도, 계단, 화장실에서 피워 올리는 담배 연기가 자욱하다.
마사회에 따르면 전국의 장외 발매소를 찾는 이들의 수는 10만여 명. 과천 경마공원과 실내경마장에서 베팅되는 금액만도 토요일 400억원, 일요일 500억원 수준이다.
서울 독산동에서 왔다는 임아무개(45·상업)씨는 자신이 점찍은 말이 들어오지 않자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복도로 나가 다음 경기를 위한 '공부'에 들어갔다. 그가 펼친 경마 예상지에는 우승 유력마부터 기수별 기승 현황, 최근 1년간 전적, 상금 분석 등 경주에 관련 된 모든 것들이 깨알같이 적혀 있다.
"다 공부를 해야 한다니까. 세상에 맨 입으로 되는 게 없어요. 하긴 이렇게 공부해도 ×말이 미쳐 날뛰면 수가 없지. 물론 오히려 그런 게 터져주는(우승확률이 낮은 말이 우승할 경우 배당률이 높다) 재미도 있긴 하지만."
임씨는 휴대전화로 과천 경마공원에 있는 친구와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출주마들의 몸 상태가 어떤지를 꼼꼼히 확인했다. 아무래도 TV를 통해 보는 것보다는 현장에서 직접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그런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다음 경주에 걸린 30여억원의 금액 중, 단 1원도 그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레저? 웃기는 소리! 그 사람들 하는 얘기일 뿐"
"오늘따라 패가 말리네."
점심식사를 위해 찾은 식당에서 그는 반주부터 시키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전날인 토요일에 20여만원 이상을 잃었는데 만회가 안 된다는 게다. 작은 '구멍가게'를 경영한다는 그의 벌이에 비하면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다.
경마나 경륜이 레저 스포츠라는데, 직접 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고 묻자 비웃음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레저? 웃기지도 않아서. 레저는 무슨. 저게 다 국가에서 하는 하우스(노름방)지. 마사회가 바지사장이고 카드회사가 꽁지(노름 뒷돈을 대는 이)라니까. 호구(돈을 잃는 사람)는 나 같은 놈들이지. 하긴 알면서 하는 놈들도 ××이지만."
그는 독설을 담배연기에 섞어 내뱉었다. 오후에도 계속 할 것인가를 묻자 대뜸 경기도 부천으로 자리를 옮긴다고 답한다. '종목'을 바꾼다는 것이다.
부천 경륜(競輪) 실외발권소. 부천 역사와 연결 된 건물에 자리한 경륜발권소는 경마발권소 보다는 다소 깨끗해 보였다. 하지만 그 곳을 찾은 사람들 대부분은 역시 40~50대의 중장년층 남성이었다.
"경륜이 경마보다 안전하기는 하지. 대끼리(유력 우승 후보)가 꼬박꼬박 들어오는 편이거든. 거기에 비해 경마는 알 수가 없어요. 사람이 아닌 말이라 꼭 들어올 놈이 갑자기 미친 척을 하니까. 암만 공부해봐야 도로 아미타불이야."
| | | '병주고 약주는' UCan 센터? | | | [인터뷰] 도박 중독 치료 및 재활지원소 정호승 소장 | | | |
| | | ⓒ나영준 | "유캔센터는 경마뿐 아니라 다른 많은 도박 중독자들의 재활과 치료를 맡고 있습니다. 또한 국내외의 도박 관련 연구도 함께 하고 있고요."
98년 개원해 현재 분당, 용산, 과천에 자리 잡고 있는 일종의 중독치료센터다. 과천 경마공원의 담벼락에도 유캔센터를 알리는 대형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정호송 소장은 마사회 부설 기관이기 때문에 '병 주고 약 주고' 한다는 식의 시선이 부담스럽다고 했다. 비록 그렇긴 해도 중독자들을 위해 치료는 물론 재활, 직업훈련, 직업 알선까지 모든 일을 총괄하고 있다고 한다.
"단순히 본인뿐 아니라 그 직계가족의 정신과 치료까지 부담하고 이 곳에서 진행되는 모든 일들은 입원까지도 전부 무료로 진행 됩니다."
이곳을 찾는 사람은 1일 평균 4~5명 선. 이들 대부분은 타인의 권유로 이 곳을 찾는다. 작년의 경우 1157명이 이곳을 찾았고, 올해는 1~3월까지 작년보다 2.5배 늘어난 수가 상담을 받았다고 한다.
치료효과에 대해 묻자, 아무래도 정신과적인 치료이기 때문에 단 칼에 무 자르듯 ‘완치됐다’고 말하기는 힘든 면이 있다고 한다. 다만 추후에 다시 하게 되더라도 이전과 같이 '목숨 걸고' 하기 보다는 레포츠로 받아들이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정 소장은 치료를 받는 이들도 "끊을 수 있다"라는 희망을 가지고 받아들여 줄 것을 주문했다.
분당 센터 Tel: 080-815-1190, 031-622-5999
용산 센터 Tel: 080-342-0200, 02-3781-3535
과천 센터 Tel: 02-509-2011 / 나영준 | | | | |
경륜은 사람이 직접 페달을 밟으니 큰 변수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선지 배당율이 경마에 비해 낮은 편이었다. 임씨도 이번에는 비교적 결과를 맞추는 편이었지만 환급받은 금액은 건 돈의 1.2배 에서 2배를 넘지 않았다. 자신이 건 우승후보가 들어왔으면 하는 바람과 그럼에도 높은 배당이 터져주기를 바라는 간절함, 동전의 양면일 뿐이었다.
자전거 바큇살이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 많은 고성과 환희와 아쉬움이 교차하는 풍경은 경마장과 다르지 않았다. 혹시나 남들이 버린 경주권에 결승 번호가 적혀 있지는 않은지 일일이 바닥에 떨어진 번호를 맞추어 보는 이들의 모습까지도.
임씨는 그 곳의 대부분의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경마장과 경륜장을 드나들며 알게 된 사이라고 한다. 모두들 말밥(경마장에 간다는 은어)을 준 지 10년 이상 됐다는 중년 남성들이다.
"이기 다 조작인기라. 아까 그 ×× 갑자기 페달 안 밟는 거 봤지?"
"맞어. 경마는 어떻고. 결승선 앞두고 잘 달리던 놈에게 갑자기 채찍질을 안 한 다니까. 신문에 난 것만 해도 어디 한 두 번이야?"
그들은 모두 확실한 심증이 있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입증할 만한 증거가 있냐고 하자 한발씩 물러난다.
"그걸 말해야 아나? 딱 보면 알지."
지난 2001년 민주당 박용호 의원이 낸 정책 자료에 따르면 서울마케팅리서치사가 성인남녀 500명을 상대로 실시한 경마에 관한 인식조사에서 응답자의 61%가 경마를 도박으로 인식하고, 동시에 조사대상의 91%가 '승부조작이 있을 것'이라고 응답하는 등 마사회에 대한 비(非)호감도가 90%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 됐다. 막연한 의심이긴 했지만 그들이 '특별한' 일부는 아닌 것이다.
어쨌건 그들의 불만은 줄어들지 않았다. "경마고 경륜이고 이게 다 우리 같이 못 배운 사람들 돈만 빨아 먹는 일"이라는 항변부터 "그래도 여기라도 안 오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갈 데가 없다는" 탄식이 이어졌다. 하지만 결국 이 곳에서 스트레스를 풀게 되냐고 묻자 모두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끔 제대로 된 '한 방'을 터뜨린 일도 있지만 그건 그야말로 드문 일이라고 한다. 대개 100배 이상의 고배당에 4~5만원을 걸고 맞춘 경험이 몇 번씩은 있다고 했지만 결국 다시 경마나 경륜에 쏟아 붓게 된다고 한다.
결국 '오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주말만 되면 손끝이 근질근질 해져 달러 빚을 얻어서라도 집을 나선다고 한다. 그렇게 까지 찾는 이유는 한 방이 터졌을 때의 희열을 못잊어서 이기도 하고 정말 '할 일이 없어서'이기도 하다고.
레저가 아닌 블루칼라들의 집합소?
마흔 두 살의 노총각인 김아무개(노동)씨는 1주일이 바쁘다. 수요일과 목요일은 경정(輕艇), 금~일요일은 경륜과 경마장을 번갈아 드나들기 때문이다. 그럼 월요일과 화요일엔 무엇을 할까. 그의 선택은 스크린 경마장이다. 쉴 틈이 없는 셈이다.
김씨는 이전에는 경정을 위해 미사리로, 경마를 위해 잠실로 직접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장외발권소가 여러 군데 생겼기 때문에 가까운 곳에서 ‘볼 일’을 해결한다고. 편리해진 만큼 돈도 ‘쉽게’ ‘더 많이’ 나간다고 한다.
"금요일엔 갱륜(경륜)장, 토일요일은 그때그때 봐가 내키는 대로 갑니더. 일주일이 뺑뺑이 인생입니데이. 뭐, 내만 그란 것도 아이고 여 사는 사람들 다 똑같습니더."
김씨는 광명 실내경마장을 찾는 사람들 대개가 자신이 살고 있는 가리봉동 사람들이라며 보통 하루 벌어 하루 먹는 노동자들이라고 한다.
"딴 동네 가도 똑같습니더. 택시 기사, 택배, 트럭기사들, 공장 다니는 사람들. 다 거기서 거깁니데이. 와 있는 놈들이 경마 같은 걸 하겠습니꺼. 여행 댕기고 골프나 치쌓는 기지. 가들은 노름을 해도 강원랜드나 가지. 경마장은 안 갑니더."
그 동안 사우나에서 때밀이도 해 보고 거리에서 분식을 팔기도 했다는 그는 착실히 돈을 모아 '결혼을 할 뻔한' 아픈 사연도 있었다고 한다.
"어차피 돈이 말 해 주는 세상 아입니꺼. 몬 배와도 돈만 있으모 대학 나온 마누라도 얻을 수 있는 기고, 선생님 소리도 들을 수 있는 기고. 강남 졸부라꼬 타고 났습니꺼? 어차피 인생 운칠기삼(사람이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성패는 운에 달려 있다)이란 말입니더."
그렇게 살자면 돈도 한두 푼 드는 게 아닐 텐데 김씨는 돈을 어떻게 마련할까.
"노름하는 사람은 하느냐 안하느냐가 문제지, 하려고 맘만 먹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만들어내게 돼 있습니더. 여 일 나가는 사람들끼리 빌리고 빌리주고…. 복잡합니데이. 아마 대부분 나처럼 ‘마이너스 인생’일 겁니더."
혹시 중독된 건 아닌지 묻자 자신은 그렇게 많이 잃을 돈도 없다며 고개를 흔든다.
"내가 간이랑 허리가 안 좋아가 쎈 일은 몬하고 살살 일당 일이나 나가는데 그래도 글마들 달리는 거 보다가 '딱' 내가 찍은 거 들어와뿔면 그 기분 진짜 쥑인다는 거 아입니꺼."
하지만, 따는 것의 몇 배를 잃는 상황에서 '날아가는 기분'이 유쾌할 수많은 없는 법. 그는 어차피 경마나 경륜은 '없는' 사람들에게 매기는 세금이라고 받아친다. 안 가면 그만이겠지만 희망 없는 세상에서 어디 안 가게 되냐며 "빈곤세 내는 셈 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대박 공화국(?)
5조3303억원. 지난 해 경마장이 올린 매출액이다. 2003년의 6조1752억원에서 13.7% 가량 줄었다고 하지만 일반인에겐 쉽게 다가오지 않는 천문학적인 액수다.
중장년층의 아버지들은 이 곳에서 주머닛돈을 털고, 빌리고, 사채까지 얻어 '한 방'을 꿈꾼다. 하지만 대부분은 빈털터리가 되어 발길을 돌리는 것이 현실이다.
누군가의 말대로 이들에게 경마와 경륜은 레저스포츠의 단계를 뛰어넘어 중독성 강한 '대박병'으로 자리 잡은 듯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번 주도 그리고 그 다음 주도 사람들의 발에 짓밟힌 경주권은 쉽사리 줄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의 꿈은 그야말로 '꿈 자체'에 불과하리란 것도. 이들의 가슴속에 숨어 있는 '한 방의 유혹'부터 날려야 하겠지만, '한 방'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 사회구조는 이들의 중독에서 과연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