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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이런 저런 말을 주고받는 사이 어느덧 고갯마루에 올라섰다. 헐떡거리는 숨을 가다듬고 눈 아래 산세를 굽어봤다. 삼십여 리 북쪽으로 우뚝 솟아 있는 호미봉이 보였다. 그리고 이십 여리 남짓한 동편 계곡으로 제법 널찍한 길이 이어져 있었다. 이 거리에서도 길임을 알 수 있는 정도의 넓이이니 필경 광산의 생산물들이 수레를 이용해 반출되는 도로임이 분명했다.

저만치 길편으로 마소의 행렬인지 알 수 없는 점들의 군상도 보였다. 도로의 넓이는 확보가 되었는지는 몰라도 정작 광물은 마소의 등짐으로 운반되는 것 같았다. 저 편 이외의 조선 내 도로사정을 감안하면 쉽사리 수레를 끌고 나선다는 것이 무리일 수도 있었다.

“이제 다 와 가는가?”

유홍기가 물었다.

“여기가 도리산 자락의 죽대령(竹代嶺)이니 얼추 이 고개가 관문이 아닐까 싶은데”

멀리 북쪽 호미봉을 응시하며 오경석이 대답했다.

“차라리 저 쪽편 대로로 갔었더라면 이 고생을 면하고 빨랐을지도 모르겠구먼.”

“어허, 대치 이 사람. 그래도 딴에는 북관 땅을 무시로 드나든 내 길눈을 못 믿겠는가? 저 길이 걷기엔 편할는지 몰라도 한참을 외도는 길인지라 좀 어려워도 이 고갯길이 빠르대도 그러네.”

“그래. 역매 자넬 한 번 믿어봄세. 호미봉 아랫자락 마을이라 하였으니 그까짓 것 잘 해야 이십 리 길 아닌가. 한번 가 봄세.”

유홍기가 투정을 부리다 먼저 일어섰다.

둘이 내리막길로 한참을 걷다가 유홍기가 다시 말을 꺼냈다.

“역매, 아까 하던 이야기 말인데......”

“뭐 말인가? 길 말인가?”

“아니, 그게 아니고 광산 말일세.”

“광산이 왜?”

“자네도 어르신께서 뭔가를 꾸미는 낌새를 느끼는 건 사실이 아닌가?”

“......”

오경석은 말이 없었다. 딱히 이렇다할 확증은 없으나 권 역관이 광산에 매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순간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의구심에 사로잡혀 있던 터였다. 상의할 게 있다는 박규수의 전갈이 아니었더라도 권병무의 서신을 접한 순간부터 평안도를 향해 길을 나서고 싶었다.

“권 역관 어르신이 광산에 투자한 일이 단순히 이재(利財)를 노린 선택이라 생각하진 않네.”

오경석이 입을 열었다. 오경석이 생각하기에 평소 권병무의 성향은 ‘광산’이 주는 선입견과 너무도 맞아 떨어졌다.

광산의 운영은 전통적으로 관이 맡아 했다. 청의 광물 조공에 대한 우려와 농사를 등한시하고 순간의 이익을 탐해 백성들이 광산에 매달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조정의 의지 때문이었다. 더구나 광산을 무뢰배의 집결지로 보는 시각 때문에도 광산의 성업은 경계의 대상이었으며 적정 수요량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만 유지가 되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광산은 군사적인 목적으로든 상업적인 목적으로든 확대될 수밖에 없는 사업이었고 그에 따라 각 군영문(軍營門),수령(守令),토호(土豪)와 호조간의 설점 수세권 분쟁도 치열한 양상을 띠었다.

18세기 후반기는 상품화폐경제가 더욱 발전하여 광산에 투자할 만큼 재력을 갖춘 부상대고(富商大賈)들이 출현하고 왜은의 수입이 두절되어 국내의 은광개발이 불가피해졌다. 또 왜은의 수입이 격감하고 대청무역의 결제수단으로 금을 이용하려 한 ‘연상(燕商)’과 ‘역관(譯官)'들에 의해서 금의 수요도 커졌다.

심지어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 농사가 피폐해지고 청나라가 다시 금의 조공을 요구할까 두려워 금광을 탄압하던 정조도 화성부(華城府) 건설을 위한 공역(工役)에 들어가면서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금광개발을 묵인하여 더욱 활기를 띄게 되었다.

화성부의 공역이 끝나자 다시 금광에 대한 강력한 금령을 실시하며 탄압하기도 하였으나 탄압을 주도하던 정조가 갑자기 죽고 순조가 즉위하여 김대비가 수렴청정하게 되면서 시벽파(時僻派)의 알력과 천주교 박해 등으로 정국은 극히 불안해졌고 덕분에 금광폐쇄령도 유명무실해져서 금군들의 잠채는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점장들에 의하여 은맥이 발견되고 점장들이 선정한 별장이나 물주가 호조의 공문을 받아 설점에 착수하면 인근의 빈민이나 농촌에서 유리되어 생활의 터전도 없고 호적에도 들어 있지 않은 무리가 일시에 운집하였는데 이들이 이른바 ‘연군, 은군, 금군’들이었다.

광맥의 부존상태에 따라 한 곳에 수백 수천 명의 은군들이 운집하였는데, 이처럼 은군들이 빈민들로 구성되었고 인원수도 엄청났기 때문에 사회적인 물의와 정치적인 문제 또한 심각하였다. 은점의 은군들이 남의 재물을 훔치거나 부녀자를 약취하는 등의 불상사도 없지 않았지만 은군들은 살 길을 찾아 은점에 투신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소속한 은점을 다른 관청의 은군들이 침해할 때에는 칼부림도 서슴지 않았고, 사사로이 끌어다가 고문하고 처벌하는 등 피나는 싸움도 일어나 광산이란 가히 통치세력의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영조도 은점이나 광산을 내우외환(內憂外患)을 초래할 수 있는 곳으로 여겨왔다. 영조 4년(1728)에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겪은 바 있고 청과는 월경사건(越境事件)이 자주 일어났기에 무뢰배나 도적들이 일시에 운집하는 은점의 신설을 특히 꺼려하였다. 조청국경이 인접한 곳의 설점도 철저히 규제하였고, 국경수비가 허술해진다는 이유로 같은 해 함경도 안변(安邊銀店)의 신설을 금함과 아울러 함경도의 은점을 모두 철폐하라고 명한 바 있었다.

이런 광산에 권 역관이 새삼 눈을 돌렸다는 것은 경제적 이익 이외의 그 무엇을 노린 꼼수일 가능성이 있었다.

“이보게, 역매......?”

“......응?”

유홍기가 광산에 관한 여러 생각을 하느라 골몰해 있는 오경석을 불렀다.

“내 생각엔 말일세......평양 감영에서 그 도당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조언하면서도 언급했지만 말일세......”

“또 그 홍경래(洪景來) 운운 말인가?”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내는 유홍기의 말을 자르고 오경석이 물었다.

“아, 글쎄 그리 일축하지만 말고 한 번 들어보게. 홍경래가 난을 일으킬 때도 우군칙(禹君則)이 운산(雲山)의 촛대봉(燭臺峰)에 금점을 개설한다는 구실로 금군을 모집하여 불과 두 달 만에 2천의 병력을 모아 다복동(多福洞)에서 봉기할 수 있었네. 어쩜 이리도 지금의 상황과 닮아 있냔 말일세.”

“그렇다면 더더욱 아니지 않은가. 어찌 홍경래가 일어난지 겨우 반 백년이 지난 땅에 다시 똑같은 취지로 둥지를 틀 수가 있단 말인가?”

오경석이 유홍기의 상상에 빗장을 질렀다.

“꼭 그렇지만도 않지. 홍경래가 광산을 기반을 일어나 평안도 일대를 휩쓸었음에도 그로 말미암아 광산개발이 전혀 위축되질 않았다. 순조 임금을 위시하여 헌종이나 철종 임금 모두 정조 대왕과는 달리 광업사정에 어두웠고 확고한 광업관 또한 서 있지 않았기 때문에 광업정책을 주도하기 못했네. 대신이나 호조판서들의 찬반론에 대한 비답(批答)으로도 그저 네 멋대로 하는 종지(從之), 의종지(依從之)로만 답했다 하지 않는가. 더구나 실권을 장악한 안동김씨나 풍양조씨들은 경외(京․外)의 요직에 그들의 친인척이나 추종자들을 포진해 놓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설점을 허하기만 하면 앉아서 세가 들어오는 광산을 반대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들의 이해와 상반되는 정책이란 입안될 수도 실현될 수도 없는 것이지. 그러니 돈이 되기만 한다면 광산이 들어서든, 광산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관심을 쏟을 것이 무엔가. 홍경래 아니라 왜구가 들어 앉았던 자리라도 눈 여겨 볼 겨를이 어디 있겠는가.”

“.......”

오경석은 반박의 말을 잇지 않았다. 그 역시 내심으론 그런 개연성을 배제하고 있는 축이 아니었기에 능히 유홍기의 말이 맞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집권세력들이 나라의 재정보다도 자신들의 재리(財利)에 급급하여 호조의 ‘경품설점(經稟設店)’법을 준수하기 보다는 오히려 ‘사자설점(私自設店)’을 비호하는 것이 현실이었고 세도정치하의 집권자들은 철종 4년(1853)의 삭주(朔州)금점 사안처럼 경․외 관아에 의한 합법적 또는 비합법적인 설점으로 민폐가 큰 곳일지라도 그들의 이해와 부합될 때에는 민의를 무시한 채 설점을 강행해 왔음을 오경석도 잘 알고 있었다.

위 아래로 뿌리깊게 썩어가고 있는 조선의 현실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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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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