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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촌도>. 종이에 수묵. 39 x 27 Cm.
<어촌도>. 종이에 수묵. 39 x 27 Cm.
이 달 20일까지 경복궁 앞 '학고재'에서 계속되는 전시회 <조선 후기 그림의 기와 세>는 꿈에도 기다리던 국보급 그림이 즐비해 눈을 호사할 좋은 기회다. 특히 이 곳에서 만나는 겸재 그림들은 그림 보는 재미를 한껏 높여준다.

'조선의 풍치는 조선의 필법으로 그려야 한다'며 진경산수화를 주창한 겸재의 그림은 중국식 산수화풍에 젖은 당대의 기준으로는 '회화의 반동'이었다. 독창적 화풍 주창은 임진병자 양란의 혼란기를 극복하고 경제적 문화적으로 부흥한 18세기 조선 사회의 넘치는 문화적 자존심과도 일맥상통한다.

필자가 함부로 겸재를 말할 재주는 빈약하나, 학고재에 걸린 겸재의 그림 중 남녀 성기를 바위와 폭포에 빗대어 그렸다는 <어촌도>와 <관폭도>를 직설적 에로티시즘의 표현이 아닌 고도의 대체(代替) 상징으로 바라보면서, 그림 보는 재미와 '발견의 기쁨'을 독자들과 함께 누려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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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촌도에 숨은 그림

<어촌도> 중앙 부분의 흐릿하게 접힌 자국은 화첩 그림을 떼어내 후대에 표구한 것임을 증명한다. 화첩은 내놓고 보기 멋쩍은 춘화를 보관하는 대표적인 방식이지만 이 그림을 춘화의 아류로만 본다면 큰 잘못이다.

바위라고 그린 것은 분명 남근이다. 그러나 겸재가 <박연폭도>에 그린 것처럼 힘차게 일어선 남근이 아니다. 일부 평자들은 <어촌도>의 바위를 우뚝 일어선 남근이라 보고 있지만 필자는 일러서기 직전 또는 뜻대로 일어서지 못한 남근이라 본다. 화가는 단 한 터럭이라도 이유 없이 붓을 대지 않는다. 겸재는 바위를 왜 이렇게 그렸을까 ?

<어촌도>의 부분.
<어촌도>의 부분.
필자는 그 해답의 힌트를 바위 위쪽에 그려진 초승달에서 찾아보았다. 가로 길이 38.5Cm의 화폭에 지름 2.4Cm로 작고 희미하게 그려진 초승달이다. 그러나 확대경으로 보면 세필로 정성껏 그은 0.1mm 정도의 윤곽선이 선명하다.

세밀한 윤곽 처리로 보아, 화면 공간조정을 위해 액세서리로 초승달을 넣은 게 아니라 어떤 이유로든지 초승달에 중요한 의미를 둔 것이 분명하다. 이 그림의 바위와 초승달은 서로 무관해 보이지만 주제로서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어촌도>의 주 묘사 대상은 큰 바위, 물가 흙 둔덕, 버드나무인데 여기에 흐릿하게 더해진 초승달은 이질적인 소재다. 그러나 이유 없는 등장은 없는 법이니 초승달을 그린 이유는 시간의 상징이 아닌가 한다. 회화에서 달은 시간의 상징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시간의 표식으로 달의 모양과 떠있는 위치를 그리는 것처럼 멋들어지고 확실한 방법도 없다.

<박연폭도>의 남근.
<박연폭도>의 남근.
시간 개념으로 읽으면 초승달을 그려 넣은 겸재의 뜻이 읽혀진다. 초승달은 초저녁에만 잠시 보이는데 남근이 왕성한 시각은 대개 새벽이다. 겸재는 새벽을 기다리는 남자의 마음을 은근히 빗대어 그린 것은 아닐까.

전라(全裸)보다 반라(半裸)가 더 에로틱한 이치와 같다. <박연폭도>의 호방한 폭포 물줄기에 어울리게 그려진 우람한 남근과 비교하면, 몸에 착 누워 붙여 그려진 <어촌도>의 남근은 귀엽기까지 하다.

그럼 제목에는 왜 농촌도 산촌도 아닌 '어촌(漁村)'임을 굳이 명시했을까? 초승달 뜰 때 즈음은 물 때로는 '사리'에 해당한다. '조금'에 비해 고깃배가 가장 바쁘니 어획고도 늘어나고 마음도 풍요로울 때이다. 등 따습고 배부르니 육욕도 남세스럽지 않고 여유롭다는 뜻인가.

<어촌도>에 숨은 이런 상징들을 꺼내보며 만년에 경제적으로 여유로웠던 겸재의 호사를 연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무한히 자유로운 상상은 그림 보는 재미의 극치이다.

관폭도에 숨은 그림

<관폭도>.종이에 수묵. 39 x 27 Cm.
<관폭도>.종이에 수묵. 39 x 27 Cm.
댓그림으로 그린 <어촌도>와 <관폭도>는 학고재 전시에도 나란히 걸려 있다. <관폭도>의 여근은 <어촌도>의 남근만큼 한 눈에 확연히 드러나진 않는다. 일부 관람객은 설명을 듣고도 "어디가 그거야?"하며 여근 형상을 못 찾고 고개를 갸우뚱하지만 대부분의 관람객은 오른쪽의 폭포를 품은 바위가 여근의 상징이고 폭포 맞은 편 정자에 앉아 폭포(즉, 여근)를 바라보는 남자를 발견하고는 빙긋이 웃는다.

<관폭도> 왼쪽 부분도
<관폭도> 왼쪽 부분도
그러나 필자의 눈에는 겸재의 더 큰 의도가 보인다. 겸재는 정자 뒤쪽 바위를 폭포에 못지않게 자세히 그렸고 공들여 그린 흔적이 확연하다.

그 바위는 노골적으로 가랑이를 벌려 여근을 드러내고 있다. 게다가 운우지정(雲雨之情)을 상징하듯 여근의 중요한 곳엔 정성껏 그린 우람찬 소나무가 꽂혀 있다.

감상자의 눈에 먼저 뜨이는 폭포 바위의 여근보다 소나무가 꽂힌 정자 뒤의 여근은 더 노골적이고 선명하다. 이 부분을 확대경으로 보면 여인의 양쪽 허벅지가 확연히 드러난다. 왼쪽 허벅지는 그림 밖으로 넘겼고 오른쪽 허벅지는 나무 뒤로 흘렸다.

<관폭도>의 두 소나무 비교.
<관폭도>의 두 소나무 비교.
오른쪽 허벅지를 가린 큰 소나무는 10~11회의 붓질에 그쳤으나, 여근에 꽂힌 큰 소나무는 27~30회의 붓질로 정성이 각별하다.

겸재는 남자를 상징한 이 소나무에 공을 들여 그렸다는 뜻이 되고, 운우지정을 나누는 순간의 상징이 되었다. 겸재가 의식적이었던 무의식적이었던 결과는 그렇다.

그럼 왜 한 화면에 두 개의 여근을 그렸을까 ?

남자는 정자 앞의 폭포(여근)를 바라보며 젊잖게 앉아있지만, 머릿속은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누는 순간의 상상으로 한껏 고조되어 있다고 읽어보면 흥미롭다.

즉, 정자 앞의 폭포는 실제 경치이고 뒤의 바위와 소나무는 정자에 앉은 이의 상상이라고 보면 그림의 해석이 아주 유쾌해진다. 현대 만화의 한 컷짜리 카툰을 보는 듯하다. 이 얼마나 재기발랄한 고도의 대체(代替) 상징인가?

내 마음대로 감상하기

이번 학고재의 전시는 참으로 드문 진본 감상의 기회로 여러 번 발품을 팔아도 좋을 일이다. 위에 쓴 글은 두 번째 방문에서 3시간여 동안 오로지 두 편의 그림 앞에 붙어 있다가 온 필자의 생각을 적은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이 관람의 선입견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

일단 창작자의 손을 떠나 발표된 창작물은 대중의 것이다. 시(詩)마저 밑줄을 그으며 배운 대로만 해석해야 국어 점수가 좋게 나오는 교육을 받은 대부분의 우리들에게, 자유로운 감상은 모조리 오답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자유로움은 모든 창작행위의 대전제이며, 그 자유는 감상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모든 창작품은 보는 순간 이미 내 것이다. 내 것이니 내 마음대로 보는 것은 당연하다.

필자는 겸재의 그림을 내 마음대로 읽으면서 무한한 자유를 느낀다. 독자 여러분께도 무한한 자유의 세계를 권한다.

덧붙이는 글 | 기사에 쓰인 사진은 판권자인 '학고재'의 허락을 얻어 도록을 촬영했습니다. 촬영을 허락한 '학고재' 측에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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