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들의 푸르름이 들판을 적시고, 들판의 푸르름이 마음을 적시는 봄이다. 나는 여경암으로 가기 위해 무수동 마을로 접어들었다. 사람 사는 곳 어디에 근심 없는 마을이 있으랴마는 제 스스로 근심이 없다는 걸 일부러 들쑤실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을 들머리에서 마주치는 쑥이며, 냉이 같은 봄나물 등의 표정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논두렁 밭두렁 할 것 없이 나물 캐는 아주머니들의 손길로 넘쳐났기 때문이다.
세상을 떠난 어느 시인은 이런 들녘에서 풀잎 하나라도 축낸다면 들의 수평이 기울어질까봐 차마 못 따겠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 시인이란 존재는 지나치게 수심이 많은 사람이다.
산길을 올라간다. 멀리서 뭉게구름이 몽실몽실 피어오르고 있다. 뭉게구름은 일단 산기슭에 제 몸을 부린 다음 서서히 자신을 부풀리기 시작한다. 먼저 하늘에다 제 존재를 확장시키고 그 다음 사람의 마음에까지 확산시킨다.
나도 한때 저 뭉게구름에 미쳐서, 저 뭉게구름이 자극하는 역마살에 들떠서 떠돈 적이 있다. 봄날 산길은 유쾌하다. 공연히 생강나무 노란 꽃 한 송이에도 막 파릇파릇해진 인동초 한 잎에도 말을 걸고 싶어진다.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지는 산길
오랜만에 나 자신에게도 말을 건다.
"넌 그 나이에도 아직 봄날이 슬프니?"
"응. 봄날엔 모든 것이 아득해 보이거든. 그래서 슬퍼."
"아득하다는 것이 뭐지?"
"음. 아득하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뜻이지. 가령 네가 아득하게 느껴지면 난 너를 사랑하고 있는 거지. 누가 아무리 너를 사랑한다고 외쳐도 아득하게 느껴지지 않으면 그건 사랑이 아니거든."
"좀 어렵네. 그럼 아득하다는 것은 거리의 문제인가?"
"아니지. 그건 거리의 가깝고 먼 것이 아니야. 정말 사랑하게 되면 바짝 곁에 있어도 아득하게 느껴지는 법이거든."
"그렇구나. 네가 산을 자주 오르는 이유를 알 것 같아."
나이가 들수록 아득할 정도로 그리운 것이 드물어진다. 일상은 살갗이 두껍다. 그 어떤 아득함, 절실한 그리움이 꼬집어도 알아채지 못한다. 그러나 산에 오르다 보면 어느새 시시했던 일상마저 아득해지고 그리워진다. 여경암에 가까워졌나 보다.
절집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8호인 여경암은 본디 조선 영조 때 호조판서를 지낸 유회당 권이진이 선친의 묘소를 지키기 위해 지은 건물이었으나 나중에는 그의 후손들과 후학의 교육장소로 활용되어 왔다.
여경암의 뒤편에는 산신각이 있고 그 앞으로는 서당 건물로 사용되었던 거업재가 서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여경암, 거업재, 산신당을 하나로 묶어서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한 것이다.
주자(朱子)와 동시대의 사람이었던 사마온(司馬溫)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자손과 제자들을 가르치려고 건물을 짓고 여경사(餘慶寺)라 이름 붙였는데 여경암이란 이름은 여기서 따온 것이다.
여경암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건물은 거업재다. 거업재(居業齋)란 이름에는 춘추정신(春秋精神)을 깨닫고 삼강을 바르게 하는 올바른 군자의 길을 걷게 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거업재는 정면 6칸, 측면 1칸의 일(一)자형 구조이며 여름철 서당으로 쓰던 우물마루와 겨울철 서당으로 쓰던 온돌방 및 부엌으로 이루어져 있다. 거업재로 오르는 댓돌 위에는 신발 두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져 있다. 일순간 사람을 불러볼까 하다가 그만둔다. 새삼스럽게 적막을 깨운다는 것이 부질없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건물 뒤편에는 장독대가 놓여 있다. 된장이라든가 고추장이라든가 간장은 모든 음식의 원천이다. 모든 음식의 맛은 거기서 나온다. 독은 간장, 된장만 숙성시키지만 정작 우리가 맛보게 되는 것은 어머니의 잘 익은 사랑의 맛이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숨바꼭질하며 놀던 어린 시절 장독대는 숨을 장소로 안성맞춤이다. 어쩌면 그것은 하나의 상징인지도 모른다.
삶의 시련은 시시때때로 찾아오고 우리는 그 술래를 피해 전전긍긍하며 살아가고 있다. 어머니는 우리 생애 내내 장독대가 되어주신다. 위안이라는 말과 숨을 곳이란 말은 동일한 울림이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벌써 정오를 지나고 있다. 지금 저 장독들은 답답한 뚜껑을 열고 햇볕을 쬐고 싶어 할 것이다. 뚜껑을 열어주는 것, 햇볕을 쬐는 것이야말로 간장이나 된장에게는 답답한 일상을 탈출하는 여행일 것이다. 간장이나 된장은 주기적으로 독의 뚜껑을 열어주어야 잘 숙성된다.
사람에게도 일상이라는 독의 뚜껑을 열어주는 시간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나는 지금 내 일상이라는 독의 뚜껑을 열어놓고 있는 중이다.
조금 위에 있는 언덕배기로 올라가니 약수터가 있다. 긴 호스를 타고 내려온 물들이 수조로 똑, 똑 떨어지고 있다. 산골짜기 어디쯤에서 내려오는 물일까. 바가지 가득 물을 떠서 마신다. 물맛이 꽤 시원하다.
여경암 쪽으로 슬슬 발길을 옮긴다. 여경암은 자연석으로 높게 쌓은 기단 위에 세워진 비교적 규모가 큰 건물로, 평면구조는 정면 5칸, 측면 2칸에 뒤쪽으로 각각 2칸씩 덧붙여져 있는 ㄷ자형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정면 5칸 중 전·후면에 툇마루가 달린 좌측 3칸에는 온돌을 들여서 불당으로, 그 우측의 2칸 통칸은 넓은 부엌으로 쓰고 있으며 ㄷ자의 날개 부분의 우측은 2칸 모두 온돌방을 들이고 좌측은 각각 1칸씩 우물마루를 깐 대청과 온돌을 들여 요사로 사용하고 있다.
여경암의 문은 굳게 닫혀 있다. 여경암이 절집이라는 걸 말해주는 것은 수덕사 교육원이라 쓴 현판과 벽에 걸려있는 금고뿐이다. 금고란 청동으로 만든 북으로 금구 혹은 반자 등으로 불린다.
범종이 주로 아침저녁의 예불이나 중요한 의식 법회 때 사용되는 법구라면 금고는 공양 시간을 알린다거나 사람을 모으는 등 비교적 단순한 용도로 사용되어 왔다. 웅장한 소리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독특한 고음을 내는 금고는 범종과 마찬가지로 청동으로 만들며 뒷면을 넓게 뚫어 공간을 만든 납작한 원반형으로 되어 있다.
여경암 뒤쪽에 있는 산신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작은 집이다. 산신 탱화가 모셔져 있다고 하나 잠겨져 있어 들여다보지 못한다. 산신각을 돌아 나와 여경암 토방에 걸터앉았다.
문득 바라본 옆문의 문턱이 약간 둥그스름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완주 화암사의 것만은 못하지만 멋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절 속 같다
이곳에 온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찾아오는 이가 없다. 바람조차 불지 않는다. 바람이 풍경이 일으키는 번뇌라면 저 풍경은 지금 번뇌를 여의고 선정에 들어 있는 셈이다.
사방이 고요하다 못해 적막한 것이 정말이지 '절 속 같다'는 말이 실감난다. 수시로 밀려드는 적막이 무거워서일까. 이곳의 산수유는 아직 꽃을 피우지 않았다.
정현종 시인의 시 '비스듬히'가 떠오른다.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아마도 산수유 꽃이 아직 피지 않은 건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는 무언가가 산수유나무에 과도하게 기대어 선 때문이리라. 혹 나 역시 누군가에게 과도하게 기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번듯한 절집은 아니지만 소박해서 아름다운 여경암을 나섰다. 발길을 서두르지 않는다. 봄빛이 안겨주는 그윽함을 마음에 퍼 담기 위하여.
덧붙이는 글 | ☞여경암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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