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여름, 호리호리해 다소 약해 보이는 한 젊은이가 포레스털 미 해군장관과 함께 파리에서 C-54 전용기를 타고 베를린으로 향했다.
독일 상공에서 내려다본 작은 마을과 들녘은 평화로워 보였으나 프랑크푸르트 같은 대도시의 중심부는 맨바닥이 드러나 보일 정도로 온통 잿빛의 폐허 그 자체였다.
베를린은 온전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 한 채도 없을 만큼 아수라장이었다. 400만 명 이상 되는 인구 중 절반 가량이 전사했다. 살아남은 어린이와 노인들은 대부분 영양실조에 걸려 있었다.
전후 유럽-국제질서 규정한 샌프란시스코·포츠담 회담을 취재한 케네디 기자
미국 신문재벌 허스트 계열사의 신문기자인 이 젊은이는 베를린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교외의 포츠담으로 향했다. 전후 유엔(UN)을 탄생시킨 샌프란시스코 회담 취재를 막 끝낸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독일 항복 이후의 유럽 정국을 집중 취재하라는 것이었다.
그해 7월 미·영·소 열강의 3국회담이 포츠담에서 열렸다. 베를린에서 25마일쯤 떨어진 포츠담은 덜 파괴된 덕분에 2차대전 막바지에 참전해 '전후 요리의 숟가락'을 꼽은 소련이 이곳을 회담지로 선택했고, 그 때문에 스탈린 총리와 처칠 수상 그리고 트루먼 대통령 3인은 포츠담 인근의 궁전 같은 저택에 여장을 풀었다.
회담의 목적은 전후 유럽 문제와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를 결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냉전의 출발점이 되고 말았다.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회담이 열리는 동안 영국의 수상은 처칠에서 애틀리로 바뀌었으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로 사전에 주요 현안들에 대해 제대로 브리핑도 받지 못한 채 부리나케 온 트루먼은 세계사의 한 획을 긋게 되는 역사의 현장에서 회담 대표들이 바뀌는 것을 지켜본 허스트사의 신문기자보다 소련의 점증하는 위협 같은 현안에 대해 더 무지했다.
이 신출내기 기자가 나중에 대통령이 된 '존 F 케네디'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하버드대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뒤에 해군에 입대해 참전한 케네디 중위는 45년 3월 척추장애가 재발해 3년 6개월간의 현역복무를 마치고 전역해 언론계에 진출한다.
그리고 신문재벌 허스트와 가까운 아버지 조셉 케네디의 주선으로 그해 4, 5월에 세계사의 한 획을 그은 샌프란시스코회담을 참관하고 곧이어 2차대전후의 독일의 장래와 유럽의 정치질서를 결정한 역사의 현장으로 날아온 것이다. 이때의 현장기록은 나중에 <리더십의 서곡--1945년 여름 존 F 케네디의 유럽일기>(한국어 번역판은 <대통령이 된 기자>)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그러나 그의 기자 생활은 1년도 채 안되는 짧은 기간에 끝났다. 하버드 대학 시절부터 꿈꾸었던 기자·문필가에서 곧바로 정치인이 되기로 인생의 계획표를 수정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케네디 자신도 얘기했지만, 케네디를 정치의 세계로 이끈 요인은 케네디가(家)의 정치재목으로 키운 맏형 조의 갑작스런 사망과 샌프란시스코와 포츠담에서 특파원으로 활동할 당시 그가 얻었던 경험이었다.
주영 미국대사를 지낸 유력한 재력가 아버지를 둔 덕분에 군에서 막 제대한 신출 기자임에도 종전후 거물급 정치 지도자들의 활동현장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며 현직 및 장래의 지도자들과 접촉할 수 있었던 케네디는 그때까지 고려했던 정치평론가나 문필가 혹은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려던 진로를 접고 정치가가 되는 것이 더 많은 만족을 얻을 수 있고 더 효과적인 봉사를 해낼 수 있으리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세계사의 한 획을 긋게 되는 역사의 현장에서 회담이 열리기 직전에 미국 대통령이 서거하고 회담이 열리는 중간에 영국 수상이 교체되는 것을 지켜본 경험론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사실은 훗날 대통령 자리를 이어받을 두 명의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과 포츠담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다. 트루먼을 승계한 아이젠하워 장군과, 포츠담에서 이뤄진 두 사람의 역사적 결단과 조언을 옆에서 지켜보고 나중에는 아이젠하워의 뒤를 이어 백악관의 주인이 된 케네디가 그들이다. 3명의 미국 대통령이 나란히 포츠담의 역사적 현장에 있었던 것이다.
케네디 "오늘 자유세계서 가장 자랑스런 긍지는 '나는 베를린 시민'이란 점이다"
케네디는 이듬해인 46년 메사추세츠 11선거구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하원의원이 된다. 그의 나이 스물아홉살 때의 일이다. 이후 3선 의원이 된 케네디는 60년 대통령 출마를 공식 선언하고 "우리는 뉴 프론티어의 끝에 서 있습니다"(We stand on the edge of a New Frontier.)라는 명연설로 청중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케네디의 외교는, 북핵 위기 속에서 임기를 시작한 노무현 대통령의 그것처럼 '재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말기에 중앙정보부가 세운 비밀계획에 따라 쿠바 망명자로 구성된 1개 여단을 훈련시켜 공산 쿠바에 침투시키려던 피그스만 침투계획은 참패를 끝나고 만다.
흐루시초프 소련 총리는 동서 베를린을 가르는 장벽 건설을 명령하고는 동독과 조약을 체결하도록 협박함으로써 케네디를 시험에 들게 했다. 케네디는 국민방위군과 예비역 부대를 동원해 전시태세를 갖추는 것으로 맞섰다.
45년 7월 역사학을 전공한 패기 많은 기자로서 베를린을 찾았던 케네디는 16년 만인 61년 7월에 다시 베를린을 방문해 흐루시초프 총리에게 절대 베를린을 포기하거나 소련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서베를린이 군사적으로 취약하다는 말이 있다고 듣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스토뉴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실상 스탈린그라드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리 취약한 지역도 사람들이--용기 있는 사람들이--그렇게 할 의지만 있다면 굳건한 지역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결국 흐루시초프의 '시험'은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위기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이듬해 10월에는 소련이 미국의 뒷마당인 쿠바에서 중·단거리 핵미사일을 만든 사실이 포착되었다. 케네디는 미사일 해체를 요구하며 쿠바에 대한 해상봉쇄를 명령함으로써 숨막힌 순간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윽고 흐루시초프는 쿠바로부터 미사일·폭격기 등 공격용 무기의 철수계획을 발표하고 10개월 뒤에는 핵실험금지협정을 체결해 미·소간의 해빙무드가 조성된다. 그리고 63년 6월 케네디는 다시 베를린 장벽을 방문해 유명한 연설을 남겼다.
"오늘날 자유세계에서 가장 자랑스런 긍지는 '나는 베를린 시민'(Ich bin ein Berliner)이란 점입니다. 공산주의가 미래의 물결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베를린으로 오게 합시다."
브란덴부르크문(門) 주변의 베를린 심장부는 지금 '공사중'
'기자 케네디'가 젊음의 열정으로 취재에 몰두했던 브란덴부르크주의 수도 포츠담은 '대통령 케네디'가 스스로 자유세계의 시민임을 선언했던 베를린의 '포츠담 광장'에 그 이름을 빌려주었다.
베를린의 포츠담 광장은 2차대전 전까지 전 유럽에서 가장 교통량이 많은 지역이었으나 독일 분단 시절에는 장벽이라는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미개발인 채로 방치되었다. 그러나 통일후 포츠담 광장은 '유럽 최대의 공사장'으로 변모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다시 종전 60주년을 한 달 앞두고 브란덴부르크문(門) 주변의 베를린 심장부는 지금 '공사중'이다.
독일 정부는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 인근의 5800평 규모의 부지(1조원 상당)에 3천억원의 공사비를 들여서 유태인 대학살 추모비(Holocaust Mahnmal)를 건립하고 있다. 추모비는 부지 내에 2711개의 검은색 직육면체 형태로 건립되고, 지하에는 유태인 학살 관련 학습안내관이 내부 시설로 들어선다. 오는 5월 10일 '종전 60주년'을 계기로 준공될 예정이다.
홀로코스트 추모비가 세워지는 이 부지는 19세기말까지는 독일제국의 왕실시설이었고,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대통령 집무실이 있었고, 그리고 나치 치하에서는 선전상 괴벨스의 지하벙커가 자리잡고 있었던 곳이다. 또 부지 인근에는 히틀러의 지하벙커가 있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추모비 건립의 의미는 명징하다. 독일 통일 이후 독일 정부의 과거사 청산 일환으로 나치에 의해 희생된 유럽 전역의 유태인 희생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다. 결국 이것은 독일이 국제적 위상을 증대하기 위해서는 과거 청산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자기반성과 미래지향적 역사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노 대통령 "역사의 진보는 구체 과정은 예측 못해도 멀리 보면 갈 곳으로 간다"
독일을 국빈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은 11일 쾰러 독일연방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데 이어 브란덴부르크문을 시찰하고 베를린 시청을 방문했다.
독일 역사의 흥망 및 분단과 통일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브란덴부르크문은 통일 이후 국빈방문시 성문을 통과하는 의식 거행장소로 자주 이용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이날 클라우스 보베라이트 베를린 시장의 안내를 받아 서쪽에서 동쪽 방향으로 걸어서 문을 통과하는 의식을 10여분 동안 가졌다.
노 대통령이 이날 방문한 독일 분단과 통일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문 남쪽에는 지하철 공사가 한창인데 LG의 대형 '덮개 광고'가 그 공사 현장을 덮고 있었다.
노 대통령은 당초 일부 언론의 예상과 달리 '베를린 선언'이라고 명명할 만한 발언을 하지 않았다. 다만, 티어제 연방하원 의장을 만나는 자리에서 브란덴부르크문에서 느낀 소회를 이렇게 밝혔다.
"브란덴부르크문에 갔을 때 조금 모순된 것 같은데 두 가지 생각이 나더라. 하나는 독일의 본격적인 통일을 한 달 전에도 예측하지 못한 점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독일의 통일을 20년 전부터 예측했던 점이다. 이 두 가지 모순된 사실이 머리에 떠오르더라. 역사의 진보는 그 구체적인 과정은 예측하지 못하지만 멀리 내다보면 갈 곳으로 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니겠는가."
정우성 청와대 외교보좌관은 독일 방문 의미에 대해 "노 대통령은 독일이 EU(유럽연합) 통합과 통독 과정은 물론 전후 모범적 과거사 청산을 통해 국제사회의 완전한 신뢰를 회복한 사례라는 점에서 기대를 갖고 준비해 왔으며 독일에서 많은 얘기를 들으려는 것 같다"고 밝혀 이번 국빈 방문이 실은 '학습 방문'임을 강조했다.
한국이 지금 당면하고 있는 최대 현안은 '불편한 이웃'인 북한과 일본과의 올바른 관계설정이다. 그런 점에서 분단관리 및 통일과 이웃에 대한 진정한 반성을 통한 신뢰회복으로 과거사 문제를 해결한 독일은 '역사의 벤치마킹' 모델로서 손색이 없다.
노 대통령이 최근 참모들에게 밝힌 정치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역사에 대한 '예지력'과 '통찰력'이다. 노 대통령이 거기에다가 케네디의 '용기'만 더 배우고 가면 이번 '학습방문'은 대성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