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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아예 죽여 버리거나 베겠다는 생각이 없는 텅 빈 마음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아니 상대 없이 허공을 향해 검을 휘두른다면 살기를 배제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상대가 있는 사람이 살기 없이 검을 들 수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담천의는 왜 노인의 도도가 눈앞에 왔을 때야 비로소 보였는지 이해했다. 빠름 속에 살기가 없으니 그 도는 느껴지지 않았고, 보이지 않았다. 사람의 시력이란 한계가 있는 것이어서 빛살 같은 속도라면 따라갈 수가 없다. 어쩌면 강명의 그 암검도 그런 것이 아닐까? 그는 노인에게 흥미를 느꼈다.
그는 갑작스럽게 검을 뽑아 쾌속하게 노인의 뒷머리를 베어갔다. 황원외의 쾌도를 무색하게 할 빠름이었다. 살기가 배제되다 보니 소리조차 없었다. 하지만 노인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의 검은 정확히 노인의 뒷목덜미에 닿아 있었다.
“어리석기는 저 바보와 다를 바가 없구먼.”
노인의 퉁명스러운 말에 담천의는 또 한번 어리둥절했다. 그는 황원외를 바라보았다. 황원외는 담천의의 쾌검에 놀란 듯 했다. 하지만 노인의 말에 그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한순간에 두 사람은 같은 바보가 되었다.
“왜 베지 않았지? 그것은 이미 처음부터 베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고 발검 했기 때문이야. 살기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이 따위 짓은 그저 칼춤과 다를 바 없지.”
노인의 말에 담천의의 뇌리 속에는 잡힐 듯 말 듯한 무엇인가가 맴돌고 있었다. 강명과의 대결에서 마지막으로 자신이 쳐냈던 그 검에는 무엇을 베겠다는 마음도, 날아오는 검을 막겠다는 마음도 없었다. 그저 그 순간 쳐오는 강명의 검을 향해 초식도, 검로도 잊고 그는 무심 속에서 그 검을 떨쳐낸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손에 쥘 수 없었다. 분명 알 것도 같은데 여전히 머리 속만 뱅뱅 돌고 있었다.
“베겠다는 생각과 베지 않겠다는 생각은 어찌 보면 같은 것이다. 살기가 있고 없고 역시 마찬가지. 다만 검은 그 본래부터가 살상하기 위한 도구다. 그 이후는 노부도 모른다.”
노인은 자신이 간 도도의 날을 보더니 자신의 목덜미에 닿아있는 담천의의 검을 손으로 튕겨냈다.
“치워라. 아무 생각 없이 놓인 검에 베이기는 싫다.”
담천의는 그 말에 씁쓸한 고소를 띠우며 검을 집어넣었다. 머리 속은 복잡했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는 생각을 접었다. 그리고는 이미 죽은 소 앞으로 다가가는 노인에게 불쑥 물었다.
“내가 얼마큼 부친을 닮은 것이오?”
그 말에 노인은 잠시 주춤하는 듯 했으나 금방 회복했다. 그리고는 꼬챙이 같은 것으로 소의 정수리를 찌르며 피를 뽑기 시작했다.
“보기보단 꽤 머리를 쓸 줄 아는군. 풍철영이 말해 주지 않던가? 하기야 해 줄 말도 없겠지. 그것은 노부도 마찬가지다. 노부에게 무언가 듣기 위해 허튼 심계를 쓰지 마라. 노부가 너에게 해 줄 말은 아무 것도 없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노인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신검산장의 도부(屠夫)였고, 그가 하는 일은 며칠에 한번씩 소나 돼지를 잡아 주방에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그를 도노(屠老)라 불렀고, 바로 황원외의 사부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 신검산장의 장주 이름을 마치 어린애 부르듯 하는 노인이라면 그저 도부는 아닐 것이었다. 의문은 많았지만 더 이상 노인이 말이 없자 담천의는 가볍게 포권을 취한 뒤 몸을 돌렸다.
“담공자…!”
노인의 매정한 태도에 황원외가 미안했던지 그를 불렀다. 담천의는 고개를 돌려 황원외를 보며 싱긋 웃었다.
“내가 본 중에 가장 빠른 쾌도였소. 살기가 있건 없건 뭔 상관이겠소? 목적한 바를 정확하게 찌르거나 벨 수 있다면 상대가 느끼던 느끼지 못하던 마찬가지 아니겠소?”
그 말은 노인의 말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노인이 뭔가 반응을 보일 거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노인은 뭐라고 하기는커녕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고, 하던 일을 그대로 계속하고 있었다. 담천의가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사람 같았다. 황원외는 그의 말에 웃었다. 하지만 그의 웃음은 언제나 일그러진 웃음이었다.
담천의는 천천히 걸었다. 그는 서둘지 않기로 했다. 이곳은 확실히 자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이었다. 분명 그가 원하는 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주위에 있었다. 그는 심호흡을 했다. 어느새 어둠이 물러가고 있었다. 또 다른 날의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침의 상쾌한 공기가 폐부를 휘젓자 그는 머리가 맑아지는 듯 했다. 아직 몸은 불편했지만 자리에 누울 정도는 아니었다. 보이는 연못의 수면 위로 짙은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는 누군가 급히 움직인 듯한 자국에 걸음을 멈췄다.
“……!”
흔적으로 보아서는 풀이 쓰러지고 반쯤 찍힌 족적으로 보아 상승경공을 익힌 자 같았다. 그러다 그는 미세한 혈흔을 발견해냈다. 적지 않은 양이었지만 그것은 지우기 위하여 황급하게 흙을 덮어 놓은 듯 했다. 이슬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무슨 일인가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리고 그는 좌측으로 십여장 정도 몇 방울의 피가 떨어져 있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이곳은 낮은 담장 하나를 두고 백화각과 내원이 맞닿아 있는 곳이었다. 외부인들이 들어올 곳이 아니었다.
(백화각에는 구파일방의 인물들이 머무는 곳인데… 무슨 일이 있었나?)
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누군가가 정원을 가로지르는 길에서 상처를 입었고, 그 자국은 백화각과 반대방향으로 이어졌다. 누군가 백화각을 염탐하려다 구파일방의 인물들에게 당한 뒤 도망가다 흘린 것일 수도 있었다. 그는 주위 이곳저곳을 더 살펴보았지만 더 이상의 흔적은 없었다. 다만 담장 아래서 그는 누구 것인지 모를 짧고 가는 은잠(銀簪) 하나를 발견했다. 그러한 은잠은 대개 도인들이나 학관의 선생들이 관(冠)을 쓰기 전에 꽂는 것이었는데 특별한 표식은 없었다. 그는 묻어 있는 흙을 털고는 그것을 품속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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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명의 신경은 이제 터질 듯 극에 달하고 있었다. 이것은 개인적인 일이었다. 외형적으로 신검산장과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산서상인연합회의 오대수장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이목이 이토록 정확하고 신속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기묘한 미소를 흘리는 나충일은 이미 일이 끝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일행은 모두 여섯이었다. 잘 어울리는 한 쌍으로 보이는 삼십대 중반의 남녀는 그리 도도하지도, 그렇다고 평범하다고 볼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사내는 부드럽고 현기에 가득 찬 눈빛이었는데 어찌 보면 얇은 입술로 인하여 차갑게 보이기도 했다. 여자는 알맞게 살이 찐 전형적인 중년의 여자였다. 둥근 얼굴에 둥근 눈을 가진 그녀는 홍의를 입고 있어서인지 몸매가 더욱 풍만해 보였다.
그들의 뒤로 냉막한 사십대 전후의 사내 셋이 있었는데 한결같이 사나운 늑대를 연상케 했다. 마치 야생의 짐승 같은 기운을 풍기며 보는 이로 하여금 주눅이 들게 하는 눈빛을 발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표조귀살(豹爪鬼煞)에다 관외이흉(關外二兇)이라니… 준비는 철저히 했군.)
표조귀살은 응조공(鷹爪功)보다도 더욱 무서운 표조공(豹爪功)을 익힌 자였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는 인물이었지만 어디에 소속되거나 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자였다. 아마 나충일이 막대한 자금으로 끌어들인 것 같았다.
또한 관외이흉은 관외에서 상대하길 극히 꺼려하는 잔혹하기로 소문이 난 자들이었다. 그들은 몸속에 세 가지의 병기를 감추고 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한번도 한꺼번에 사용해 본적이 없다고 알려진 자들이었다. 그들은 인상에 어울리지 않게 깃털이 양쪽에 길게 뻗어있는 학관을 쓰고 있었다.
“형님… 긴 말 하지 맙시다. 이미 칠년이오. 그 놈을 내주겠소? 아니면 내가 직접 그 놈을 잡아내리까?”
나충일은 거만한 표정으로 비스듬히 의자에 기대며 말했다. 그를 바라보는 조국명의 눈빛이 차가와지기 시작했다.
“많이 컷구나… 감히 내 앞에서 투정도 부릴 줄 알고….”
조국명의 나직하게 가라앉은 말에 나충일은 움찔했다. 나충일에게 있어 조국명은 항상 어렵고 두려운 사람이었다. 한때 분양의 소년들에게는 너무 크게 보이던 사람이었고, 지금도 이런 곳에서 총관이나 할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릴 적의 기억은 언제나 자신을 위축시켰지만 이제는 산서상인연합회의 오대수장 중 하나인 산서 나가의 장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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