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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것보아라. 이게 조선의 썩어빠진 현실이다.”

정명수는 멀찍이서 계화와 함께 처참하게 패배한 조선군의 시체를 거두는 청군을 바라보며 뇌까렸다. 계화는 아무 말 없이 속으로 죽은 병사들의 넋을 기렸다.

“사전에 조선군이 어찌 하리라는 걸 알려준 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자들에 대한 것은 여기에 다 적혀 있다.”

정명수는 품속에 지니고 있는 낡은 두루마리를 계화에게 보여주었다.

“넌 분명히 여진어뿐만 아니라 옛 여진글도 알고 있다. 이까짓 것쯤이야 네가 읽어주기만 하면 되는 것을 왜 이리 고집을 피우느냐?”

계화는 정명수의 말을 못 들은 척 딴전만 부릴 뿐이었다. 정명수는 순간 계화의 머리채를 사납게 휘어잡고선 소리쳤다.

“이 앙큼한 계집아! 네 년이 정화수에게 글을 배운 것을 모를 줄 아느냐?”

계화는 모든 것을 참아내겠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자가 한때 내 형님이었기에 잘 알고 있는데도 말이냐!”

마침 전장에서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돌아오던 투루아얼이 멀리서도 한눈에 계화를 알아보고서는 한걸음에 달려와 정명수를 다그쳤다.

“이게 무슨 짓이오! 내 정대인을 믿고 이 아이를 맡겼는데 어찌 이러시오?”

정명수는 투루아얼을 옆 눈으로 본채 슬며시 계화의 머리채를 잡은 손을 놓은 뒤 옷소매를 신경질적으로 털어내며 말했다.

“말을 듣지 않기에 다그쳤을 뿐이외다. 장군께서 관여할 바가 아니니 자리를 비키시죠.”
“뭐라!”

투루아얼은 정명수의 태도에 화가 나 소리를 질렀고 그 틈에 계화는 슬며시 정명수의 곁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어딜 가려는 것이냐?”

정명수가 날카롭게 눈을 희번뜩거리며 계화를 불러 세웠다. 투루아얼은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이 아이는 내가 다시 데려가겠소. 연유를 가르쳐 주면 내 한번 구슬려 보리다.”

정명수는 투루아얼의 말을 무시하며 계화의 팔목을 휘어잡더니 병사들이 지키는 막사로 데려가 버렸다.

“난 말이야. 조선놈이고 오랑캐놈이고 시시한 놈들은 믿지 않아. 형님이었던 자도 오랑캐의 편에 붙었다가 기껏 돌아와서는 난에 가담해 도망치고서는 그 죄를 동생이 뒤집어쓰게 했지. 그때 뭘 하든지 자신에게 득이 될 일만을 찾아야 하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어.”

정명수는 계화가 듣든지 말든지 자신의 넋두리를 주절거렸다. 호역(胡譯 : 만주족의 말을 통역하는 이)이였던 정명수는 형의 죄로 인해 졸지에 평안도 관아의 노비가 되어 버렸다. 정묘호란 때 관아에 징집되어 간 정명수는 우연히 청군과 조우하자마자 항복해 버렸고 후에 용골대와 함께 조선의 사신으로 갔을 때는 자신에게 곤장을 친 일이 있는 현감을 황해도까지 찾아가 술과 음식을 차리게 한 뒤 난동을 부렸다.

“네 놈들이 조선의 관리냐? 대 청의 사신을 접대하는 법도가 어찌 이러하단 말이냐!”

정명수가 오기 전까지는 청의 사신이 이러한 횡포를 부린 전례가 없었기에 조선조정에까지 정명수의 이름은 알려지게 되었다. 조선은 청에게 그러한 일에 대해 강하게 항의했지만 정명수는 청 태종 홍타이지와 여러 번 독대하여 조선의 사정을 알려준 바가 있어 그 신임이 두터웠다.

‘저 계집이 이런 일로 고집을 부리는 이유를 알 수 없구나. 분명 여기에 쓰여 있는 것은 형이 몰래 조선의 어떠한 사정을 적은 것임에 틀림없다. 계집이 눈치 챌 정도로 대단한 것이란 말인가.’

정명수는 곧 이곳으로 올 청의 황제 홍타이지에게 더욱 신임을 받을 기회가 사라지지나 않을까 내심 걱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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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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