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 재건단체 및 민청학련 사건'의 판결문이 1975년 4월 8일 선고가 내려진지 무려 30년만에 일반에게 공개됐다.
이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선고 직후 판례공보를 통해 일반에 공개되는 것이 원칙임에도 법원이 '1975년 4월 21자 법률신문 제1104호에 전문개재 되었으므로 본보에는 게재치 않음'이라는 이유를 들어 같은 해 발간된 '법원 판례공보'에 공개하지 않았던 판결문이다.
A4용지 54쪽 분량의 이 판결문이 일반에 처음 공식 공개된 날짜는 지난 8일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는 선고가 내려진지 정확히 30년만이라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엔 어렵지 않냐도 견해도 있다.
법원 "전자 DB화 과정에서 누락된 것 올린 것일 뿐..."
법원 도서관은 18일 '인혁당 사건' 판결문을 비롯해 지난 1983년 이전의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중 판례공보에 실리지 않은 판결문을 대법원 홈페이지(http://www.scourt.go.kr)의 '종합법률정보'에 게재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전자 데이터베이스(DB)화 과정에서 우연히 누락 분이 발견된 것을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공개키로 했다"며 "올린 날짜가 선고 30년에 맞춰진 것은 우연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번 판결문 공개를 놓고 사회 전반에서 진행중인 과거사 진상규명 작업이나 사법부의 공개반성 등으로 연관지으려는 시각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그런 이유와는 무관히 누락된 자료를 올린 것이니까 확대해석을 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법원은 '인혁당 사건' 이외에도 지난 1973년∼1982년 사이에 선고된 전원합의체 판결문 중에 공보에 실리지 못한 '상습 절도사건' 등 민·형사 사건 4건도 공개했다.
이에 대해 김종훈 변호사는 "법원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 8명에게 사형 판결을 확정한지 30년이 되는 날까지 판결문을 공개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라며 법원의 뒤늦은 공개에 아쉬움을 표했다.
이어 김 변호사는 "(그동안 판결문을 공개하지 않은 것은)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과거가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짐작뿐이지만, 이제는 일반인들도 직접 판결문을 볼 수 있게 됐으니 전문을 보고 당시 사법부가 얼마나 잘못된 판결을 내렸는지 확인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 | 가장 수치스런 재판 1위 '인혁당 사건'이란? | | | | '인혁당 재건단체 및 민청학련' 사건은 대법원 판결이 내려진지 불과 20여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되는 등 박정희 정권 시절의 대표적인 조작의혹 사건이자 우리나라 사법부 최악의 판결로 꼽힌다.
지난 1974년 4월 8일, 대법원 전원합의체 재판부는 박정희에 맞서 전국 대학생들이 총궐기하자 '학생시위를 주도한 민청학련 배후에 북한 지령을 받은 인혁당이 있다'면서 구속기소된 관련자 23명에 대해 8명은 사형, 15명에게는 무기∼징역 15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당시 피고인들은 '헌법위반', '변호인의 변호권제한', '고문 등에 의한 진술', '심리미진·공판주의 및 자유심증주의 위배', '원심 양형이 지나치게 무겁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상고했다.
이에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대통령긴급조치위반·국가보안법위반·내란, 예비, 음모·내란, 선동·반공법위반·뇌물공여 등 혐의로 기소된 서도원씨 등 피고인 38명 중 36명이 낸 상고를 "이유 없다"면서 기각했다. 그리고 법원의 상고기각 판결이 선고된지 불과 20여시간 만인 4월 9일 피고인 서도원·도예종·하재완씨 등 8명에 대한 사형집행이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스위스 국제법학자협회는 이 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하는 등 국제적인 비난이 쏟아졌고, 지난 1995년에는 현직 판사를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수치스런 재판'으로 꼽히기도 했다.
한편 '인혁당 사건' 유족들은 2002년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으며, 현재 서울중앙지법에서 재심 실시 여부 심리가 진행 중이다. 또 인권 변호인단이 2003년 법원에 사건 재심을 청구했으나, 2003년 12월 이후 심리가 열리지 않고 있다. 국가정보원은 지난 2월 이 사건을 과거사 진상규명 대상에 포함시키고 재조사에 착수했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