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유효성’을 믿는가? 무라카미 류는 <러브 & 팝>의 후기에서 문학의 유효성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과연 문학의 유효성이 오늘날에도 존재하는가?’라고. 문학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또 다른 세계를 맛보게 해주기 위해서만은 아닐 테다.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닥거려주는 것이 또한 문학의 힘일 테고 그것이 문학의 유효성일 테다.
하지만 요즘과 같은 시대에 여전히 그것이 유효할까? 한 권의 책보다 인터넷 사이트의 패러디 동영상이 더 큰 위력을 보여주는 지금, 문학작품보다 실용서가 월등히 팔려나가고 있는 지금 그 문학의 유효성을 기대할 수 있을까? 아니, 기대는커녕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을까?
아마도 이 질문은 모든 작가들의 가슴 속에서 뜨거운 화두로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공지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작품들을 연달아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렸던 작가일수록 더 큰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 동안 저자의 글에서 이 화두를 직접 확인해보기란 어려웠다. 그러던 중에 작년부터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작년 <별들의 들판>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의 말을 전하려고 했던 그것도 문학의 유효성을 말하려는 작가의 몸짓이 아니었겠는가. 그 몸짓에 이어 ‘공지영 소설의 한 절정’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신작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보고 있노라면 작가 공지영이 문학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한 걸음 더 앞에서 강렬하게 느낄 수가 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서로’를 비추면서 또한 ‘보는 이’들을 비추는 거울 같은 두 명의 주인공을 통해 ‘살아가는 것’을 이야기한다. 우리를 비추는 첫 번째 거울은 이른바 ‘잘 나가는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화려함 속에서 빈곤을 허덕여야 했던, 가수가 되어 화려한 무대에 올랐지만 사는 동안 죽고 싶어서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던 미대 교수 ‘유정’이다.
두 번째 거울은 세 명의 사람을 죽여 사형선고를 받은 ‘윤수’다. 유정과 윤수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마치 다른 차원에서 존재하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유정의 고모이자 윤수를 달래주려는 모니카 수녀 덕분에 다른 차원의 이들을 서로의 눈을 보게 되는데 그 ‘마주침’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과 독자들의 ‘마주침’과도 같다.
‘몰랐다’고 외면했던 어두운 곳을 보게 되었을 때 그것이 나와 전혀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느끼는 서글픔과도 같은 그것은 윤정이 윤수를 보며 눈시울이 불거지듯이 작품을 보는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신다. 그것은 신파조의 사랑이야기도 아니고, 죄인의 억울한 인생이야기가 만들어내는 강요가 아니다. ‘살아있다’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이 주는 ‘감동’과 부조리한 세상의 어긋난 정의 때문에 만들어진 ‘아픔’이 신의 장난처럼 비극적으로 서로를 찾아갈 때 그것은 필연적으로 눈물샘을 자극한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강간에 당한 피해자가 다시 상처를 받아야 하는 사실이나 자본 때문에 밤새 떨어야 하는 사람들의 현실 등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조명하고 있는데 가장 구체적인 것은 ‘사형제도’로 볼 수 있다. 삶과 죽음을 인위적으로 설정해놓을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일까? 또한 오해 속에서 죄 없는 이를 죽일 수 있다는 혐의 때문일까? 작품 속에서 사형이라는 단어를 바라보는 저자의 눈길이 알베르 까뮈나 빅토르 위고의 그것과 비슷하게 여겨지는 건 그 탓일 테다.
환경은 전혀 다르지만, 인생의 밑바닥에서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내야만 했고 몇 번이나 무릎을 꿇었던 그들은 서로를 거울처럼 여기게 된다. 그 과정은 세속적인 해석이 아닌, 인간들이 만들어낼 수 가장 아름다운 정신적 행위로서의 ‘사랑’이다. 또한 이들과 함께 등장하는 사람들을 통해 더불어 또 하나의 위대한 정신적 행위인 ‘용서’가 등장해 사형수인 윤수는 천국에 가까이 다가간 사람처럼 보이고 윤정은 어제와 다른 사람으로 오늘을 맞이하게 된다.
윤수가 윤정을 보며 느끼듯, 윤정이 윤수를 보며 느끼듯 이들은 서로 닮아 있다. 그것은 거울과도 같은데 앞서 말했듯이 그 거울은 작품을 바라보는 작품 밖의 사람들에게도 보여 진다. 무슨 뜻일까? 상처 입고, 눈물 흘리고, 세상으로부터 배신당해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루에 몇 번이나 하는 우리네 사람들이 우리와 닮은 그들을 보면서 ‘살아있다는 것’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사랑과 용서를 나눌 수 있는 삶, 그것을 누릴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축복을 이야기하기 때문인가. 신영복 교수의 말처럼 살아간다는 것이 곧 상처받는다는 것이겠지만 그 속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을 하기 때문인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불편한 책이다. 이 점은 이전에 발표됐던 작가의 작품들과 확연히 다른 점이다. <별들의 들판>도 읽기가 수월한 책은 아니지만 이 작품은 더하다.
허나 신영복 교수가 ‘서경’을 해석하며 말했듯이 불편한 것이야 말로 우리의 정신을 깨어 있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그것이 오늘날 문학이 해낼 수 있는 또 하나의 역할이 아니겠는가. 저자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읽는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보고 싶지 않았던 곳을 보게 하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그것을 탓할 수는 없다. 그것은 언젠가는 했어야 하는 일이다. 저자는 작품을 통해 그것을 촉구했을 뿐이다.
저자는 작품을 책상 앞에서 글을 쓰지 않았다. 그것은 본인 스스로 말하지 않아도 작품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다. 사회 구석구석을 보려고 했던 그 노력, 설사 그곳이 더러운 거품들이 들 끊는 하수구일지라도 피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저자는 펜 끝에서 확인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작품을 통해 말을 토해내는 인물들의 절박함을 자신의 것인 양 느낄 수 있는 것도 작품이 지닌 가치 중 하나다.
장편소설로는 7년 만에 발표한 공지영 신작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이전에 발표했던 작가의 작품들이 많은 이들의 가슴을 건드렸다면 이 작품은 가슴 속을 파고든다. 작가의 작품 중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만큼 격동적으로 사회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든 적은 없었다. 광고 같은 말이지만 이 작품을 두고 ‘공지영 소설의 한 절정’이라고 말하는 것이 허튼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공지영 소설의 한 절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가치가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도서정보 사이트 '리더스가이드(http://www.readersguide.co.kr)'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