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앉아 있으니 답답함과 불안감이 비행기의 소음처럼 증폭된다. 그나마 손에 잡히는 건 기내잡지 뿐, 영어로 도배되어 있다보니 보지 않았는데 무언가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 책을 펼쳤다. 앞 뒤로 뒤적거리는데 낱말퀴즈(Cross word puzzle)가 있다. 그중에 가로 94번 문제가 눈을 확 잡아챈다.
질문의 내용은 '한국의 차는 무엇인가?'이다. 답은 누군가가 벌써 표시해 놓았다. 'KIAS'라고. 한국 브랜드 자동차가 '기아'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미국 도로를 달리는 다양한 자동차들 속에 국산 브랜드의 자동차를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해를 거듭할수록 한국 자동차의 종류와 수가 늘고 있다. 미국 비행기의 기내에서도 한국자동차는 달리고 있었다.
에피소드 #26
점심을 먹으러 아침에 빨래방에 갔다오면서 봐 둔 록키(Rocky)네 가게로 갔다. 록키네 식당은 중국식당이다. 점심때는 뷔페식으로 운영하는데 주 종목은 국수(noodle)다.
록키의 아버지가 안내해준 자리에 앉아 메뉴를 보는데 건너편에 있던 붉은 벽이 움찔움찔 움직인다. 그것은 벽이 아니라 소형차 크기의 비대한 사람 등이었다. 살더미 때문에 머리와 팔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친구들과 함께 온 그는 말도 하지 않고 게걸스레 먹기만 했다. 거의 움직이지도 않았다. 접시를 다 비우고 새로운 뷔페음식을 담을 때만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내가 주문한 국수가 나온 짧은 시간 동안 아마 다섯 접시는 비웠을 것이다.
나는 뷔페를 먹지않고 록키네 전문인 국수, 그것도 스촨(사천)식 소고기 국수를 주문했다. 예상했던 매운 스촨식 음식은 아니었지만 바특한 육수에서 알근달근한 맛이 배어나왔고 면발의 찰기도 적당했다. 가격은 다른 지역의 중국식당에 비해 반 값에 불과한데 양은 두 배로 많았다.
먹다가 지쳐 젓가락을 놓았는데도 국물사이로 면발이 가득이다. 국수에 점령당해 불룩한 배를 기분좋게 두드리고 있으니 록키가 행운의 과자를 가져다 준다. 과자를 쪼개보니 '1온스의 조심은 1파운드 치료의 가치가 있다(An ounce of prevention is worth a pound of cure)'라고 적혀있다. 행운의 숫자도 함께 들어 있다. 한국에 돌아가면 로또를 해봐야 겠다. 주인아저씨의 후한 인심처럼 행운이 찾아올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옆 테이블의 비만아저씨는 또 접시를 채우러 일어난다. 중국사람은 계산이 빨라 항상 주판알을 튕긴다고 하던데 록키네 아버지는 카운터에 앉아 모른 척 하고 있다. 엄청 손해일텐데. 하지만 내가 먹은 국수의 양에서도 알 수 있듯이 록키네 가게는 음식 앞에서 쪼잔하게 주판알을 튕기지 않는 넉넉한 인심의 가게였다.
에피소드 #27
범상치 않은 중국음식점에서 배를 채운 후, 숙소에 돌아와 미적거리지 않고 마감을 마쳤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무작정 차를 몰았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이어지는 길을 따라 달렸다. 물론 록키네 가게에서 받은 행운의 과자에 적힌 대로 조심해서 운전을 했다. 길은 달라스 시내로 자동차를 인도했다.
하늘을 가리는 다운타운의 마천루를 지나자 허름한 단층의 건물들이 툭 트인 하늘을 선사한다. 같은 하늘아래 최첨단 빌딩숲과 낡은 단층집이 부조화의 극치를 이룬다. 멈추지 않고 자동차의 가속페달을 밟았다. 자유를 찾아 떠난 '델마와 루이스' 앞에는 절벽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내가 가는 길의 끝에는 호수가 있었다.
러브호텔도 없고 음식점도, 카페도 없는 그냥 바다와 같은 호수가 오롯이 있었다. 그곳에는 얄푸른 하늘과 하양 구름이 소리없이 담겨 있었다. 차에서 내려 호수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바라보았다. 시나브로 태양이 사그라들자 호수도 검게 물들며 잦아들기 시작했다.
세상이 어둠에 아슴아슴해지며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자동차의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어둠에 묻히는 검은 도로를 다시 달렸다. 숙소를 향해서.
덧붙이는 글 | -2005년 4월 18일부터 19일까지의 일입니다.
-홈페이지 www.seventh-haven.com(일곱 번째 항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