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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3 장 방관(傍觀)

운령은 번잡한 마음에 정원을 이리저리 걷다가 자지러질 듯 놀랐다.

"……!"

정말 뜻밖이었다. 어느새 그녀의 옆에 있던 당새아는 무릎을 꿇고 절을 하고 있었다. 검은 무복에 머리는 대충 뒤로 빗어 넘긴 후 질끈 묶었다. 보통사람보다 머리통 하나 정도는 큰 체구였고 바위처럼 단단해 보이기는 하나 한편으로는 주먹코와 왕방울 같은 큰 두 눈은 오히려 순박하게 보이기까지 한 장년인이었다.

"오랜 만에 보는구나. 운령."

그녀는 공손하게 무릎을 굽히며 인사를 했다. 대사형(大師兄)이었다. 나이로 본다면 아버지뻘 이상이었다. 그녀는 혼란스런 상태에 빠졌다.

"어쩐 일로 이곳까지…?"

그녀는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풍철한의 일 때문에 변명이라도 하러 온 것일까? 하지만 그녀가 아는 대사형은 변명 따위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타인의 잘못에는 너그러워도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너무나 엄격한 사람이었다.

"걷자꾸나."

그의 말에 그녀는 그의 뒤를 따랐다. 아직도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간 고생이 많았겠구나."

"고생이야 대사형만큼 했을라구요."

그녀는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며 어색한 미소를 띠웠다. 대사형이 이곳까지 온 것은 사건일 수가 있었다. 그저 자신을 보러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야. 셋째와 네가 아니었다면 삼년이란 짧은 기간에 그토록 방대하고 완벽한 준비를 할 수 있었을까? 나는 네가 자랑스럽구나."

"사형."

평소 별로 말이 없던 대사형은 오늘따라 유난히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자신이 아무리 조잘대도 그저 씨익 웃고 말았던 예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헌데 그토록 영민하고 명석한 운령의 두뇌가 왜 갑자기 미몽(迷夢)에 빠졌을까? 나 같이 우둔한 사람은 생각하지도 못할 비책(秘策)을 술술 풀어내던 운령이 왜 먼 곳을 보지 못하고 눈앞의 소소한 일에 연연하고 있을까?"

마치 아버지가 아끼는 딸에게 하는 말투와 같았다. 질책은 아니었지만 나무라는 것에 다름없었다. 아무리 명석한 그녀라 할지라도 대사형의 내심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 어떤 윗사람보다도 조심스러웠다.

"무슨 말씀이온지?"

"그 아이 때문이냐? 네 혜안이 감기고, 여인네들이나 납치하는 부끄러운 짓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담천의를 말함이다.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아무리 비겁한 짓이라도 저질러 그를 죽여야 한다고 합리화했던 일이었다. 대사형 역시 강명 사형과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런 것이라면 자신은 아무리 비겁한 계책을 내었다 하더라도 사형제들 앞에 떳떳할 수 있었다.

"사형. 비원이 그를 통하여 얻으려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잖아요. 비원이 그토록 그에게 공을 들이는 이유가 무언지 이미 대사형께서는 너무나 잘 알고 계시잖아요. 물론 제가 신검산장을 몰랐고, 풍철영이 어떤 신분인지 미리 파악하지 못한 잘못은 있어요. 그 첫걸음이 바로 신검산장이라는 사실도요."

그녀는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사형의 말대로 여인네들이나 납치하는 짓은 파렴치한 일이다. 부끄러운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목적은 그런 사소한 부끄러움을 합리화시켜 주고 정당성을 부여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만약 비원이 그를 이용해 과거와 같은 힘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에게 적지 않은 걸림돌이 될게다. 하지만 말이다. 운령."

그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과거와 같이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옛날이야기 하나 해볼까? 아주 지독한 토호(土豪)가 있었지. 이 놈은 주위 사람들에게 원성이 자자했는데도 처세술이 아주 뛰어난 놈이었어. 세상이 변하면 변하는 데로 온갖 아부와 협작으로 부(富)를 늘려 나갔지. 같은 동족이란 생각도 없었어. 몽고 놈들에게 붙어서 오히려 몽고놈 들보다 더 지독하게 착취한 놈이 바로 그놈이었으니까."

운령은 대사형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얼핏 알 수 있었다. 방사형에게 대사형의 과거를 들었던 것도 같았다.

"한 사람이 그를 죽이려고 마음먹었지. 그런 종자는 죽어 없어져야 많은 사람이 편할 수 있었던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이 없었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도, 만나 볼 수도 없었단 말이야.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그 집 우물에 무색무취무미의 독을 푸는 방법이었다. 그는 어렵게 그것을 구해 저녁을 지을 즈음 우물에 독을 풀었다.

"그 집 식솔은 물론 개와 닭까지 모조리 죽었지. 하지만 정작 그 놈은 죽지 않았어. 의심이 많은 놈이었거든. 독을 푼 사람이 잡혔고,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처형당했지."

독을 푼 사람은 대사형의 아버지였다. 대사형은 도망가야 했지만 일곱 살의 나이로 아버지의 목이 떨어지는 것을 사람들 틈에서 눈물을 흘리며 보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 뒤 십년 후 목숨이 그토록 질기던 토호는 대사형의 손에 난자되어 죽었다.

"하지만 내 부친이 한 짓을 옳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죄 없는 많은 사람들이 그 독으로 죽어가야 했던 것이 목적만 훌륭한 것이라 해서 그 행동을 합리화시켜 줄까? 이 우형은 모자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옳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구나."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운령은 가슴이 답답해 왔다. 그럼 무얼 어쩌란 말인가? 뻔히 일이 틀어질 것을 알면서도 그를 살려주어야 한단 말인가? 사형은 사소취대(捨小取大)란 말도 모른단 말인가?

"운령은 왜 그 아이를 적으로만 보고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그 아이 역시 우리와 다를 게 무어지?"

"그는 비원에서 키웠어요. 비원은 한 가지 목적으로 그를 만들어냈죠. 우리를 상대하기 위한 존재로 말 이예요."

머리가 영리한 사람은 자신의 판단을 절대적으로 믿는다. 언제나 자신의 판단이 옳았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도 두 손들 정도로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더 더욱 자신의 판단 외에는 믿으려 하지 않는다. 게다가 많은 독서량으로 풍부한 학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아주 현명하고 박학다식한 사람이 간혹 아주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당연하게 생각할 방도를 제쳐두고 일을 그릇 치는 경우가 있다. 그 스스로가 너무 똑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비원이 그를 키웠으니까… 비원의 목적이 그러하니까… 또 그렇게 될 것 같으니까… 다른 문제는 생각할 여지도 없이 그는 우리의 적이로구나. 그러니 죽여야 마땅한 것이고…."

대사형의 어눌한 말투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운령에게 질책이고 꾸지람처럼 들렸다. 운령은 점차 숨이 막혀오는 것 같았다.

"그가 무엇을 얼마만큼 알고 있을까? 그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어. 누가 스스로의 치부(恥部)를 드러내며 그에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할 수 있을까? 우리…? 아니면 비원…? 그것도 아니라면 오중회가?"

그는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운령은 왜 자신이 그를 죽이려 집착했는지 갑작스럽게 혼동이 오기 시작했다. 무엇이었을까? 그의 존재를 아는 순간 그녀는 매우 당황했었다. 그것도 세 번째 사형이 그가 누군지도 모르고 죽이려했다가 실패했다는 말을 듣고 그가 누군지를 조사하면서 은연중 그렇게 굳어진 것 같았다.

(왜 좀 더 차분하지 못했던가? 예상치 못한 변수가 나타났다고 해서 무조건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란 고정관념 때문이었을까?)

그녀도 알 수 없었다. 단지 그가 담명 장군의 아들이고, 비원이 키워냈다는 말을 듣는 순간 결정된 일이었다.

"스스로 불리함을 자초하는 일일지라도 우리가 어쩌면 있었던 사실 그대로 알려주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가 있다."

"사실 그대로…? 어떤 것이 사실인가요? 그에게 말해 줄 사실이 우리에게 있었던가요?"

"선택은 물론 그가 하겠지. 운령. 너는 미리부터 그가 비원의 의도대로 그 쪽을 선택할 것이라 확신을 가지고 있구나!"

똑똑한 사람에게 있어 가장 성가신 문제는 불확실함이다. 자신이 판단하고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비로소 완벽한 계획을 세울 수 있는 것이다. 완벽한 계획에 사람의 마음처럼 간사하고 불확실한 요인을 포함한다는 것은 차라리 계획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스스로 똑똑하다고 믿는 자들의 특성이다. 그리고 그들은 손쉽게 그 불확실한 요인을 제거하기 위하여 종종 무모한 일을 벌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선택일 뿐이다. 최소한 우리는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시간 정도는 그에게 주어야할 의무가 있다. 그가 선택한 후에 그를 죽여야 할지 결정을 해도 늦지 않는다. 내가 알기로는 지금까지 그는 최소한 우리에게 적대감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건 사실이었다.

"그것은 그가 우리를 모르기 때문이었어요."

꾸지람 같은 그의 말에 말대꾸는 했지만 그것 역시 같은 것이었다. 담천의가 모든 사실을 알고 나서 자신들에게 적대감을 보일 것인지 여부는 오직 그의 판단에 따를 것이었다. 그것을 미리 짐작하고 확신한 것은 자신이었다. 하지만 대사형은 이 일에 대해 더 이상 탓하지 않았다. 이미 자신의 대답이 아무런 변명이 되지 못함을 아는 듯 고개를 숙인 운령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네가 똑같은 실수를 두 번 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말을 끊고는 기기묘묘한 형상의 나무가 늘어져 있는 구석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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