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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럴 리가? 비록 홍 대감의 아들 하나가 종적이 묘연하고 몇몇이 파옥을 하였다고는 하나, 홍 대감의 장남을 포함한 일가가 구몰되었고 그 추종자들도 대거 토포되지 않았사옵니까?"
유홍기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나름대로 경신년의 난이라면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인데 지금의 세력이 그때보다 크다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애꿎은 젊은이들이 토포 현장에서 관군에 맞서다 많이 숨지긴 했지. 허나 죽거나 체포된 자 태반은 쓸모없는 노인네들이었어. 어차피 한번은 치룰 역병으로 솎아낼 것은 솎아내고 더 튼튼해졌다고나 할까."
이 말을 할 때 권병무의 표정엔 아무런 동요도 일지 않았다. 마치 남의 집 이야기를 전하듯 그저 덤덤할 뿐이었다. 유홍기는 혹시 권병무가 대동계와는 연관이 없는 인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럼 그때의 계원들이 다시 일을 꾸민단 말씀이오니까?"
"많은 이야기를 해줄 수는 없겠네. 그것이 피차에게 좋아. 아까 말했듯 여기 일은 여기 사람들이 알아서 할 몫일세. 자네들은 그저 뒷날을 대비하며 사람을 키워주면 되네. 앞으로의 일은 나조차도 알 수가 없네. 이미 내 손을 떠난 일이지, 모든 일은 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 달렸어. 내 그 아이들을 위해서 자네들에게 부탁을 남기는 것일세.
난 그러지 않았으면 하네만…. 본시 젊은이들 성정이라는 게 참을성이 모자라지 않나. 많이 조급해 해. 그냥 놔두면 곰삭아 무를 것을 자꾸 생채기를 째려 하네. 그냥 놔둬도 지금의 왕조는 망하게 되어 있는데 애써 그 시기를 앞당기려 하는구먼. 딴엔 자신들이 손을 쓰기 전 혹 외세에 의해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나 염려가 앞서는 모양일세.
물론 서양에 침탈당한 청국이나 서양 물이 배어가는 일국(일본)의 추세를 보면 그런 염려가 기우라고 하기만은 어렵지. 허나 그런 일들이 5년, 10년 사이 벌어질 일은 아닐 듯한데 그리 조급해 하는구먼.
하여튼 대동계 젊은이들도 무언가 결정을 내리겠지. 일이 잘 되면 조만간 자네들이 키운 인재가 쉬 쓰일 날이 있을 것이고 여의치 않으면 자네들 제자의 세대에서 일을 이루는 수밖에. 내가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것들이었어."
"어르신께서는 저희를 같은 무리로 여기시는 것이옵니까?"
"여기고 말고가 없네. 난 항상 자네들 무리였어. 추후로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네. 다만 자네들은 자네들 나름의 방법이 있을 테고, 나와 가까이 있는 것이 자못 위험할 수 있기에 떨어뜨려 놓고자 하는 것이니 그리 알아주게."
"어르신의 말씀 잘 알겠습니다."
"때가 되면 박규수 그 분께는 따로 밝힐 것이니 이후 대동계의 존재에 대해서는 토설을 하지 않았으면 하네. 어느 누구에게도."
"예, 알았습니다."
유홍기와 오경석은 동시에 대답을 했다. 그러면서 언뜻 둘 사이에 눈길이 오갔다. 짧은 순간의 교차였지만 둘은 평안 감영에서의 일을 주고받는 것이리라.
'혹 평양감사와 군관 윤석우가 찾는 마두산의 인물들이 대동계원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계를 적발하기 위해 영중과 영일이라는 기찰 포졸 둘이 잠입하였음을 고하여야 하는가? 고하여 알리지 않을 경우 기찰 포졸이든 대동계든 쌍방간 피 부를 일이 생기지 않겠는가?'
'알린다면 그들 형제를 살릴 수 있겠는가, 오히려 피를 부르는 것 아닌가?'
'글쎄….'
찰나에 그친 눈빛 교환이었으나 오경석과 유홍기는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고 받아들인 것 같았다.
"안주 마두산에서 양이의 기술을 모두 결집시킨 총포가 사용되었다 합니다. 감영에서는 그들을 찾고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알고 계시는지요?"
유홍기가 먼저 권병무의 의중을 떠 보았다.
"무어라 말하기가 어렵구먼."
"저희에게도 감추어야 하는 내용이 올 습니까?"
유홍기가 짬을 놓치지 않고 재차 물었다.
"나는 이 마을의 촌주 노릇이나 하며 살 뿐 다른 일에 대해서는 언급이 어렵네. 이제까지 내가 전한 복안이 내가 말할 수 있는 것 전부일세."
"그럼 어르신께서 실질적 좌장이 아니오란 말씀이십니까?"
"말하지 않았는가. 이제 젊은이들의 시대라고. 나 같은 70가까운 늙은이가 나설 때가 아니네."
"그럼 누가…?"
"그 또한 알 수가 없지. 너무 많을 걸 알려하지 말게. 자네들이나 계의 젊은이들이나 그리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올 수가 있어. 적당한 때 모습이 드러나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일세."
"예. 그리하겠습니다."
오경석과 유홍기가 같이 대답했다.
"예까지 왔으니 기범이 얼굴은 한 번 보아야하지 않겠나? 얘, 정준아!"
대청에서 행랑까지의 거리가 꽤 멀어서인지 권병무의 입에서 꽤 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럴 때 보면 전혀 노인 같지가 않았다.
"예~ 어르신."
말이 전해지기가 무섭게 젊은이 하나가 행랑을 나서 마당을 뛰어 왔다.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 행랑이 대문까지 늘어서 있는데 마치 동헌 같은 냄새가 물씬 풍겼다. 대청에 앉은 채로 대문 너머의 마을을 조망할 수 있는 것이 건물의 입지까지 관청을 닮았다.
"기범이에게 연락을 띄워 집에 귀한 손님들이 오셨으니 짬을 낼 수 있는가 여쭈어라."
권병무가 정준이라는 젊은이에게 말했다.
"그러잖아도 범우리(흑호대 군영)에서 나선 후 이쪽으로 향했다는 전문(電文)이 있었습니다. 손님과 계시기에 굳이 말씀을 올리지는 아니하였습니다."
정준이가 대답했다.
유홍기가 찬찬히, 말하고 있는 정준의 얼굴을 훑었다. 이제 겨우 스물을 넘었을까 싶은 젊은이인데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무명옷에 댕기 머리로 평범한 복장을 하고는 있으나 눈매가 예사롭지 않은 청년이었다. 그다지 그을리지 않은 피부도 이지적인 맛을 더해주고 있었다. 막 굴러 사는 듯 하나 어딘지 먹물의 냄새가 강하게 흘렀다.
"그 연락을 받은 지 얼마나 되었느냐?"
"한 시 십 분 가량… 험, 미시 초쯤이었습니다."
정준이 말을 내뱉다 정정했다.
유홍기는 깜짝 놀랐다.
'한 시 십 분? 대청에 큼지막한 자명종이 놓여 있는 것을 일찌감치 보았으나 시간을 이렇게 구분한다?'
권병무야 역관 출신이니 집안에 자명종이 있는 것은 오래 전부터였고 유홍기 자신 또한 자명종을 가지고 있는 처지였으나 정준이라는 젊은이의 허리춤에 언뜻 보이는 회중시계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준아, 괜찮다. 이분들 앞에서는 그냥 말하여도 되느니라. 새삼 무엇을 그리 놀라는가. 자네들에게 보여줄 게 하나 있네. 정준아, 한 번 보여드리도록 하거라."
권병무가 정준을 앞세웠다. 일행은 마당을 가로 질러 정준의 행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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