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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화는 청 황제 홍타이지와 직접 대면한 이후 군영을 탈출할 기회를 잡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다. 계화가 단편적으로 접하는 소식으로는 남한산성으로 진군한 조선의 원군은 이미 물리쳤으며, 성안의 사기를 꺾기 위해 청나라 군사들이 한양을 약탈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정말인지 군대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퍼트리는 말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청의 진영은 날이 갈수록 사기가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정명수는 이제 날 죽이려 할지도 모른다. 여지껏 그놈의 말은 무조건 거부해 오지 않았는가?’
정명수는 술에 취한 밤이면 계화가 잠들어 있는 천막을 찾아왔지만 그때마다 계화는 차라리 죽어버리겠다며 소리를 질러 위기를 모면하곤 했다. 그나마 정명수가 계화를 자신의 곁에 놓아둔 단 하나의 이유마저도 청 황제의 등장으로 무의미해졌다.
“이보게.”
계화가 혼자 고심하고 있는 사이 천막이 열리며 갑주를 입은 자가 들어섰다. 바로 투루아얼이었다. 계화는 깜짝 놀라며 옷고름을 단단히 부여잡았다.
“당장 여기서 나가자.”
투루아얼은 계화의 손목을 잡더니 끌듯이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계화는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조선군이 올라오고 있어 우린 남쪽으로 간다. 때를 보아서 넌 이곳을 나가거라.”
투루아얼의 말에 계화는 왜 자신에게 이런 호의를 베푸는지 알 수 없다며 망설였다. 투루아얼은 그 말에 버럭 화를 내었다.
“왜 조선 사람들은 하나같이 우리 여진 사람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인가? 넌 여기 있고 싶어 하지 않지만 통사가 널 놓아주지 않는다. 그게 보기 싫을 뿐이다.”
이렇게 출발한 투루아얼이 이끄는 청군은 곧 남쪽에 주둔하고 있던 백양굴리가 이끄는 부대와 합세해 수원의 광교산으로 진군해 갔다.
“조선군 6천명 중 선봉 2천이 광교산 계곡아래 진을 치고 있다. 우리는 5천의 병력으로 아침에 이곳을 공격해 적의 기세를 꺾어 놓는다.”
이전에 있었던 쌍령고개 전투에서 청나라는 이 천 명도 채 안 되는 적은 병력으로도 만 여 명의 조선군을 쫓아내었기에 백양굴리는 자신만만해 했다. 투루아얼은 신중론을 폈다.
“조선의 총포는 쉽게 볼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아침에 공격하는 것이다. 여기 계곡에는 아침에 안개가 끼어 화약에 습기가 많이 스민다. 그만큼 총포를 사용하기 용이하진 않을 것이다.”
백양굴리는 황제의 사위이기도 했다. 그의 용맹성을 높이 산 홍타이지가 일찌감치 그를 부마로 삼고 이번 조선원정에 데려온 터였다. 많은 전공을 세워 그 기대에 보답하는 것이 백양굴리로서는 절실히 필요했다.
“조선군은 전투에만 임박하면 병사들이 제대로 싸울 마음을 먹지 않고 있고, 우리 군의 수도 많으니 이번 싸움은 그리 어려울 것이 없네. 황제께서는 날 걱정하는 마음에 자네를 내려 보낸 것이나, 이미 쌍령에서 대청군의 기세를 보여주지 않았나?”
백양굴리는 자신만만해 했지만 투루아얼은 마음속 깊이 있는 불안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하지만 감히 내색은 하지 않고 병력의 포진을 이리저리 논하며 내일 있을 싸움을 준비한 후 계화를 찾아갔다.
“내일은 큰 싸움이 있을 것이다. 산 아래와 수원에 조선군이 머물러 있는 모양이다. 산을 내려가지 말고 둘러서 수원으로 가거라.”
투루아얼은 품에서 짧은 단도를 건네주었다. 손잡이에 보석이 박힌 것이 한눈에도 값어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진중에서 줄 것은 없구나 이것은 내 성의이니라. 진중을 빠져 나갈 때까지는 병사들이 널 호위할 것이다.”
계화는 눈물을 글썽이며 차마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 투루아얼은 그런 계화의 손을 꼭 잡았다.
“이 전쟁이 끝나면 심양(당시 청의 수도)으로 와 줄 수 있겠나?”
계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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