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진실게임이다. 4·3 당시 불법군법재판에 의해 끌려가거나 희생된 이들의 유족들은 아직도 생사를 모른 채 고인(?)의 생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1948년 이후 이들이 무엇 때문에 끌려갔으며, 또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희생됐는지, 그리고 시신은 어디에 있는지 그 후손들은 아직도 모르고 있다.
4·3 수형인 대부분이 형식적이고 비밀리에 재판을 받고 수감생활을 했으나 이에 대한 진상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대통령이 공식 사과하고 정부의 4·3 진상보고서까지 나왔지만 여전히 4·3 진상규명은 갈 길이 멀다.
10명 중 7명 "생일날 제사 지내"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공동대표 고상호·고창후·김용범·김평담·윤춘광·양동윤)가 조사한 '대구(목포)형무소 수형 희생자와 그 유족들이 처한 현실과 의식' 설문 결과는 다소 충격적이다.
대부분 사망일자를 모르는 유족들은 10명 가운데 7명이 희생자 제사를 '생일(67.8%)'에 맞춰 지내고 있다고 답했다. 사망일자를 알고 있는 유족은 단 25.6%에 그쳤다.
희생자 가운데 63.2%는 봉분은 고사하고 비석도 없이 방치되고 있었다. 봉분(헛묘까지 포함)을 갖춘 경우는 14.8%에 불과했고, 봉분 없이 비석만 있는 경우 또한 22.8%에 그쳤다.
수감사실 "2000년 이후에 알았다" 22%
또 유족의 78%는 희생자들이 형무소에 수감된 사실을 사건 당시 또는 조금 지나서 알았다고 답했다. 국민의 정부 당시 추미애 국회의원에 의해 수형인 명부가 공개된 2000년 이후에 알았거나, 지금도 잘 모르고 있다는 유족도 5명 중 1명꼴로 무려 22%를 차지했다. 4·3 특별법은 1999년 12월에 제정됐다.
형무소 수감사실을 알게 된 경로에 대해 절반이상이 '수감 당시 편지(엽서)가 와서 알게 됐다'(54%)고 답했고 '수감 후 인편을 통해'(16.1%), '수감되고 한참이 지나서 누군(수형인명부 등)가 말해줬다'(29.9%)'고 응답, 정부차원의 통보는 거의 없던 것으로 조사됐다.
그리고 수감이후 행방에 대해 유족들은 '행방을 모른다'(40%), '누구에게 죽었는지 모른다'(52.5%), '어느 지역에서 희생됐는지 모른다'(58.3%) 등으로 답했다.
'당시 사실 가족에게 통보조차 안돼'...'아직도 이유 모른다' 79.8%
4·3 도민연대는 "이 사실은 당시 정부가 수형사실을 가족에게 공식적으로 통보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사례"라며 "또 대구형무소 재소자의 행방에 대한 진상이 거의 밝혀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특히 "20%의 유가족들이 '수형인명부' 공개 이후에 명부 등을 통해 수감사실을 확인했다는 사실은 오랜 기간 행방불명 희생자 유가족들의 심적 고통이 심각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대부분 유족들은 희생자가 군경에 의해 체포되고 군사재판을 받아 수감된 이유에 대해 '이유가 뭔지 모른다(별 이유 없이 끌려갔다)'(79.8%)고 답해 1948년~49년 사이에 일어난 군사재판의 문제를 재차 제기했다. 또 일부는 '모함과 누명에 의해 끌려갔다'(16.6%)고 답했으며 '남로당 또는 무장대 활동을 하거나 도와줘서'는 3.6%에 불과했다.
유족들은 또 희생자들이 '감옥에서 병사 또는 옥사했을 것이다'(40.4%), '6·25전쟁에 돌아가셨을 것이다'(18.8%)라고 사망의 실체를 정확히 모르고 있었으며, '전혀 행방을 모른다'도 28.7%에 달했다. '어느 곳에서 희생당했는지 알고 있다'는 유족은 10명 중 4명(39.9%)에 불과했다.
"4·3 수형인 진상규명 조속히 재개해야"
수형인 희생자 유족 대부분(70.4%)은 4·3 특별법 제정 이후에 진행된 희생자 결정, 2003년 10월 4·3 진상조사보고서 확정과 대통령 사과에도 불구하고 4·3문제 해결에 대해 '불만족스럽다'(매우 불만족 3.6%, 불만족 하는 편 66.8%)'고 밝혔다. '만족하는 편'은 24.7%에 그쳤다.
불만족스런 이유에 대해서는 '수형희생자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되지 않았다'(61.8%)고 응답, 정부의 4·3 해결과는 거리가 있었다. '보상 등 실질적인 혜택이 없다'(22.9%)는 응답도 10명 중 한명 꼴이었다.
유족들은 수형인과 관련한 진상규명과 희생자 결정이 미비한 이유에 대해서는 '정부와 중앙위원회의 의지 부족'( 66.8%). '반대세력(군과 경찰)'(6.3%)으로 나타나 정부와 4·3 중앙위원회의 의지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날 제주도의회 도민의 방에서 기자회견을 가진 4·3 도민연대는 "이번 조사는 4·3 수형인 문제에 대한 실체와 현주소를 확인케 한 사례"라며 "당시 불법 군사재판과 관련해 형무소 수형 희생자의 진상을 명백히 규명해야 한다"며 정부와 4·3 중앙위원회에 대해 4·3 수형인 희생자 진상 규명작업을 촉구했다.
한편 이번 설문조사는 지난 달 초(3~12일) 제주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가 여론조사전문기관인 미래리서치에 의뢰해 이뤄졌다. 조사 대상은 수형인 명부에 실린 대구(목포) 형무소 희생자 500명 가운데 신고 된 희생자 357명에서 사망자 11명과 후유장애자 6명을 제외한 340명이다.
| | "일체 사람 있는 곳은 가지 않아" | | | 대구형무소 10년 복역한 남제주군 안덕면 양규석씨 | | | |
| | ▲ 안덕면 화순리에 사는 양규석(84)씨. 4·3이 일어난 1948년 5, 6월께 그의 인생역정은 시작됐다. | ⓒ양김진웅 | | 최근 해군기지 건립 문제로 폭풍의 한가운데 있는 남제주군 안덕면 화순리.
1922년 12월 22일생(음력) 양규석씨(84)는 줄곧 화순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굳이 밖이라면 일제강점기인 15세 때부터 10여 년 동안 일본 오사카 니시쿠에서의 공장생활과 4·3 당시 형무소에서 10년 가까운 수형생활을 한 것 밖에는 없었다.
그는 4·3이 일어난 해인 1948년 5, 6월께 아버지와 함께 지붕에 이을 새끼를 꼬다 어느 날 마을 출신 한 경찰관의 집을 방화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쓴 채 이후 험난한 인생역정을 살아야했다.
수개월에 걸친 모진 고문 끝에 광주지방법원에서 1948년 12월 16일 포고령 제2호 위반으로 징역 10년형을 선고 받았다. 그 후 대구형무소로 이감된 그는 6·25가 터지면서 상소를 포기, 형량을 2년 남겨 둔 1957년경에 출소했다.
귀향한 후에야 이미 집에서는 형무소에서 죽은 줄 알고 대소상을 치른 어처구니없는 사실도 알았다. 그는 지금도 "왜 그 경찰관이 자신을 방화 혐의자로 지목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출소 이후 줄곧 농사를 지으며 살아 온 그는 지금도 전기고문의 후유증을 겪고 있다. 지금도 경찰에서 뒷조사를 할까봐 후환이 두렵다는 그는 "일체 다른 사람이 있는 곳은 다니지 않았다"고 말했다. / 양김진웅 | | | | |
| | "4·3진상규명 없는 4·3사업은 미봉책" | | | 양동윤 4·3도민연대 공동대표 "정부 등 적극 나서야" | | | |
| | | ▲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 양동윤 공동대표 | ⓒ양김진웅 | 제주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 양동윤 공동대표는 "명확한 진실규명도 없이 무조건 희생자로 선정하자는 것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며 "이는 오히려 4·3 해결이 거꾸로 가는 셈"이라고 말했다.
그는 "조사 발표 내용에서 드러나듯 57년 전 도민의 아픔과 고통은 상처로만 남은 채 그 진상은 전혀 규명되지 않고 있다"며 "4·3 문제 해결의 핵심은 진상규명이며 4·3 진상규명이 선행되지 않는 어떠한 4·3 사업도 미봉책에 불과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4·3 수형인에 대한 희생자 선정과 관련해 그는 "지난 3월 희생자 심사가 이뤄진 지 3년 만에 606명의 수형인이 희생자로 선정된 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진일보한 일"이라며 "하지만 이들이 어떻게 누구에 의해, 언제 죽었는지 진실이 규명되지도 않은 채 선정된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또 "4·3 당시 수형인 수감사실을 법무부가 공식적으로 가족에게 통보하지 않았음을 물론 유가족 절반 이상이 수감자가 직접 쓴 편지를 통해 알았다는 것은 정부의 무책임함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근거"라고 4·3을 대하는 정부의 안일함을 지적했다.
이어 "현재 각처에서 4·3특별법 개정 논의가 있으나 여기에서도 수형인 희생자 문제는 비켜서고 있다"며 "정부는 아직도 규명되지 않은 4·3 진상을 즉각 조사하고, 4·3 중앙위원회와 관련기관은 즉각 4·3 진상규명사업을 재개해야한다"고 촉구했다.
양 공동대표는 "아직 제주도민들이 느끼는 4·3은 평화와 거리가 멀다"며 "어떻게 누구에게 죽었는지조차 밝히지 못하면서 (위령비 제작 및 위령제 등으로) 장소만 기리는 것이 과연 얼마만큼 의미가 있겠는가"라고 되물었다.
그는 "좀더 정확한 진상규명이야말로 곧 4·3의 '해원'이자 '상생'일 것"이라며 "4·3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이 곧 정부와 제주도민이 원하는 '평화의 섬'으로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 양김진웅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