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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4 장 살인멸구(殺人滅口)

풍철영의 전신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조국명은 그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저토록 화를 내는 것을 본적이 없었지만 저것은 분명 분노였다. 얼굴이 시뻘개지고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가 뒷목을 감싸 안고 쓰러진다 해도 하등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이… 이 늙은이들이 정말…."

그는 무너지듯 태사의에 몸을 파묻었다. 기운이 쭉 빠졌다. 그가 지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틀 내내 그는 운기 중에 홍염장을 맞은 청송자가 주화입마에 빠져드는 것을 막으려 무진 애를 써야 했다. 더구나 부상당한 갈유의 정신을 돌리려고 그의 내력이 바닥날 때까지 진기를 주입시키는 방법밖에 없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갈유가 그나마 정신을 차려 입으로라도 치료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홍염장을 사용한 자는 나충일과 함께 들어 온 중의(仲儀)란 자였다. 멍청스런 나충일과 한 패인지 아니면 그들의 의도를 모르고 마누라를 데리고 튀어버린 황원외를 찾으려는 목적이 진짜였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중의와 선화는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들어왔다는 결론이었다.

문제는 석실에 중의 한 놈만 들어 온 것이 아닌 것으로 조사되었다. 중의란 놈은 청송자를 공격하고, 갈유를 죽이려했던 놈이었다. 하지만 정작 가군영의 시신을 화골산으로 녹이고 갈유의 옆구리에 독비를 박은 놈이 하나 더 있었던 것이다. 깨어난 갈유에게서 그 사실을 재차 확인했고, 그 자는 반드시 내부인물이라 생각했다.

석실 입구를 지키던 수하가 살해당하고 역시 화골산에 의해 사라진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수하가 경계할 필요가 별로 없는 인물이 손을 썼다는 것이고, 또한 석실에 한번이라도 들어 왔던 자가 저지른 짓이었다는 결론이었다. 그 자는 수하를 살해하고 석실 문을 열어 놓아 중의가 들어오게 한 것이고 자신이 석실로 뛰어 들어 올 것이라 알고 피한 인물이기도 했다.

갈유가 중의의 공격을 피하면서 줄을 잡아당긴 행위가 무언지 아는 인물이 분명했다. 그 자는 자신이 석실로 뛰어 들기 전에 도망을 쳤던가, 아니면 중의와 싸울 때 조용히 사라졌을 것이다.

자신이 믿는 수하 중에는 그럴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면 구파일방에서 온 광지선사 일행 중 한명이 분명했다. 급한 일이 있을 때 그 줄을 잡아당기라고 말했을 때 같이 있었던 인물은 그들밖에 없었다. 그래서 넌지시 조국명과 담천의에게 조사를 시켰고, 무언가 결론이 나온 것 같은데 하늘이 노래지는 이 일이 터진 것이다.

"그 늙은이들… 뻔히 그 분의 뜻을 알면서…. "

허탈했다. 지금까지 그의 의도대로 잘 진행되고 있었다. 섭장천 일행이 들어오고, 철혈보 인물들까지 들어오자 뭔 일이 터지기를 바란 것도 사실이었다. 정작 석실 안에서 심각한 사건이 발생되는 것까지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동생도 무사하고 청송자나 갈유도 죽은 것은 아니어서 다행이라면 다행이라 생각했다.

더구나 지금까지 담천의는 그 분의 의도대로 움직여 주었다. 담천의의 치명적인 약점은 인간관계에 따른 감정이었다. 그것은 그의 부친이 가지고 있던 결정적인 약점이기도 했다. 그 분은 그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그것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했다. 모든 것을 가르쳐 주고 그에 대한 충격으로 어떠한 결정을 내릴지 모르는 위험보다는 자연스럽게 인간관계를 내세워 알게 하고 끌어안으려는 것이다.

그와 인간적인 관계를 맺고, 그를 내세워 일처리를 하면서 느긋하게 지켜보면 만사가 다 해결될 터였다. 그가 나서면 나설수록 풍철영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 신검산장의 장주가 두 명이라고 했던 말도 절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니 자신은 제쳐두고 담천의가 이 장원을 틀어쥐길 바랐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침묵하고, 냉소적인 그 인물들도 어쩔 수 없이 담천의를 중심으로 기지개를 켤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진행되는 것에 내심 흡족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헌데 이 무슨 날벼락인가?

(마노(馬老)… 이 늙은이가… 다된 밥에 재를 뿌리는구나.)

담천의가 왜 도노에게 갔을까? 더구나 그 자리에 왜 마노가 와 있었을까? 아니 가끔 두 노인네는 그곳에서 술을 마시곤 했다. 하지만 오늘 저녁의 일은 충동적으로 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뻔히 자신의 의도를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 분의 뜻 까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배신행위였다.

섭장천에게 그 아이를 데려간 것은 그의 부친의 일 말고는 없을 것이다. 섭장천은 무엇을 얼마만큼 알고 있을까? 무슨 말을 그 아이에게 해 줄 것인가? 왜 구효기는 그에게, 아니 왜 그 분은 그 아이에게 먼저 말을 해주지 못한 것일까?

자신이 아는 범위도 마노나 도노와 같은 정도일 것이다. 마노는 확실하게 말을 해주지 못하는 답답함으로 섭장천을 찾아갔을 것이다. 이미 꽤 시간이 흘렀으니 어느 정도 말이 무르익을 터였다. 풍철영은 발작적으로 일어섰다.

이미 모든 게 틀려버렸다.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도록 막는게 중요했다. 속이 탔다.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는 찻잔 대신 자기(瓷器)로 만들어진 주자(注子:주전자, 주담자)를 입에 대고 벌컥벌컥 마셔댔다.

냉정해져야 했다. 일이 틀려진다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올 것이었다. 이제 모든 것이 그 분의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그리고 그 첫 번째 안배가 시도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하면 그 뒤에 치밀하게 안배된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갈 터였다.

어쩔 수 없었다. 담천의를 내세워 모든 일을 처리하고자 했던 풍철영은 일을 처리할 때가 왔음을 느꼈다. 시기적으로 빠른 감은 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직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 실망하기는 일렀다. 또한 상황에 따라 반전시킬 수도 있을 것이란 실낱같은 희망도 가졌다. 그렇다면 결론은 한가지였다. 지금 섭장천과 마노가 담천의를 마주하고 있는 그 곳, 운봉소축으로 가는 일이었다.

"자네는 급히 이곳으로 모두 와주시도록 광지선사께 말씀드리게."

그 중 갈유에게 독비를 박아 놓은 놈이 끼어 있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대충은 누군지 감을 잡은 상태였다. 조국명이 몸을 일으켜 문으로 다가가자 풍철영은 다시 또 급하게 말했다.

"철혈보에게도 똑같이 전하게. 빠를수록 좋네."

"알겠습니다."

조국명은 대답과 함께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풍철영은 다시 태사의에 몸을 파묻었다. 철혈보는 유사시에 자신의 힘이 되어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어차피 같은 적을 상대해야 하는 처지가 아닌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어찌하면 이 사태를 수습해야 하는지 그들 모두가 이곳에 올 때까지 결정해야 했다.

(이제 그 노인네들은 침묵하지 않겠다는 뜻인가? 지켜봐 주기 싫단 말인가? 빌어먹을… 이 일은 감정적으로 처리할 일이 아니란 말이야… 망할 놈의 노인네들….)

마노와 도노가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이제 방관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있었다. 풍철영은 속으로 이를 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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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 자네 부친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지. 솔직히 버겁기도 했어. 자네 부친이 가진 그 균대위라는 힘 말이야. 더구나 우리를 잘 알고 있었기에 도망친다 해도 벗어나지 못할 것이란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이야."

섭장천은 마치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처럼 말하고 있었다. 간간이 마노가 끼어들기도 했지만 그의 말은 중단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 양반은 우리에게 와서는 쭉 둘러보더군. 그리고는 선택하라고 했지. 지금까지 흘린 피로도 족하니 아예 딴 생각 말고 이곳에서 조용히 살던지, 아니면 변방에라도 이주하겠느냐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때는 몰랐다. 설왕설래했지만 그들의 결정은 그곳에서 조용히 살겠다는 것이었다. 중원을 사랑하는 그들이 중원을 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조용히 살겠다는 약속을 다짐받고서는 떠났고, 그 뒤로 보지 못했다.

"얼마 후 우리는 그가 관직에서 물러났음을 알았지. 이미 금의위 군령부(軍令剖)에 소속된 인물 중 두 명이 우리에게 포섭된 상태였어. 강중장군이 그것을 이어받았더군."

"자네들에게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군."

"하지만 조심스러웠어. 정말 그가 나중에라도 이 일에 관여하지 않을까 걱정되었지."

"그래서 손을 쓴 것인가?"

마노는 계속 확인하고 있었다. 처음 질문과 변한 건 없었다. 섭장천이 답답하다는 듯이 억양이 조금씩 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 역시 지금 평정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의 억양은 어떠한 일에도 변한 적이 거의 없었다.

"자네는 정말 그렇게 믿고 있는 건가? 아니면 그렇게 믿고 싶은 건가?"

"아직도 자네는 대답하지 않고 있네."

"그를 죽이라고 황제의 칙령이 내려오지 않았나? 그가 왜 관직을 그만두게 된 것인가? 자신이 모시던 남옥대장군을 숙청하라고 하자 그것을 거부한 것이 아니냔 말일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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