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994년도에 조카 졸업식장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1994년도에 조카 졸업식장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 박희우
"아이고 불쌍한 우리 새끼. 잘 먹이지도, 입히지도 못했어. 이 죄를 어찌할꼬."
"어머니, 그런 소리 말아요. 어머니가 없었으면 어떻게 제가 있고 형님들이 있고 누님이 있고 동생이 있었겠어요."

저는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을 즐겨 읽습니다. 선생의 수필은 꾸밈이 없어 좋습니다. 선생은 수필을 청자연적에 비유했습니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라고 했습니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 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라고 했습니다.

선생의 작품 <인연>은 이미 국민 모두의 수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엄마>라는 수필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선생은 '어머니'를 항상 '엄마'라고 불렀습니다. 선생의 나이 10살에 '엄마'가 돌아가셨습니다. 아마 그 때문에 선생은 평생에 걸쳐 '어머니'를 '엄마'라고 불렀던 모양입니다. 수필에서 선생은 '엄마'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엄마가 나의 엄마였다는 것은 내가 타고난 영광이었다. 엄마는 우아하고 청초한 여성이었다. 그는 서화에 능하고 거문고는 도(道)에 가까웠다고 한다. 내 기억으로는 그는 나에게나 남에게나 거짓말 한 일이 없고, 거만하거나 비겁하거나 몰인정한 적이 없었다"

지난 2월 18일이었습니다. 이날은 큰 형님 기일(忌日)입니다. 모처럼 형제자매 모두가 모였습니다. 어머니는 자식 제사에 오지 않는 것이라며 마다하셨습니다. 우리는 7남매입니다. 남자가 다섯, 여자가 둘입니다. 저는 그 중 여섯째입니다. 아버지는 1978년에, 큰 형님은 1991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제사가 끝나고 셋째 형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가 날로 건강이 좋지 않으셔. 언제 어떻게 되실지 아무도 모른다. 이제 우리도 준비를 해야할 것 같아. 언제까지 누님 집에 계시도록 할 수는 없잖아. 아들이 다섯인데 남들 보기도 그렇잖아."

일흔 아홉 노모는 눈이 멀었습니다

어머니는 올해로 일흔 아홉 살이십니다. 건강이 무척 좋지 않습니다. 눈도 거의 실명(失明)하셨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열두 살의 나이 차이가 나십니다. 어머니는 열 여섯 살에 아버지와 결혼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전주 이씨'입니다. 이름은 '보학'입니다.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네 아버지 기술이 참 좋았어. 해방만 되지 않았으면 너희들은 그렇게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야. 너희 아버지가 흥남 비료공장에서 일하지 않았겠니."

해방이 되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삼팔선을 넘었습니다. 몇 년 만에 돌아온 고향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그나마 남아 있던 재산을 술과 노름으로 다 날렸습니다. 할아버지는 새경을 주지 못해 고모님을 새경 대신으로 머슴에게 시집 보내기까지 했습니다. 보다못해 외할아버지가 나섰습니다. 어머니에게 재봉틀 한 대를 사주셨습니다. 당시로서는 무척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그걸로 근근히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일마저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6·25가 터지고 아버지가 경찰서에 잡혀갔습니다. 죄목은 인민군에게 부역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당시 마을 이장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석 달 동안 경찰서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어머니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너희들 말이지. 도리깨로 보리 타작을 하는 것 보았지? 너희 아버지는 그렇게 매를 맞으셨어. 나는 매일 밥을 해 날랐어. 돈이 어디 있었겠니. 재봉틀을 파는 수밖에."

아버지는 3개월 후에 풀려나셨습니다. 그러나 이미 폐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힘든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고문으로 고막이 터져 제대로 듣지도 못했습니다. 저는 태어날 때 이미 귀머거리의 아들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제 기억은 음울함 그 자체였습니다. 꼬챙이처럼 말라비틀어진 육신과 수시로 토해내는 각혈이 저를 무서움에 떨게 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아버지를 '거북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버지는 등이 굽으셨습니다. 키도 작았습니다. 저는 처음에 외모 때문에 별명이 '거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붓글씨를 잘 쓰셨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면(面)에서는 아버지 한문 실력을 따를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붓글씨를 쓸 때 양쪽 무릎을 구부리고 등을 꺾은 채 왼손을 바닥에 짚었습니다. 그런 자세로 붓글씨를 썼습니다. 그 모습이 거북이와 많이 닮았습니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바로 '거북이'입니다.

저는 중학교 때까지만 고향인 금산(錦山)에서 살았습니다. 고등학교부터는 경남 마산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다닐 때 친구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어떻게 해서 충청도에서 경상도까지 왔냐고 말입니다. 그때마다 저는 얼버무렸습니다. 진해에 고모님이 사신다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마산 인삼 장사 할매가 바로 나의 어머니

94년도의 어머니 모습입니다
94년도의 어머니 모습입니다 ⓒ 박희우
마산에는 일가친척이 한사람도 없습니다. 어머니는 말씀하셨습니다. 인삼 보퉁이를 메고 무작정 내려온 게 마산이었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남의 집 행랑에 거처하면서 장사를 했습니다. 그 집 허드렛일을 어머니가 도맡아 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마산에 내려오면서 단칸 셋방을 얻게 된 겁니다. 저는 친구들에게 어머니의 존재를 숨겼습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의 인삼 행상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피천득 선생님은 자신의 어머니를 '엄마가 나의 엄마였다는 것은 내가 타고난 영광이었다'고 했습니다. 과연 선생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지극하셨습니다. 그 효심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어머니를 원망한 적은 없었지만 크게 존경하며 살지도 못했습니다. 영광으로 생각해 본 적도 없었습니다. 나이가 들고 세상 물정을 알고 나서야 저는 어머니를 존경하고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평생 장사꾼이셨습니다. 어머니는 점포를 가지고 장사를 한 게 아니었습니다. 행상(行商)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하루 종일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녔습니다. 언제나 어머니의 어깨에는 인삼 보퉁이가 둘러메어져 있었습니다. 인삼 보퉁이야 말로 우리들의 생명줄이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고백합니다. 어머니가 없었다면 우리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졌을 겁니다. 지금도 고향인 충남 금산에 가면 동네사람들이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자네 어머니가 아니었으면 필시 자네들은 뿔뿔이 흩어졌을 것이야. 어머니에게 잘해 드려야 하네."

제가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어머니가 해 준 밥보다도 아버지가 해 준 밥을 더 많이 먹었습니다. 어머니는 한달 중 20일 정도는 집을 비웠습니다. 한번 장사를 나가면 열흘 정도 돼야 집에 돌아오셨습니다. 5일 정도 집안 일을 보시고는 다시 장사 길에 오릅니다. 저는 어머니와 떨어지기 싫어서 매번 어머니 치맛자락을 잡고 울곤 했습니다.

어머니와 저는 부엌도 없는 단칸셋방에서 살았습니다. 저는 친구들이 놀러오는 게 정말 싫었습니다. 특히 어머니가 있을 때는 더욱 그랬습니다. 어머니는 마산에서 '인삼 장사 할매'로 통했습니다. 어머니는 종종 제게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애야, 00선생님 계시지. 오늘 그 집에서 인삼을 팔았다. 네 이야기도 했다."
"애야. 네 친구 중에 00있지. 그 집 참 부자더라. 그 아이가 너하고 친하다며?"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감수성이 한창 예민한 고등학생이었는데 오죽했겠습니까. 어머니는 멀리 장사를 나가는 게 아니었습니다. 제가 다니는 학교 근처에서만 뱅뱅 맴돌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교 길에서 우연히 어머니와 마주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이상한 일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조금 전까지 보였던 어머니가 금방 사라지고 없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세월이 흐른 뒤에야 알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부끄러워 할까 봐 미리 피했던 겁니다.

어머니는 밤이면 기침으로 고생하셨습니다. 그 기침 소리에 저는 잠을 설치곤 했습니다. 어떤 때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저러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저는 어머니 생각에 몸을 푸르르 떨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였지만 새벽녘이면 어김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셨습니다.

단칸방이라도 온 식구가 함께 살아야

어머니는 언제부턴가 그런 생각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자식들을 마산으로 불러모으자. 이게 어머니의 꿈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맨 먼저 여동생을 고향에서 데려왔습니다. 다음에는 바로 위에 형을 데리고 왔습니다. 1년 사이에 식구가 네 명으로 늘었습니다. 그러나 방은 여전히 한 칸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이런 노력은 계속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둘째 형님과 셋째 형님까지 데려오셨습니다. 방 1칸에 여섯 명이 살았습니다. 식구 여섯이 방 한 칸에서 산다는 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그래도 어머니는 몹시 좋아하셨습니다. 얼굴에 웃음을 항상 머금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셋째 형님은 불편했던 모양입니다. 얼마 안 있어 원양어선을 탔습니다.

어머니의 욕심은 계속되었습니다. 급기야 누님 부부까지 마산으로 데려왔습니다. 이제 고향에는 큰 형님 가족밖에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1991년이었습니다. 큰 형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형수님과 조카들까지 마산으로 데려왔습니다. 마침내 가족 모두가 마산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그 후 원양어선을 탔던 셋째 형님이 고향인 금산으로 돌아갔습니다. 지금도 셋째 형님은 금산에 살고 계십니다.

1983년도에 금산 보석사에서 돌아가신 큰형님과 찍은 사진입니다
1983년도에 금산 보석사에서 돌아가신 큰형님과 찍은 사진입니다 ⓒ 박희우
어머니는 언제나 그러셨습니다. 어렵더라도 함께 살자는 게 어머니의 생각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생각은 옳았습니다.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우리 가족은 필시 뿔뿔이 흩어졌을 겁니다. 어머니는 현재 누님과 함께 살고 계십니다.

그런데 셋째 형님은 그게 보기가 좋지 않은 모양입니다. 남자 형제들 중 누군가가 모셔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매형 생각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는 누님과 15년 이상을 함께 살았습니다. 매형은 환경이 변하면 어머니에게 더 해롭다고 했습니다. 우리 형제는 매형 의견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대신 지금보다 더 자주 어머니를 찾아뵙기로 했습니다.

어머니 방은 잘 정돈되어 있습니다. 누님의 손길이 곳곳에 묻어 있습니다. 저는 어머니 사진을 앨범에서 몇 장 뺍니다. 어머니가 어디에 쓸 건지 묻습니다. 저는 빙그레 웃기만 합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어머니 눈에는 필시 제 웃는 모습이 보이지 않을 겁니다. 어머니는 하염없이 저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하도 아파 저는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말았습니다. 볏단처럼 푸석푸석한 어머니의 육신이 제 품안에 빨려들어 옵니다. 어머니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자주 오시게. 그것처럼 좋은 효도가 없다네."

동네 할머니가 어머니를 떼어 놓으며 말씀하십니다. 어머니는 연신 눈물을 찍어내십니다. 저는 어머니를 뒤로하고 누님 집을 나섰습니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봅니다. 어머니가 문설주에 손을 의지한 채 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보이지 않을 아들을 어머니는 내내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게 어머니의 오래된 마음임을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피천득 선생님은 당신의 어머니를 '엄마는 우아하고 청초한 여성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는 아니었습니다. 우아하지도 않았고 청초하지도 않았습니다. 피천득 선생님은 당신의 어머니를 '그는 서화에 능하고 거문고는 도(道)에 가까웠다고 한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는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서화가 무엇인지도, 거문고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습니다.

피천득 선생님은 당신의 어머니를 '내 기억으로는 그는 나에게나 남에게나 거짓말 한 일이 없고, 거만하거나 비겁하거나 몰인정한 적이 없었다'라고 했습니다. 아, 그렇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눈시울을 붉힙니다. 내 어머니의 삶이 바로 이러했습니다. 비록 우아하거나 청초하지는 않았지만 내 어머니 이보학, 당신의 삶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어머니, 당신은 위대하셨습니다. 비록 일곱 형제 중 다섯 명을 초등학교밖에 졸업시키지 못했지만 그러나 우리에게는 더없이 훌륭한 어머니였습니다. 뿔뿔이 흩어졌을 가족을 한곳에 모으신 어머니, 그래서 우리에게는 더없이 소중하신 어머니십니다. 어머니,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세요.

덧붙이는 글 | <부모님 자서전 대필>에 응모합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