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은 2등 국민과 같다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에 대한 국가인권위의 접근은 이 같은 '근로의 권리'에 대한 엄중한 의미와 그 절대가치를 확인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전체 노동자의 절반이 넘는다는 추산이 있을 정도로 급증하는 비정규직 노동자. 불안정한 고용조건과 불합리한 차별대우, 노동자로서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기 힘든 이들의 열악한 현실은 '근로의 권리' 그 자체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처한 현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농성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 중 한 청년에게 어떤 때 차별을 느끼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청년이 '아가씨를 사귀려고 만났을 때 제일 먼저 듣는 말이 당신,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는 겁니다. 비정규직이면 다음 데이트는 꿈도 꿀 수 없고, 그래서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비정규직은 이를테면 2등 노동자, 2등 국민과 같습니다."
2005년 3월 16일 국가인권위가 주최한 비정규직 법안에 대한 청문회에 출석한 한 진술인의 얘기다. 지난해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촉구하며 분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내 하청업체 노동자 박일수 씨가 죽음을 택한 이유도 바로 그 같은 자괴감과 깊은 좌절에 있었을 것이다.
지난해 9월 노동부가 내놓은 비정규직에 관한 두 개의 법안은 바로 이처럼 열악한 처지에 놓인 비정규직 노동자를 보호하겠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법안이다.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안'과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
법안의 명칭에 '보호'라는 말이 들어 있듯 "비정규직에 대한 불합리한 차별을 금지하고 남용을 규제하겠다"는 게 입법 목적이다. 다만 이 '보호'를 '노동시장의 유연성과 조화를 도모하면서' 이루겠다는 것이어서 서로 상충되는 두 가지 목적이 공존하는 양면성이 있는 셈이다.
이 양면성이 시사하듯 법안이 나오기까지 많은 진통이 있었다. 참여정부가 2003년 2월 제시한 정책과제에 '비정규직 남용 규제와 차별 해소'가 그 중 하나였고, 이 법안은 그 과제에 대한 고민과 모색의 한 결과물이다.
모진 산고(産苦)를 겪고 태어난 비정규직 보호 법안. 산고는 이 법안을 받아든 국가인권위에 그대로 이어졌다. 대개의 사회적 쟁점이 그렇듯이 이 법안의 내용이나 이를 둘러싼 시각에는 융화하기 힘든 두 가지 가치가 서로 거세게 부딪쳤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인권'과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현실'의 대치였다. 비정규직 법안을 만든 노동부는 "인권과 현실, 두 가지를 조화시켰다"는 설명을 내놓았다.
"노동시장의 건전한 고용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비정규직에 대한 불합리한 차별을 금지하고 남용을 규제하게 했으며, 국제적인 기준에 부합하도록 개선하되 우리나라의 노동시장 여건을 충분히 고려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설명과 달리 노동계의 시각은 정반대편에 가 있다. 김선수 변호사는 지난해 12월 8일 인권위에서 열린 전문가 간담회에 참석해 "입구는 과도하게 열었으되 출구는 허술하기 이를 데 없는 법안"이라고 혹평했다.
"1996년 말 노동법 개악안은 주로 노사관계를 규율하는 데 그쳤지만 비정규법안은 단순히 노사관계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고용체제의 근간을 뒤흔들고 사회적 차별을 고착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경영계는 경영계대로 이 법안에 불만이 없지 않다.
"지금 우리의 노동시장을 보면 경직성 문제가 경제에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는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의 유연성을 높여 나가는 그런 입법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런 점에서 비정규 법안이 이 같은 요구를 충족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 최재황 한국경총정책본부장, 3월 16일 청문회에서 한 진술
비정규직 확산, 막을 수 있나
국가인권위는 어려운 퍼즐을 풀 듯 이 문제에 접근했다. 집중적으로 검토한 부분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이 법안이 고용이 불안정한 비정규직의 양산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비정규직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면서 핵심적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기간제 노동자 임시직 계약직 등 고용계약 기간을 정해 고용된 노동자다. '기간을 정하지 않은 근로계약'을 체결한 정규 노동자는 근로기준법에 따라 정당한 이유가 없는 한 해고되지 않고 정년까지 고용이 보장된다. 그러나 사용자는 해고 책임을 회피하고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1개월, 3개월, 6개월, 1년 등으로 근로계약 기간을 정하는 기간제 노동자를 선호하는 것에서 기간제 노동자 문제가 파생된다.
정부 법안은 현행 근로기준법에 '1년 이하'로 계약기간을 제한하고 있는 기간제 노동자 계약기간을 최대 3년까지로 늘려 놓았다. 기간제 노동자의 사용기간을 3년으로 제한하고, 3년을 초과해 사용하는 경우에는 그 해고가 제한되도록 함으로써 고용의 안정성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계와 상당수 학자들은 "법안대로라면 사실상 기간제 고용을 무제한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한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기간제 노동자 고용에 대해 '사유 제한'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렇지 않고 단지 기간만 제한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정규직 채용을 원칙으로 하고 비정규직은 예외로 인정하는 대전제가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파견법 개정안에서는 파견 허용 업종을 확대하겠다는 것이 논란의 핵심이다. 현행법은 원칙적으로 파견을 금지하고 파견이 허용되는 업무를 열거하는, 이른바 '포지티브 positive ' 방식이다. 개정안은 이를 뒤바꿔서 파견을 전면적으로 허용하고, 안 되는 업종만 제시하는 '네거티브 negative ' 방식으로 전환하겠다는 것이다.
현행 파견법이 허용하는 업종은 26개. 개정안은 '건설공사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업무', '선원의 업무' 등 소수의 금지 업종을 제외하고 모든 업무에 파견제를 사용할 수 있도록 대폭 자유화했다. 노동계는 이렇게 문호를 활짝 열게 되면 파견 노동자 사용업체에 파견돼 사용업체에서 근무 지시를 받고 일하면서 임금은 파견업체로부터 받는 노동자 가 무분별하게 급증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이 같은 우려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큰 불신을 사고 있는 법이 파견법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1998년 파견법을 도입하면서 내세운 이유는 "전문적인 지식·기술이 필요한 경우"나 "일시적·임시적 고용이 필요한 경우" 간접고용을 합법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동계는 "지난 7년간 파견법이 시행된 결과는 간접고용이 결국은 저임금과 노동기본권의 억압을 가져올 뿐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는 시간이었다"고 비판한다. 파견 근로 자체를 반대하는 노동계는 파견 노동자의 확산을 가져올 수 있는 이 같은 전면 자유화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차별시정, 제대로 될까
둘째는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어떻게 시정할 것이냐의 문제다. 우선 차별의 실상에 대해서는 시각의 크고 작은 차이가 있지만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만큼 많은 차별을 받고 있다는 데는 일치한다.
노동부는 산하 연구기관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현재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에 비해 평균 35% 가량 저임금을 받고 있으며, 이 가운데 10~20%가 불합리한 차별에 따른 격차라고 설명한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이원화 실태분석'에 따르면, 2003년 비정규직의 임금은 정규직의 49.7%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됐다.
외국의 경우 2002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고용통계에 따를 때 정규직에 대한 비정규직의 임금 비중은 독일이 83%에 달했으며, 영국 74%, 이탈리아 72%, 프랑스 71% 등으로 한국에 비해 임금 격차가 훨씬 작은 것으로 드러났다. 더욱 심각한 것은 격차가 더욱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외환위기에 따른 고용불안은 비정규직에서 훨씬 컸으나 이후 회복은 정규직보다 더뎠다.
대한민국 비정규직의 이 같은 실상에 대해 국제사회도 우려하고 있다. 유엔 경제·사회·문화권리위원회가 우리 정부의 2001년 보고서에 대해 낸 최종 견해 중 일부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동조건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은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독립적인 정보에 따르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동일한 업무를 수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임금, 연금혜택, 실업, 의료혜택, 직업 안정성 등에서 정규직 노동자와 차별적인 대우를 받고 있다. 위원회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율이 50% 가까이 되며, 이들 중 대다수가 여성이라는 점에 우려를 표한다."
2개 법안은 이 같은 차별에 대해 "합리적인 이유 없이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만으로 발생하는 임금 격차 등을 금지, 시정하겠다"는 것이다. 불합리한 차별을 받을 경우 노동위원회에 시정을 신청할 수 있게 하며 노동위의 차별시정 명령을 이행하지 않은 사업주에게는 최고 1억원의 과태료를 물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차별금지·시정' 문제에서 핵심인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은 명문화되지 않았다. 국제협약에 제시된 이 원칙은 동일노동이나 직무수행을 하는 노동자에게는 같은 임금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차별금지의 대원칙과 함께 차별의 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노동부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법으로 강제하는 것은 기업에 과도한 부담을 주는 것이며 선진국과 같이 직무급 체계가 정착돼 있지 않은 우리나라에는 적용하기 힘든 원칙"이라고 밝혔다. 또 차별의 구체적 기준에 대해서는 앞으로 노동자의 시정 신청을 통해 이뤄질 노동위원회의 판정과 법원의 판례가 축적되면서 유형별로 정립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같은 입장은 노동계의 강한 반발을 사고 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규정이 명문화되지 않는다면 차별을 판단할 기준과 근거가 없다"는 주장이다. 또 항상 약자인 비정규 노동자가 노동위원회 내의 구제기구에서 제대로 된 차별 인정과 시정을 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비판한다. 즉 알맹이가 빠진, '차별시정' 구호만 외치고 있는 격이라는 지적이다.
노동 3권 보장, 현실성이 있나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도 노동3권은 원칙적으로 보장된다. 헌법과 노동관계법에 규정된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은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이들이 노동3권을 행사하기는 매우 힘들다. 불안정한 고용관계에 있는 이들이 신분상의 불이익을 무릅쓰고 권리를 주장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비정규직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해서 교섭을 요청한 사례가 있지만 백이면 백 교섭은 거부됐다." - 3월 16일 청문회 진술 중에서
노동3권의 문제로 나타나는 양상은 기간제 노동자와 파견 노동자가 다소 다르다. 기간제의 경우 신분상 불안정한 지위로 인해 노동3권이 위축되는 정도라면, 파견 노동자는 법적 고용관계가 이중으로 돼 있어 노·사 관계 자체를 맺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즉 파견·용역 등 이른바 '간접고용' 노동자는 실제로 일을 하는 사업장 사업주와는 법적 고용관계에 있지 않다는 모순이 발생한다. 사용업체는 이런 허점을 악용해 파견·용역 노동자가 노동조합을 결성하면 아예 계약을 해지하거나 조합원을 해고하도록 압력을 넣는다. 그러나 사용업체는 근로 계약상의 사용자가 아니므로 노동자는 사용업체를 상대로 부당 노동행위에 대한 고발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같은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사용 사업주의 파견 노동자에 대한 책임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사용 사업주를 상대로 단결권 및 단체교섭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게 한다거나 사용 사업주의 사업장 노사협의회에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 밖에 동일 업무에 파견 노동자를 교체 사용하는 것을 규제하기 위한 3개월간의 '휴지기간' 설정이 충분하냐는 논란도 있다. 파견법안은 사용 사업주가 3년간 파견 노동자를 사용한 경우 3개월의 휴지기간을 거쳐야 다시 3년간 파견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실효성을 의심받고 있다. 즉 '3년간 파견 노동자 사용 → 3개월간 계약직 전환 → 다시 3년간 파견 노동자 사용' 의 편법을 쓸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 휴지기간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기간을 좀더 늘리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간주 규정'이냐, '의무 규정'이냐
또 하나 노-정간에 대립하고 있는 문제다. 현행법은 '파견 근로자를 사용하는 사업주가 2년을 초과해 계속 파견 근로자를 사용하는 경우에는 2년의 기간이 만료된 날의 다음날부터 파견 근로자를 고용한 것으로 본다'는, 이른바 '간주 규정'을 두고 있다. 그러나 개정안은 이를 '사용 사업주가 3년을 초과해 계속적으로 파견 근로자를 사용하는 경우에는 사용 사업주는 당해 파견 근로자를 직접 고용해야 한다'로 바꿔 '의무 규정'으로 고쳤다.
노동부는 "사적 자치 계약의 자유 의 원칙에 반할 뿐만 아니라 사용 사업주가 직접 고용의무 불이행시 3천만원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하도록 해 직접고용의 유인을 만들겠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노동계는 이를 '납득하기 힘든 개악'으로 보고 있다. 3천만원이하의 과태료로는 경제적 제재 수단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설령 행정적 제재를 가한다고 해도 사용 사업주는 직접 고용보다는 이것을 택할 것이라는 시각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간하는 월간 <인권> 4월호에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