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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책을 읽었습니다. 빨간 것은 불온(不穩)하다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불온한 문서나 책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습니다. 다만 과거에 불온했던 것이 지금은 '덜' 불온할 수 있습니다. 불온이라는 말은 온당하지 아니하다는 뜻도 되고 치안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공산당 선언(이하 〈선언〉)〉의 원문이 포함된 해설·연구서 《세계를 뒤흔든 공산당 선언》을 읽었습니다. 세상이 많이 좋아져서 이런 책을 아무렇지도 않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 여전히 〈선언〉을 읽는 것은 그리 안전하지 않습니다. 연구나 해석이 목적이 아니라 변혁이 목적일 때 그러합니다.

맑스는 언젠가 "지금까지의 철학자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했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두 말할 나위 없이〈선언〉을 쓴 진정한 이유 역시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볼온하고 위험한 책입니다.

지금 〈선언〉이 자유로이 출판될 수 있는 것은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1991년 어느 날, 호외 신문을 통해 소련 몰락 소식을 접했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 누가 장난으로 신문을 만들어 뿌린 줄로만 알았습니다. 냉전이 공식적으로 종료 선포되는 날이었습니다. 현실 사회주의의 패배를 최종 공인하는 날이었습니다. 이는 전세계적 자본주의화, 곧 '세계화' 시작을 선포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보아온 현실 사회주의는 맑스와 엥겔스가 〈선언〉에서 말한 그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사회라는 것을 〈선언〉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맑스주의가 맑스가 생각하고 있는 핵심을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이미 맑스가 생존했을 때부터 이미 감지되었습니다. 맑스는 언젠가 엥겔스에게 "나는 맑스주의자가 아니라네"라고 했습니다. 스탈린은 맑스-레닌주의라는 말을 만들었습니다. 그런 그가 정작 맑스도 레닌도 결코 원치 않았던 폭압적 전체주의 국가를 만들었습니다. 1970년대까지만해도 도저히 저지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던 사회주의 블록은 이미 몰락의 씨를 싹틔우고 있었습니다.

현실이 이러하니, 마치 맑스와 엥겔스의 모든 주장이 응축된 〈선언〉, 그리고 그들의 정치경제학적 자산인 〈자본론〉이 불완전하기 그지 없는 글처럼 취급되는 듯합니다. 그렇다고 맑스와 엥겔스를 무덤에서 다시 일으켜 세울 수는 없습니다. 당신들이 말한 것이 결국 이런 것이었냐고 항변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나 이상합니다. '불가피한' 세계화와 80:20의 불평등이 고착화되고 있는 지금, 다시 읽는 〈선언〉에서 새로운 생명력이 느껴집니다. 150여 년이나 지난 지금 〈선언〉은 여전히 신선하고 적절하며 여전히 불온합니다.

이 책은 〈선언〉을 쓴 맑스와 엥겔스, 그리고 이 글이 쓰인 배경부터 〈선언〉이 가져다 준 의미와 여파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선언〉의 내용이 지난 150여 년 동안 어떻게 실현되고, 어떻게 왜곡되고, 어떻게 좌절됐는지를 자세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참 괜찮은 책 하나 읽었습니다.

세계를 뒤흔든 공산당 선언

데이비드 보일 지음, 유강은 옮김, 그린비(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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