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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몇 년 '잘'하고 나서 생긴 증상이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심해진 것은 법에 대한 자신 없음이다. "설마 법이 있는데 그렇게는 안 되겠지?"하던 사람들도 변호사와 한두 차례 상담하고 나면 "어떻게 그럴 수가…"를 연발하는 일이 흔하다.

나 스스로 '상식적으로'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일이, 막상 판례를 찾아보거나 재판을 해나가다 보면 '결코 당연하지 않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일이 되풀이되다 보면 내가 상식이라고 믿던 것을 의심하게 되고, 내가 과연 법률가로서 기본 소양이 있는지, 실력은 갖추고 있는지 회의하게 되고 모든 일에 자신이 없어진다.

아니, 그것까지는 괜찮은데, 문제는 부당한 일에 지독하게 무신경해진다는 것이다. 웬만한 사건은 되돌려 보내고 억울하다고 찾아온 사람을 앞에 두고는 "훨씬 억울하게 당한 사람도 못 이겨요, 그러니 이 정도는…"하는 폭언도 서슴지 않았다. 해고 정도면 그래도 덜한 편인데, 승진이나 임금 차별 문제에는 더욱 더 둔감하다. 입으로는 차별 시정을 떠들지만, 속으로는 실업자가 몇 만 명이고 불안정한 일자리가 얼마인데 그까짓 '차별'이 우선순위냐, 이런 식이다.

한 여성단체에서 연락을 받은 무렵에도 그런 무기력감이 깊었다. 어느 회사의 여성 직원이 정년퇴직을 당했다. 여성 전용 직종의 정년이 남성들의 정년보다 열 살이나 낮게 설정돼 있다는 것이다. 몇 년 전 대학의 '서무직' 직원(물론 전원 여성이다)의 정년이 35세로 돼 있던 사건에서도 "직무의 성격상 설정된 것이니 부당하지 않다"는 판결을 받은 일이 있다.

또한 기혼 여직원이 한 명도 없는 회사에서 결혼하면 사직하겠다는 약속에 따라 쓴 사직서도, "희망퇴직에 응하지 않으면 당신 남편을 휴직 시키겠다"는 말에 사표를 낸 것도 "사직은 사직"이라는 판결을 받은 맷집(?)이 있어, 직종에 따른 45세 정년이라는 게 그리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노동위원회와 1심 법원에서도 회사 쪽의 손을 들어 줬다고 하니, 맡게 된다면 역시 또 하나의 패소 전력을 추가하겠구나 하는, 시큰둥한 생각도 없지 않았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당사자는 한 회사 사무직으로 19년을 근무했다는 경력이 어울리는, 차분한 옷차림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통상 이런 내담자의 경우 "비용은 얼마고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리고, 이길 승산이 얼마인지"를 알고 싶어 하고, 나의 시큰둥한 대답을 듣고 나면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서류를 찾아가는 것이 보통이다. 나 또한 그 부담을 안고, 그 싸움을 대신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별로 말리지 않게 된다.

그런데 회사 인사 정책의 문제점과 배경, 그리고 실제 업무 내용을 차근차근 설명할 때의 그의 목소리와 눈빛은 남달랐다. 해를 거듭해도 책임 있는 자리로 승진하기는커녕 훨씬 늦게 입사한 후배 직원들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했던 것도 억울한데, 이제 나이 먹어 월급만 올라간다며 한창 일할 나이에 퇴직하라니. 그 오랜 시간 그가 해온 '직장 생활'은 도대체 뭐가 되는 거냐고 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는 말 뒤에 꽂힌 커다란 물음표가, "나 혼자서라도 끝까지 간다!!"는 문장 뒤에 찍힌 느낌표 두 개가, 그동안 입으로만 '차별은 인권 문제'라고 떠들던 내 무신경을 나무라고 있었다.

결국 그의 진지한 설득에, 나는 그 사건을 덜컥 맡고 말았으며, 머리를 싸매고 씨름하고 있다. 문제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직급 정년이라는 것이 있어서 직급이 낮은 사람의 정년은 더 빨리 찾아오는 것이 사회 통념처럼 되어 있는데(그러나 사실 이것도 만만치 않은 차별이다), 그 회사에도 역시 그러한 정년 제도가 있다.

그가 일찍 퇴직하게 된 것은 표면상으로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직급이 낮기 때문이고, 바로 그 점 때문에 노동위원회와 1심 법원에서 회사가 모두 승소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건은 지난 19년 동안 그가 왜 남성 직원들과는 달리 더 높은(그래서 정년 연령이 높은) 직급으로 승진하지 못했느냐의 문제로, 그리고 다시 처음에 왜 승진이 잘 안 되는 직렬로 입사했는지의 문제로 돌아간다.

그리고 거기서 뿌리 깊은 채용 절차상의 차별 문제가 나오고, 무시할 수 없는 사회 통념 문제(여성들은 전통적으로 전문직보다는 편한 일을 선호하고, 결혼하면 그만이라는 이른바 '여직원 신화')가 고구마 줄기처럼 이어져 있다.

법원은 또다시 "사회가 이런데 어떻게 이 회사에만 책임을 물을 수 있겠느냐"며 외면하기 쉬울 것이며, 무능한 변호사는 '보수적인 법원 탓, 차별에 무지한 세상 탓'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씩씩한 내 의뢰인은, 그리고 그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싸우고 있을 그 친구들은, 무기력한 내 어깨를 두드리며 밀어낸다.

당신의 무신경이 '사회 통념'이라는 이름으로 차별을 정당화하려는 그 자리에 진짜 법이, 진짜 변호사가 필요하니 그만 뻗대고 나가라고. 지더라도 나가서 싸우라고. 그래, 일단 파이팅이다. 나도 힘 낼 터이니 어서, 당신들도 힘내시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 4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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