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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3월 '탄핵무효 촛불집회'사회를 맡아 노래를 부르고 있는 최광기씨(오른쪽)와 권해효씨.
ⓒ 오마이뉴스 남소연
“10만 인파 앞에 섰을 때도 이렇게 떨리지 않았는데요, 책이 서점에 깔렸다고 하고 또 한두 분이 잘 봤다고 하니까 너무 너무 떨려요. 진짜 무섭네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탄핵반대 촛불집회를 이끌던 최광기(38)의 씩씩함은 온데간데 없다. 무대에서 누구보다 여유만만하고 배짱 두둑한 그이지 않은가. 뻔뻔스러울 만큼 위풍당당한 ‘국민 사회자’ 최광기를 잔뜩 긴장시킨 것은 바로 <밥이 되는 말 희망이 되는 말>이란 책이다.

“부끄럽고 어찌 할 바를 모르겠다”는 그에게 인터뷰를 청했다. 빗발이 잦아든 11일 오후 늦게 그를 만났다. 화사한 분홍 꽃무늬 재킷 차림의 그가 수줍게 들어왔다. 낯가림이 다소 있었다. 의외였다. 책 얘기를 꺼내자 더 쑥스러워 했다. 알아서 책 홍보 나서기는 힘든 필자이다. 그래서 책을 낸 기분이 어떤지 물었다.

처음 받아든 날 아무 생각이 안 나더란다. 그저 책을 예쁘게 만들어준 사람들이 고맙고, 첫 아이를 낳았을 때처럼 ‘이게 내 새끼구나’ 싶었다고 했다. 서점에 깔리기 시작했다는데 ‘무서워’ 가질 못했다고. 10만 촛불 앞에서 우렁차게 ‘개새끼들’을 외치기에 늠름한 줄 알았더니, 속은 여리디 여렸다 .

건강한 말이 세상을 움직인다

말의 현장에서 10년을 보낸 그가 왜 ‘말’을 화두로 꺼냈을까. 최광기 이름을 걸고 관객들과 미친 듯 한판 뒤집어지게 놀 수 있는 공연을 하려고 그랬단다. 주변에서 책이라도 낸 다음에 하라고 말렸기 때문이라며 웃는다. 틈틈이 쓰느라 1년 정도 걸렸다.

그러나 진짜 이유가 있었다. 자신의 말에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실을 수 있어서, 그래서 세상에 희망이 울려퍼지도록 할 수 있어서 ‘거리 MC’가 됐던 그이다. 그 ‘꿈’과 ‘소명’이 이번에는 글을 쓰게 했고, 책을 내도록 했다.

그의 책에는 평범한 대학생 최광기가 빈민운동가로, ‘거리 MC’로, ‘국민 사회자’로 되기까지 20년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야만의 시대를 넘는 고비마다 최광기의 스승은 다름 아닌 ‘말’이었다.

대학 3학년 때 ‘밥이나 먹자’는 선배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찾아갔던 서울 상계동 빈민촌. 그곳 ‘어머니학교’에서 쉬운 말, 간결한 말, 재밌는 말, 빨리 전달되는 말을 배우면서 건강한 말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머니학교 얘기를 할 때마다 최광기는 눈물을 훔쳤다. 말은 사람에 대한 애정에서 나온다고 했던가.

'거리 MC'로 현장에 있을 때 가장 행복

최광기의 '묻지마 공연'
23일 개인콘서트..."뒤집어지게 놀자"

“제 몸에 아직 남아 있는 광기와 신기, 책에서 다 하지 못한 얘기를 합니다.” ‘국민 사회자’ 최광기가 이번에는 만능 엔터테이너로 변신하다.

오는 23일 오후 7시 서울 명동 유네스코회관 3층에서는 ‘최광기와 떴다밴드’가 출연하는 콘서트가 열린다. 이는 최씨의 첫 개인콘서트. 관객들과 한판 뒤집어지게 놀자는 게 공연 컨셉. 일명 ‘묻지마 관광버스’를 부제로 붙였다.

이번 공연에는 권해효, 안치환, 박준, 우리나라, 니나노 등이 우정 출연한다. 최씨는 “문화적 충격을 받을 정도로 신명나는 놀이판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를 바꾸고, 사람을 바꾸고, 운명을 바꾸는 말하기’가 가능하냐고 물었다. 그는 “그렇게 하려면 말을 잘 들을 줄부터 알아야 한다”고 답했다. 역시 어머니학교 현장활동 10년이 가르친 이치이다. 그의 ‘광기(光氣)'나는 말은 인생 중 가장 힘겹고도 보람찼던 삶의 한가운데서 얻은 소중한 결실이었다.

말은 최광기의 삶을 다시한번 변화시켰다. 93년 도시빈민문화제 사회자로 서면서 숨어 있던 ‘끼’를 공식 인정받은 그는 이후 본격적으로 공연 사회에 나서게 됐다. 큰 집회나 행사 사회를 도맡다시피 하며 ‘거리의 MC'로 불리게 됐다. 무대에만 올라가면 ’광기(狂氣)가 도는‘ 최광기가 됐다.

지난해 3월 광화문 탄핵반대 촛불집회 이후 ‘국민 사회자’라는 애칭까지 더해졌다. 민주주의가 낳은 사회자, 국민 공주, 국민 사회자, 광기 있는 여자, 욕설이 아름다운 여자 등 많은 수식어가 달렸다. 그중 ‘국민 사회자’라는 애칭을 가장 마음에 들어했고, 고마워했다.

그는 ‘말’과 함께 한 지난 날에 대해 “고맙고, 행복하다”고 했다. 현장에 설 때마다 그는 이주노동자로서,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여성으로서, 어린이로서, 성적 소수자로서, 양심수로서 그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알렸기 때문이다. 거대한 편견과 차별의 벽에 가로막혀 묻혔거나 들리지 않던 그들의 말을 전파하는데 일조하고자 했다.

책을 낸 것도 그 바람을 실천하기 위한 방편이다. 고교 시절 <젊음의 행진>을 진행하는 왕영은씨 자리를 노리며 꿈꿨던 방송진행자. 지금은 얼굴이 많이 알려지면서 공중파방송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그는 ‘거리의 MC'로 현장에 있었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앞으로 국민들이 하고 싶은 얘기를 말할 것이고 거리든, 무대든, 방송이든 희망을 심는 일이라면 ’광기(光氣)있는‘ 그의 말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다음은 최씨와의 일문일답.

- 책을 내겠다는 생각을 어떻게 하게 됐나요?
“어렸을 때 꿈이 방송국 MC였어요. 왕영은씨 보면서 저 자리는 내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웃음). 우연찮게 도시빈민문화제 사회를 하면서 결국 꿈을 이루게 됐잖아요. 20대 시절 10년간 상계동 ‘어머니학교’ 활동을 했는데 서른살 되면 그때 만났던 여자들 얘기를 세상에 알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세상 여자들의 고백서, 척박하지만 그들이 얼마나 강인하게 살아가는지 말이죠. 사회자를 하면서 만난 이들 중 말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 말을 하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은 사람들의 얘기를 담담하게 쓰고 싶었어요.”

- 책을 처음 받았을 때 느낌이 어땠나요.
“지난 6일 처음 받았는데 아무 생각이 나지 않더라구요. 책이 너무 예쁘게 나와서 만들어준 사람들이 고마웠어요. 이게 내 책이구나, 아이를 낳았을 때 ‘이게 내 새끼구나’ 하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데 무서워요. 무대 올라갈 때나 10만 관객 앞에 설 때도 그렇게 떨리지 않았어요. 아직 서점을 못 가고 있다니까요. 무대는 떨리더라도 막상 올라가면 편안해지는데, 요즘 술 생각밖에 안 난다니까요(웃음).”

- 그때 누가 생각나던가요.
“오늘은 자꾸 눈물이 나려고 하는데(눈물을 닦았다)... 어머니학교 엄마들이 참 많이 보고 싶더라구요. 보람있었지만 어머니학교가 싫은 적도 많았어요. 도망치고 싶은 때도 있었고. 돈벌어 오겠다던 선배가 돌아오지 않고 어머니학교에 10년을 있을 때 외롭고 힘들었어요. 그런데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었어요. 시장통 돌다가 어머니들 일하는 것 도와주면서 이겨냈는데 그게 지금의 저를 있게 하고 이 책을 낳게 한 거름이 된 거 같아요.”

- 응원을 가장 많이 해준 분들은.
“(여성계) 언니들, 선배들이 격려 많이 해줬어요. 지칠 때마다 썼냐고 체크해주고 밤에 나돌아다니지 말라고 하고. 한분한분 거론하기 힘들 정도로 고마운 분이 많아요. 부모님도 좋아했어요. 우리 딸이 공식적으로 뭘 한다고 말하기 어려웠는데 뭘 한다고 하니까. 참, 이번에 발문 써준 이문재 선배도 감사해요. 어떻게 알게 됐냐구요? 술로 만난 고마운 선배에요(웃음).”

아무도 들어주지 않은 사람들 얘기를 쓰려고 했다

▲ '밥이 되는 말 희망이 되는 말'을 펴낸 국민사회자 최광기씨.
ⓒ 오마이뉴스 권우성
- 인세 받으면 어디에 쓸 생각인가요.
“책 나온 첫 날 여성재단에서 인세에 대해 ‘1% 나눔’ 약정식하자고 제안해서 했어요. 첫 책을 좋은데 쓰라고 저를 배려해준 것 같아요. 책을 내고 나니까 주변에 고맙고 좋은 사람들이 많다는 걸 느꼈어요. 출판사에서도 ‘그 책 잘 만들어줘야 한다’며 수많은 압력(?)과 관심을 이렇게 받은 책은 처음 봤다고 얘기하더라구요. 그럴 때마다 고맙다는 말밖에 할 게 없어요.”

- 책을 통해 무엇을 얘기하고 싶었나요?
“책에도 썼지만 장애인 문제를 보면서 충격을 많이 받았어요. 이동권연대 투쟁할 때 한 장애인이 어눌한 말로 30년만에 집밖에 차음 나왔다고, 기차타고 동해안 가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왜 나는 그런 생각을 한번도 못했을까. MBC <느낌표>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주노동자 이야기에 감동했는데 아마 몰라서 그랬을 거에요. 그래서 제 책을 보고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구나 느낄 수 있는 계기만 돼도 좋겠어요.”

- 책에 보니까 ‘서른이 두려웠다’고 했는데 왜 그랬나요?
“29살에 인생의 열병을 앓았어요. 또래 친구들은 안정적인 직장도 있고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사는데 나는 무엇을 했을까 싶었어요. 고립감과 극도의 외로움이 너무 무섭더라구요. 말하고 싶은데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고. 근데 서른이 딱 되니까 아무 것도 아니더라구요. 지금은 마흔 되는 게 설레요. 한번 열병을 앓고 나면 면역이 생기는 것처럼 그렇게 어른이 돼 가는 것 같아요. 그때 먹은 술이 엄청 나죠. 그때는 어머니학교를 지켜야 한다는 지독한 책임감으로 그랬던 것 같아요.“

- 그리고 나서 사회자로 나서게 됐지요?
“그 무렵 사회자의 길이 막 열렸어요. 그래서 말에는 힘이 있고, 또 덕이 있다고 얘기해요. 평소에 말덕을 심으라는 말을 많이 하거든요. 인품이든 뭐든 다 말에서 드러나거든요.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사람관계가 말을 통해 표현되는 거거든요. 말의 힘이 엄청나다는 걸 제 스스로 알아요. 어머니학교 학생들이나 주변 사람들한테 또 기억도 못하는 많은 사람들한테 무수한 말을 쏟아냈지만 그 말은 저한테 스스로 하는 것이거든요.

그 말을 통해 제 스스로를 바꾸기도 했고. 그 말을 통해 그 누군가가 삶이 바뀔 수 있다면, 정말 그럴 수 있어요. 노동현장에서 60세가 넘은 여자분이 ‘동지 만나면서, 세상 만나면서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절반밖에 모르고 살았다’고 하는 말을 들었어요. 그럴 때마다 저도 힘이 나고, 일상에서도 작은 말 한마다에 무척 기분 나쁘잖아요. 기억 못하는 말 한마디에 온 세상을 얻은 것 같은 기쁨도 얻구요.“

- 오늘의 최광기에 탄핵반대 촛불집회를 빼놓을 수 없잖아요.
“세상에 최광기라는 이름이 알려진 게 두 번인데 도시빈민문화제와 민주노총 창립전야제 사회를 봤을 때에요. ‘저 여자 뭐야, 저 여자가 최광기야’ 정도였다가 지난해 촛불집회에서 제 이름이 정확하게 각인된 것 같아요. 탄핵가결 순간 여의도에 있었는데 정말 두려웠어요. 그때 제가 10년간 현장에 있으면서, 삶과 일터에서 하고 싶었던 얘기를 가장 많이 했어요. 그게 시민들도 듣고 싶었던 것이고. 제 인생에서도 잊지 못할, 잊을 수 없는 현장이었던 것 같아요. 사람이 사랑받으면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까 느꼈고 정말 감사했어요.“

‘노무현’ 때문에 촛불시위 나선 것 아니다

- 노무현 대통령이 결혼 주례를 섰다면서요.
“그 얘기하면 갑자기 핏대 올라가는데(웃음). 노무현씨가 96년 당시 국회의원 선거 때 종로구에서 출마했거든요. 거리 연설하면서 처음 봤는데 애정이 갔어요. 이런 사람이 정치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게 처음이었어요. 그때는 대통령까지 될 것이라고 생각도 안 했지만(웃음). 호흡도 잘 맞고 그래서 결혼식 주례식까지 맡겼지요. 근데 결혼식 와서 우리 신랑이 졸업 못하고 제적당한 운동권이라고 깽판(?) 놓아서 6개월간 우울했어요.

그리고 대통령이 되고 나서 저한테 후유증 많았어요. 청와대 안 가느냐, 안 들어오라고 하느냐, 주례 봐줬는데 오라고 하지 않느냐 등. 그렇게 한동안 괴로웠는데 탄핵반대 집회 이후 또 그랬어요. 아직도 제의가 안 들어왔느냐고. 노무현 대통령의 연설방식은 요즘 단점이 되기도 하지만, 반전의 묘가 대단해요. 그 치고 올라가는 것 말이죠. 어떤 분들은 부담스러워 하지만. 말을 잘 하고 매력 있는 분이라고 생각해요.“

- 탄핵반대 촛불시위에 나설 때 남달랐겠어요.
“대통령 노무현 때문에 서지 않았어요. 촛불시위에 나선 것은 탄핵반대보다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과 위협이 걱정됐기 때문이에요.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했던 게 민주주의이잖아요. 그것에 대한 도전과 위협이 너무 무서웠어요. 그래서 거리로 나간 거에요. 일각에서는 한쪽으로 치우친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지만 국민들이 말하고 싶은 것, 국민의 힘을 분명히 보여줬던 것 아닌가 싶어요. 앞으로 누가 뭐라고 해도 그런 일을 할 거에요, 거리에서 국민들, 시민들이 하고 싶은 얘기를 꼭 할 거에요.”

- 힐러리를 좋아하는 여성 정치인으로 꼽았던데요.
“원래 한국에서 좋아하는 여자를 얘기하려고 했는데 시시비비가 생길 것 같아서(웃음)... 여자들이 정치에 더 적극 참여했으면 좋겠어요. 여자 정치인들이 대변인으로 들러리 서는 게 아니라 진취적 도전정신으로 쭉 진출해야 돼요. TV 틀었을 때 조폭처럼 검은 양복의 남자 국회의원뿐 아니라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여자 정치인들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여성할당제도 더욱 적극적으로 요구해야 되구요. 참여정부에 여성장관이 1명밖에 안 남았어요. 그런 식으로 형식적 배려를 하려면 여성부 장관도 남자 시키라고 해요.”

- 오른쪽 시력이 상실되다시피 했는데 건강은 어때요?
“시력 얘기가 나와서 너무 괴로워요. 그러나 지금은 담담해요. 녹내장은 치료가 잘 안돼요, 시신경이 죽는 거라서. 건강해야죠. 오마이뉴스 창간 5주년 때 사회를 보는데 제부가 쓰러졌어요. 사회를 보는 게 이렇게 우울한 일인 줄 그때 알았어요. 사실 이 책이 나온 것도, 가족 중 누구를 잃은 것도, 한쪽 눈이 안 보이게 된 것도 아직 믿기지 않아요.”

- 앞으로 어떤 일을 해보고 싶나요.
“좋은 방송이 많이 있지만 주어진 멘트가 아니라 삶 속에서 드러나는 현장감 있는 방송진행을 한번 해봤으면 해요. 라디오가 매력 있더라구요. 저 같은 사람은 가깝게 보는 것보다 멀리서, 귀로 듣는 게 훨씬 났거든요(웃음). 이번 책에 시낭송 CD도 제작했는데 제 목소리가 남들에게 힘이 되는 그 날까지 그런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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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언론운동협의회(현 민언련) 사무차장, 미디어오늘 차장, 오마이뉴스 사회부장 역임. 참여정부 청와대 홍보수석실 행정관을 거쳐 현재 노무현재단 홍보출판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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