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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분 중에 독일에서 공부하며 살다 온 분이 계시다. 독일에서 학교 다니다 온 아들 녀석이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서 무던히 그분 속을 썩인 모양이다. 지금은 대학을 졸업하고, 올곧게 성장해서 사회에 잘 적응해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식 문제로 부모 맘 썩는 것이야 어느 부모라고 예외일 수 있겠는가? 한때 그분도 자식 문제로 아주 상당히 또 심각하게 고민했던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에서 학교 잘 다니던 아이를 문화와 사유방식이 영 다른 나라로 여겨지는 곳으로 데려왔으니, 그분의 아들이 쉽사리 적응하지 못했으리라는 것은 능히 짐작할 만하다.
그분의 아들도 처음엔 전연 딴판인 학교 분위기로 인하여 학교 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아침마다 학교 가는 것이 거의 지옥으로 등교하는 것쯤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들 녀석이 곧잘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속된말로 '뗑깡'을 부리곤 했다.
'독일에서 살다 왔으니 독일어 좀 해보라'하는 식으로 조롱하는 것은 약과이고, 간혹 선생들로부터 머리도 쥐어 박히고 얻어터지는 수가 있었으니, 참기가 힘들었을 것이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하다.
그런 녀석을 칭얼대는 것을 몇 번이고 잘 달래고 얼러서 학교에 보냈는데, 어느 날인가부터는 어떤 일로 마음고생이 심했던지 아들 녀석이 아예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방바닥에 본격적으로 누워버린 채로 시위를 해댔다는 것이다. 독일로 보내달라고 고집을 부리는데 이르러서는 아버지로서 한계를 느꼈다는 것이다.
마침내 아버지로서 최종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까지 몰렸다는 것이다. 아버지로서 모진 결심을 하고 난생 처음 화를 벌컥 내고 '여긴 독일이 아니야'하면서 윗통을 벗어 던지고 학교에서 선생한테 맞은 것 이상으로 몇 대 갈긴 모양이다.
이 아이가 놀래 자빠질 수밖에. 그때에야 비로소 '여기 또 하나의 악마와 같은 선생이 우리 집에서 함께 숨쉬고 있다니. 학교가 지옥이 아니라, 바로 여기가 지옥'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들 녀석이 느낀 실망감이야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저렇게 폭력적일 수 있는가 하는 저 놀라움에 한동안은 아버지의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피했다고 하니 말이다.
아버지의 권위에 눌린 채로 아이는 학교에 다닐 수밖에 없었고, 마지못한 것이었겠지만 열심히 다닌 덕택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까지 무사히 마쳤다. 물론 아버지는 방학이 돌아올 때마다 독일의 친구를 만나는 기회를 보상으로 주었지만 말이다.
그분도 아들의 국적을 포기하고 독일로 보내기를 왜 바라지 않았겠는가? 자식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독일로 다시 보내고픈 유혹의 마음이야 오죽했겠는가? 왜 그 분이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것을 주저했겠는가? 어쩌면 아버지로서 아이가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유연한 방식을 가르치고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 분이 독일에 있을 때 얘기다. 유학생의 처지가 다 그렇지만, 학교 도서관에서 늦게까지 공부하고 피곤한 육신을 끌고 조금은 낙담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오곤 했다. 유학생의 형편으로서는 상당히 비싼 책을 책상 위에 펴놓고 나갔는데, 아이들의 호기심이 늘 그렇듯 이놈의 귀여운 자식이 그 비싼 책에 낙서를 해대곤 해서 몇 번인가 주의를 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너무도 화가 난 나머지 아이의 멱살을 부여잡고, '이것은 아빠의 것이지, 네 장난감이 아니야. 넌 네 책과 네 장난감을 가지고 놀아라'라고 호통치면서 마구 흔들어댔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우악스런 손목에 잡힌 채로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아이가 소리치기를 "아빠, 난 아빠의 장난감이 아냐. 날 흔들지 말라구"라고 소리치며 대뜸 말대꾸하더라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그 말에 얼마나 아버지가 혼쭐나고,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렸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상상이 간다.
또 어느 날인가는 티브이를 보고 있는데, 프로그램에서 '친애하는 숙녀 신사 여러분'을 상투적으로 반복하면서 말을 시작하는 사회자를 유심히 바라보더니만, 아이가 중얼거리듯이 '그리고 어린이 여러분'(운트 킨더스)이라고 덧붙이더라는 것이다.
그때 아버지가 또 한 번 놀랐다는 것이다. 얼마나 사회자의 그 말이 거북했으면, '왜 나는 시청자가 아니냐. 우리라는 존재도 인식해다오'라는 무언 아닌 유언의 반항이 아이 편에서 생겨났겠는가? 이것을 두고 아이들의 '주체적 사유의 발생'이라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또는 그 역으로 입국 수속하다 보면 작은 나라의 비애를 느끼곤 한다. 캐나다와 미국인은 그저 여권만 흔들며 지나가면 그만이다. 그런 경험 한두 번하다 보면 더럽고 부러운 나머지 내 자식이라도 미국 시민권 가졌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드는 것이 인지상정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게 무슨 큰 대수라도 되는 것일까? 조금 귀찮고 번거로울 뿐이지, 어디 그게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 시민권을 가질 정당한 사유라도 된단 말인가?
여행하다 보면 부모는 대한민국 여권이고, 자식은 미국 여권을 가진 경우를 더러 본다. 그걸 무슨 계급장이고 완장인 양 흔들어대며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사람들을 보는 수가 있다. 그분 속사정이야 잘 모르겠지만 그저 구토 증세를 일으키는 역겨움만이 남을 뿐이다.
바로 내가 사는 집이 법무부 산하 출입국관리사무소가 바로 코앞에 있는 곳이다. 민원인이 그렇게 많이 북적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알고 보니, 그게 자식의 국적을 포기하려는사람들이 늘어서고 있기 때문이란다.
자녀의 국적 포기를 신청하는 부모들 상당수가 미국 등에서 유학한 교수, 의사나 상사 주재원, 연구원, 외교관 등이라고 한다. 해외에 단기 혹은 장기 체류하면서 낳은 자녀의 한국 국적을 버리려는 민원인들 대부분이 사회지도층 인사들이라고 하니 무어라 말하기 부끄러울 따름이다.
직업상 지인들이 대개 외국에서 공부한 사람들이다. 그 중에는 틈만 있으면 자식 데리고 미국에 가서 학교 보내려고 안달하는 친구들도 더러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들 중 상당수가 이중국적을 가진 자식들을 두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미국의 학교가 천국으로 알고 있는데 천만에, 만만의 말씀이다. 거기도 서부시대의 카우보이들이 날뛰며 총알이 빗발치는 땅으로 변할 수 있는 곳이다. 뉴스도 보지 않는가?
우리야 어쩌다 버릇없는 놈들 한둘, 애 패서 말썽부리는 놈이 나타나지만, 거기는 SF영화나 나올법한 총 들고 마구 쏴대는 통에 언제 단번에 마른번개에 콩 튀듯 머리 날아갈지 모르는 세상바닥이다.
그런 곳에 자식을 공부시키겠다고 보낸다니, 이건 정말 맹모삼천지교가 아니지 않은가. 총알이 넘실대고 지진이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땅으로 자식을 보낸다니, 배포 좋은 부모든가, 아니면 무지한 부모이든가 둘 중의 하나일게다.
LA에서 공부하던 친구 놈은 지진을 겪고 나서 그 공포에 한참 시달리다 토론토로 이주해서 살고 있다. 그는 캘리포니아 근처엔 얼씬거리지도 않는다. 정말 모진 친구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번 기회에 한국국적을 포기할는지는 모르겠다. 만에 하나 특별한 사정이 없는데도 부화뇌동해서 자식의 국적을 포기한다면 그런 친구들에게는 대한민국 시민이기를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권하고 싶다.
아무리 가진 것이 그 사람의 본질을 규정해주는 시대라고 해도 부모 땅 팔고, 조상 피 팔아 저 땅에 나가 호의호식하면서 산들 그게 무슨 인생에 큰 의미를 준단 말인가?
어린 자식이 정체성을 확립하기 전에 부모가 미리 정체성의 혼돈을 조장하는 것은 어른으로서 좋은 태도가 아니다. 자기 스스로 인생을 설계하고 두 발로 설 수 있는 나이까지 그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배울 수 있도록 그대로 놔두는 것이 부모로서 취할 올바른 방향인 듯싶다.
만일 사회적 여건이 그렇지 못하다고 탓하려거든, 그 잘못된 여건을 고쳐나가려는 노력을 얼마나 기울였는지 자신을 돌아볼 일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 부모로서, 시민으로서 '성숙한 인간'이 먼저 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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