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개봉 된 <쉘 위 댄스>(Shall We Dance, 1996)라는 영화가 던진 파장은 적지 않았다. 중년의 주인공 수기야마(야쿠쇼 고지 분)의 자아를 찾는 과정에 많은 이들이 공감했고, 춤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견을 없애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5년 ‘국민 여동생’ 문근영의 바람이 불고 있다. 영화 <댄서의 순정>의 장채린(문근영 분)과 나영세(박건형 분)의 휘감아 도는 멋진 어울림 역시, 나른한 일상에 지친 이들에게 삶의 활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아댄스’요? ‘아이 러브 댄스스포츠’랍니다
지난 12일(목) 오후 7시 반, 강남역 사거리 부근의 한 댄스클럽에는 90여 명의 남녀 직장인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100여 평 규모의 홀을 가득 메운 이들은 댄스 스포츠 동호회 ‘아댄스’(아이 러브 댄스스포츠, http://cafe.daum.net/ilovedancesports)의 회원들.
2000년 10월부터 춤이 좋아 모여 든 이들의 수는 현재 6600여명을 넘어선다. 연령대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이 주를 이루지만 대학생과 40대도 함께 한다. 정기모임은 매주 목요일에 한번, 그 외 주중에는 스윙, 룸바 등의 개별 강습이 있다.
댄스 스포츠를 배운지 3년째라는 운영진의 이동민(32)씨는 “직장인 뿐 아니라 가정주부도 있고 결혼한 커플이나 사귀고 있는 연인끼리 손을 맞잡고 오기도 한다”고 구성원들을 소개했다.
대학조교인 이효진(경력 5년차)씨는 “이곳에서는 라틴댄스(룸바, 차차차, 자이브, 삼바, 파소도블레) 뿐 아니라 클럽댄스(살사, 스윙) 등을 적절히 섞어 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좋아 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이 날 동호회를 처음 찾은 이들만 약 30명. 평소 오는 신입회원이 네다섯 명 정도라고 하니 놀랄 만큼 많은 이들이 용기를 내 문을 두드린 셈 이다. <댄서의 순정>이 준 후폭풍이 만만찮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신입회원인 최연선(24)씨는 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했다고 한다. 교양으로 댄스스포츠를 배웠는데, 너무 재미있어 계속 하고 싶었지만, 전공에 밀려 제대로 즐기지 못한 것이 아쉬워 ‘한’을 풀기 위해 참석하게 됐다고 한다.
부끄러움? 그런 건 벗어 던져라
30분 정도 자유스런 몸 풀기가 끝나고, 회원이자 강사인 황남준씨의 ‘차차차’ 강습이 이어졌다. 초보회원들에게 강습을 해 주는 일은 경력이 오래 된 회원이거나 이전에 선수 생활을 했던 이들이 맡는다고 한다. 필요할 때 외부 강사를 초빙할 때도 있다고.
처음에는 천천히 박수를 치며 율동을 타는 방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짝, 짝짝, 짝짝” 박자를 익힌 후에 스텝 밟는 법이 이어졌다. “중심 왼 발에, 중심 오른 발에, 왼 발 오른 발” 강사의 율동을 따라하는 이들의 표정이 조금은 어색해 보였다.
“투 쓰리 왼 쪽, 투 쓰리 오른 쪽, 투 쓰리 차차차” 몇 번을 반복한 후에 배경 음악을 틀어 놓고 몸을 움직이자 그때서야 즐거운 웃음이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이어 남녀끼리 짝을 맞추어 서라는 주문이 떨어지자 다소 망설임이 일었다.
“댄스 스포츠는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커플 댄스이고 남녀 간의 호흡을 맞춰야 합니다. 눈치 보지 마시고 빨리 짝을 맞추세요.”
이어 서로간의 예의를 갖추기 위한 인사가 이어지고, 조심조심 발걸음을 떼놓기 시작했다. 흥겨운 음악이 시간을 타고 흐르자 송글송글 땀이 맺히며, 부끄러운 표정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파트너를 바꾸고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고. 결국 맞잡은 두 손 아래로 스텝을 밟는 발끝이 더 없이 경쾌해 지고 있었다.
강습을 맡은 황남준씨는 전직 댄스 스포츠 선수다. “영화 탓인지 평소보다 많은 사람이 찾은 것 같다”며 “댄스스포츠는 운동과 다이어트 효과도 있지만 타인과 만남의 장을 열어준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인 것 같다”고 한다. 물론 일부 ‘어른’들은 아직도 색안경을 쓰고 볼 때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예전과 시각이 달라진 것을 느낀다고.
본격적으로 빠져 봅시다
강습이 끝난 후 신입 회원들의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그런데 한두 명을 제외하곤 모두 여성들이었다. 남성들이 여성에 비해 ‘춤’에 대해 다소 꺼리고 소극적인 면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적어도 그 자리에 나온 이들에게는 ‘다른 사람’ 이야기였다. 커플 댄스 시간이 이어지자 룸바, 차차차뿐만 아니라 가요와 팝까지 댄스에 맞게 편곡 된 음악이 흘러 나왔고 모든 이들이 격의 없이 어울려 흥겨운 춤의 향연을 벌이기 시작했다. 처음 나온 이들도 빠지지 않고 기존 회원들의 리드에 몸을 맡겨 가며 서투르지만 자신의 열정을 사르고 있었다.
어두운 공간이라 종종 주위에 있는 사람과 몸을 부딪치기도 하고 때로는 발을 밟는 일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모든 이들은 정중히 고개를 숙여 사과의 뜻을 표했다. 어떤 스포츠보다도 매너를 우선시 한다는 설명이 수긍이 갔다.
한 쪽 벽면에서는 아직 초보 티를 벗지 못하거나 개인적 연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거울을 보며 스텝 연습을 하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모두의 얼굴에 시원한 웃음이 가시지 않았고 점점 분위기는 밝은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춤을 통해 얻은 사랑…부부가 돼 집에서 한 곡
훌쩍 밤 10시가 넘어, 공식 일정이 끝나자 대부분의 회원들은 뒤풀이 장소로 자리를 옮겨갔다. 폭소와 건배가 넘치는 자리였지만 다른 동호회 모임과 다른 점은 담배연기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모두가 금연인 건 아니지만 춤을 가까이하다 보니 대부분이 자연스레 담배와도 멀어지게 됐다고 한다.
그 중 정효동씨와 노정원씨는 동호회에서 만나 사랑을 키우고 결혼에도 골인한 커플이다. 신랑 효동씨는 작년 12월에 결혼해 신혼의 꿀맛을 즐기고 있는 중이라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외국에 나갈 일이 있었는데, 그 곳에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함께 춤을 추시더군요. 너무 보기 좋아 나중에 저렇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에 춤을 배우다 보니 배필도 만나게 되더군요. 아내와 같은 취미 생활을 하다 보니 성격도 비슷해지고, 다들 우리를 부러워합니다. 다른 분들께도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의 댄스스포츠 예찬은 끝이 없었다. 평소 집에서도 아내의 손을 맞잡고 춤을 추고, 그 때만큼 행복한 때가 없는 것 같다며 은근한 자랑을 내 비치기도 했다. 또 내성적인 성격을 고치는데도 그만이고 성격자체도 활발해 진다고. 결국 그는 “춤 한 번 배우세요”라는 말로 긴 인터뷰를 끝냈다.
댄스스포츠의 진정한 매력, 서로의 교감에 있다
동호회의 ‘명예 방장’인 한우석씨는 “간혹 이성의 손을 잡을 수 있어 딴마음을 먹고 오는 이들도 있다”며 “하지만 영화 <쉘 위 댄스>에서처럼 결국은 춤 자체에 빠지게 된다”고 말했다.
“직장에서 쌓인 스트레스가 풀리는 건 물론이고 그 이상 삶의 활력소가 되지요. 춤에는 본능적인 무언가가 있습니다. 혼자만의 무아지경이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호흡하고 교감하는 묘미가 있거든요. 물론 춤 안에서 사랑에 빠져 실제 결혼한 분들도 동호회 내에서만 열 댓 커플이 넘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중요한 건 남녀라는 관계를 떠나 상대방을 헤아리고 이해해 준다는 거지요.”
밤이 깊어갔지만 춤에 대한 그들의 열정과 사랑은 쉼 없는 대화를 통해 이어졌다. 문득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영화 속 주인공을 닮아 있다는 느낌이 들며 한 구절의 대사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적어도 춤을 추는 순간만큼은 나를 사랑하도록 해. 나도 널 사랑 할 테니.”
| | 댄스스포츠(DanceSport)란? | | | | 17세기 유럽의 궁중에서 사교를 목적으로 추는 춤인 사교댄스(Social Dance)에서 시작하여 볼룸댄스(Ballroom Dance;볼룸은 영국왕실의 둥그런 큰방에서 유래가 됐다)로 불렸다. 1995년 4월 국제 올림픽 집행위원회 회의에서 댄스스포츠의 경기종목을 인정, IOC에 가입이 되면서 2000년 시드니 올림픽 폐막식 시범종목으로 채택되었다.
일본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스포츠댄스 또는 스포츠댄싱이라고도 불리는데 올바른 명칭은 ‘댄스스포츠(DanceSport)’ 다. 댄스스포츠의 종류는 모던댄스(왈츠, 탱고, 퀵스텝, 폭스트롯, 비엔나왈츠)와 라틴댄스의 두 종류로 나뉘어 지며 남녀 한 조가 1분 30초 동안 경기를 벌인다.
최근 우리나라의 댄스스포츠 인구는 대략 4백만 명(2004년 4월 2일 YTN 보도) 정도로 추산되며 초·중·고교 및 대학 등 학원가는 물론 각종 문화센터와 직장인 동호회 등을 중심으로 꾸준히 늘고 있다.
아울러 2006년 카타르 도하 아시안게임에선 10개의 메달이 걸려있는 정식 종목으로 지정돼 취미 수준을 뛰어넘는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됐다. / 나영준 | | | | |